스스로 있는 여자
장혜진 지음 / 별빛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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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어스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스스로 있는 여자/장혜진



 

 

귀한 걸 훔친 것마냥 집까지 아이를 품고 서두른 명옥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설탕물을 젖에 묻혀 아이의 입에 대었다. 울음은 멈췄고, 눈은 계속 내렸다. (9)

 

명옥이 몸주로 섬기는 신은 아주 오래된 산신이었다. 마을 뒤쪽으로는 세가 대단한 큰 산이 있었다. 명옥은 그를 할멈이라 불렀다. 할멈은 천지를 뒤흔들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마른하늘에도 비가 쏟아지게 했으며, 나무가 베어진 날에는 천둥번개를 쳐 그를 꾸짖기도 했다. 나라가 뒤엎어질 만큼 큰 전쟁 여럿에도 할멈의 산은 신비한 힘으로 멀쩡했다고, 명옥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전해져 내려왔다. (10)

 

대대로 무녀인 집 막내딸로 태어난 명옥은 우여곡절 끝에 가족들을 모두 잃고, 결국 산신인 할멈을 모시기로 하고 신당을 차린다. 홀로 남은 명옥에게 운명처럼 딸 설이가 와주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명옥과 설이는 그렇게 서로를 보듬으며 모진 삶을 이어간다.

 

설은 그런 중에 온통 할멈만을 모시던 명옥의 마음이 자신에게 쓰이는 것이 눈치가 보였다. 고뿔에 걸린 자신을 돌보기 위해 명옥이 독경을 미룰 때나, 당신의 딸이 놀림 받지 않도록 한 걸음 뒤에서 걷는 것 같은 것이 설은 죄를 짓는 마음이 들었다. 명옥이 몸져누운 날이면 설은 명옥의 차가운 손을 거듭 주물렀다. (20)

 

설은 예사롭지 않고 영특하게 자랐는데, 명옥은 딸이 자신과 같은 길을 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마침 설이 스스로 머리를 땋을 수 있게 되었을 때쯤에, 서양인 선교사가 설이 사는 마을에 들어온다. 무당의 딸인 것을 알면서도 내치지 않아, 아픈 엄마를 위해 설은 신부님한테서 허드렛일을 하며 음식을 구하고 글자도 배우게 된다.

 

사흘 전 관아에서 신부님과 신부님 집의 사람들을 모두 잡아갔다. 평소와 다름없이 걸음한 신부님 집이 온통 난리였는데, 마루는 물론 방문까지 전부 활짝 열린 채 온갖 책들이 버려져 있고, 십자가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36)

 

모두 신의 뜻이라고들 하지만, 엄마의 병이 멈추지 않으면서 이미 설의 마음엔 이제 신의 뜻 같은 것 없다는 생각이 가장 깊은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어디에도 신은 없었다. 명옥의 자결을 막은 것도 명옥 스스로였고, 신부님을 멀리 이곳까지 보낸 것도 신부님 자신이었다. 저는 할멈이 보낸 딸이 아니라 버려진 아이에 불과했고, 저를 살린 것 또한 신이 아니라 명옥이었다. (40~41)

 

신이 인간을 만든 게 아니라, 인간이 필요해서 신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설은 자꾸 기도하고, 계속 바라고 또 바라면서 그것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설은 끝내 그의 신을 부른다.

 

장혜진 작가는 책과 영화를 좋아하고, 읽고 싶은 것을 쓰고, 보고 싶은 것을 만든다고 한다. 멀리 떨어진 곳으로 떠났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를 좋아하며 아직 읽고 싶은 게 많아 더 잘 쓸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한다.

 

이 책 스스로 있는 여자, 먹이, 멀리서 온 거짓말이렇게 세 편이 수록되어 있다. 어쩌면 아주 평범한 이야기들을 저자는 평범하지 않게 엮어 나간다. 세 편 모두 짧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고, 독특하면서도 강렬하다. 모두 알면서도 차마 말로 드러내지 않는 이야기들을, 장혜진 작가는 이렇게 글로 슬그머니 끄집어내어 우리를 시험한다. 100쪽이 조금 넘으며 크기도 자그마해서 잠깐이면 읽을 수 있는 책인데, 세 편 모두 아주 긴 여운이 남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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