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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 개정판
조나단 스위프트 지음, 신현철 옮김 / 문학수첩 / 1992년 7월
평점 :
어릴 적 동화책이라는 부류 속에서 걸리버 여행기를 발견하는 건, 안데르센 저서의 동화책들과 그림형제 동화, 그리고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만큼이나 자연스럽고 익숙했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이 책을 다시 만났을 때, 걸리버 여행기의 정체성을 다시 알아보게 될 줄은 몰랐다.
무엇보다 원작을 읽으면서 당연한 사실임에도 그 동안 아무런 인식을 못했던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소인국이든, 거인국이든 여행지에서 만난 이들과 걸리버와 말이 통할 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아니, 소인국도 엄연히 해외에 있는 나라이고 다른
언어를 쓸 것이 당연한데 왜 그 동안 이런 상식적인 걸 잊고 있었는지...
1. 릴리퍼드
누구나 한 번쯤은 이 소인국 파트를 접해봤을 것이다. 이게 동화로 개작됐을 때는 약간 훈훈한
느낌이 있는데, 원작은 절대 그런 느낌이 아니다. 걸리버가 겪을 고난의 서막일 뿐이다.
나름 풍자소설이라지만, 릴리퍼드의 크기가 얼마나 작은지 상세히 서술하고 있어서 소설적
재미에도 신경썼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에서도 끊이지 않는 당파싸움이라던가, 상반된 의견을 하는 이들에 대한 탄압과 억압,
그리고 높은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이들의 라인타기에 대한 풍자가 엿보이는 부분이 많았다. 거기에 작가가 살던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왕권신수설에
대한 언급과 계급도 나타나 있다. 주로 이런 부분은 여행지 나라의 문화라면서 서술하는데, 이런 부분을 보며 정치적인 건 물론이고 유럽 문화적인
부분까지 풍자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릴리퍼드가 소인국으로 나온 것도 이러한 문제점들을 가지고 대립하는 이들을 작가가 느끼는
관점에서 나타낸 것이 아닌가 싶다. 자기네들끼리 엄청 진지하게 싸우는데 작가가 보기에는 하찮은 것 그 이상도 아닌 것일지도 모른다. 라인타는 걸
풍자한 부분을 보면 거의 광대놀음에 가까운 개그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2. 브롭딩낵
릴리퍼드에서 거인으로 모진 대우를 받았다면, 여기서 걸리버는 소인으로 온갖 능욕을 당한다.
아마 모든 여행기를 통틀어 꼽자면 걸리버가 가장 고생한 곳이 아마 이곳일 것이다.
릴리퍼드가 자잘한 느낌이었던 반면, 브롭딩낵에서는 모든 게 걸리버의 입장에서 공포 그 자체로
서술된다. 여기서도 이 나라가 얼마나 거대한지 상세히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걸리버가 느끼는 압도감과 공포를 간접적으로 느낄지도 모른다.
주로 크게 봄으로서 평범한 것들이 다르게 보이는 확대효과가 나타나는데, 단순하게 작았던 것이
크게 보임으로서 느껴지는 괴리감 외에도 작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이 하등할 것이라는 논리가 거만함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처음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브롭딩낵에서의 논리를 보다보니 그 당시 식민지를 개척하던 열강들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들과 크기가 다르다는 것만으로
하등취급하고, 그가 살던 곳들도 마찬가지로 하등하다고 여기는 논리. 이는 크기 문제를 인종이라던가, 종교, 문화로 바꾸어 보면 딱 그 당시
열강들의 논리와 일치하는 것과 더불어, 현재에도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인종차별, 종교문제, 문화차별까지 이어진다고 본다.
이렇듯 브롭딩낵 자체가 문화 우월적인 면이 강하다는 문제가 있지만, 작중 서술된 정치적인
부분은 휴이넘과 더불어 가장 이상적인 나라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3. 라퓨타
그 동안 크냐 작냐의 문제로 내용이 진행되던 것이 여기서부터는 아주 가관의 연속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독한 풍자로 버무려진 부분이다. 소인국 릴리퍼드와 더불어 라퓨타라는 이름도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많은 분들이 아는 이름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 원작소설에서의 모습을 보면 완전 딴세상이다.
주로 학식있는 사람들에 대한 풍자로 보이는 게 많은 편이다. 앞의 릴리퍼드나
브롭딩낵에서도 학자들에 대한 풍자가 있었지만, 라퓨타에서는 보다 더 근본적이고 체계적으로 풍자해서 지식인 풍자의 최고봉이라 할 수도
있다. 극단적인 학식의 적용이 얼마나 비이성적인지 나타난 건 물론이고, 심지어는 수학과 음악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바보들이라며
매도하기까지 한다. 라퓨타 사람들의 외모도 이상하게 나타낸 걸 보면 제대로 바보들이라 나타낸 것일지도 모른다.
특히 아카데미라는 기관이 가관이다. 의미없는 실험부터 발전이라는 탈을 쓴 퇴보적인 연구 같은
것들만 있어서 이게 교육기관인지, 학자를 빙자한 퇴물들만 모아놓은 집단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다. 오죽하면 정치 쪽에서는 망상만하는 정신나간
사람들이라는 표현까지 쓸 정도다.
후반에 가서는 역사가 권력에 의해 쓰여진다는 부분과 지극히 현실적인 면에서 쓰여진 불로장생에
관한 부분이 나온다. 불로장생에 관한 부분은 어떻게 보면 그냥 상상 속의 일을 현실적으로 쓴 것 같아 보이지만, 얼핏보면 나이가 많아질 수록
인간은 어리석어질 뿐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불로장생이 축복이 아닌 재앙이라 하는 걸 보며 역시 이상보다는 현실이 더 시궁창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4. 휴이넘
여행기의 절정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라퓨타 보다 더한 충격과 공포를 선사한다. 조나단
스위프트가 오늘만 살겠다는 심정으로 썼다 추정될 정도이다.
이성에 대한 논의를 넘어서 인간 혐오에 가까운 내용이라 보기에 따라 약간은 불편할지도
모른다. 주로 영국의 모든 것을 얘기하며 이렇다 저렇다 하며 진행된다. 그저 평범하게 얘기하는 거라면 모를까, 여기서는 하나하나 짚어서 말하며
현실적인 얘기를 늘어놓는데 대부분이 나쁜점들 밖에 없어 보인다. 특히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나쁘게 말하는 걸 보면 말이 안 나올 정도다.
남녀에 대한 건 물론이고, 변호사나 의사 같은 직접적인 직업을 언급하며 역겨운 사기꾼들이라 언급하고, 귀족이나 장관 같은 부분은 아예
대놓고 사치와 게으름으로 찌들었다는 등, 이 정도면 차라리 라퓨타에서 나타난 풍자가 더 약해 보일 정도다.
앞선 여행지와 다르게 걸리버는 휴이넘에 대해 칭찬일색이지만, 내가 볼 때는 휴이넘에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자잘한 문제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름 아닌, 이성을 앞세우며 자신들이 야만스럽지 않다하면서 몇 가지 결점으로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아무리 휴이넘이 이성적이고 깨끗한 사회라 할지라도 비판을 무조건 외면하고 탄압하려들면 그렇게
야만스럽다 여기는 야후랑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어쨌든 걸리버 여행기에서 가장 의미있는 부분이긴 하지만, 이전의 다른 여행기와 달리 토론과
대화 위주가 많은 편이고, 배경 설정상 주로 집에만 칩거하다보니 다양한 묘사없어서 보기에 따라 지루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