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괴 대도감
미즈키 시게루 지음, 김건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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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감류의 책은 언제나 흥미가 생긴다. 같은 주제를 다룬 책이 여러 권이더라도 여기는 뭐가 다르고, 이건 어떤 식으로 특색이 있을지 비교하는 재미가 있다. 물론 그 중에는 생각보다 실망인 것도 있는 편이긴 하다. 내용이 빈약하다던지, 그림이 별로라던지. 둘 다 만족스러우면 좋겠지만 그래도 가장 이목을 잘 끌 수 있는 건 아무래도 그림이다. 아무리 글이 잘 써져 있다 해도 그림이 받쳐 주지 않으면 뭔가 부족하다는 인상이 확 들기 때문이다.

저자인 미즈키 시게루의 이름은 많이 들어본 편이다. 요괴 관련된 정보나 작품에서 언제나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작가 분이라 그렇다. 독특한 그림체를 가진 만화로도 유명해서 한 번 보면 금방 알아볼 정도다. 그렇다 보니 이 작가 분의 이름으로 나온 요괴 도감이라고 하니 큰 기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림 부분에서 그랬다.

대체로 알아보기 쉬운 분류로 정리 되어 있다. 유명한 요괴, 인간형, 동물형, 반인반수, 물건형(츠쿠모가미류), 불꽃의 형태, 자연물. 그냥 보기에도 단순하고 직관적이라 나쁘지 않다. 이 중에 동물형에는 비슷한 계통에 속한다고 여겨진 경우를 묶어 놓은 부분은 처음 봐서 주목하게 됐다. 맨 처음 1장인 유명한 요괴 부분은 어떻게 보면 분류하기 어려운 것들을 뭉뚱그려 놓은 걸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한 번 쯤 어딘 가에서 들어 봤을 요괴를 굳이 나눠 놓는 것보다는 한 번에 찾아보기 쉽게 모아 놓는 편이 더 효율이 좋게 보여서 그렇다.

현대에 유행한 괴담인 인면견과 입 찢어진 여자 같은 경우도 요괴로 취급하여 포함되어서 다소 특이하게 보일 만도 하다. 개인적으로 요괴가 문화적 현상이라고 봤을 때 현대에 존재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식으로 해석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요괴가 단순 과거의 산물이 아니라 현대에 새로 생겨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의미라고 본다. 아직은 현대 괴담 영역을 포함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나중에는 요괴 도감에 현대 요괴 항목이 생길 것이라 기대해봐도 좋지 않을까 싶다.

그림은 기대한 것 만큼 흥미롭다. 옛날 요괴 그림에 있던 형상을 그대로 따라 그린 듯한 것이 있는 가 하면, 작가 특유의 스타일이 돋보이는 그림이거나, 두 스타일이 섞여 있는 경우도 있다. 아무래도 묘사된 기록이 존재하는 경우면 최대한 비슷하게 나타내고, 그렇지 않은 경우나 다소 보충이 필요한 곳에는 작가의 상상을 반영해서 묘사한 걸로 보인다. 아기자기하거나 소소한 유형에는 익살스러움이 느껴지는 편이고, 제법 섬뜩한 유형에는 세밀한 표현이 돋보여 기괴하고 소름 끼치는 느낌이 살아 있다.

각 요괴에 대한 정보는 간략하게 서술된 편이다. 여기서 말하는 간략함이란 생김새와 특징, 자주 목격된 지역, 관련된 옛 이야기 정도의 내용이다. 딱 이게 어떤 요괴인지 파악할 수 있을 정도다. 그렇기에 더 상세한 분석이나 문헌 자료를 원하는 경우라면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다르게 말하면 간편하고 쉽게 보기 좋아서 조금 더 다양한 요괴를 알고 싶다면 딱 좋다. 익숙한 것이 많으면서 처음 보는 것도 많으니까. 한편으로는 이게 왜 없을까 싶은 부분도 조금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적으로 느끼는 인상 정도라고 알아두면 되겠다. 다른 이들에게는 아쉬움이 크지 않을 정도로 꽉 차 있다고 보여지니까.

듣기로는 세계의 요괴를 다룬 책도 있다고 하던데, 그것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 거기에는 또 어떤 스타일의 그림이 있고, 어떤 설명을 써놓았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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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의 약속 매그레 시리즈 8
조르주 심농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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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만이 아는 세상이란 것이 간혹 있다. 작은 사회, 닫힌 사회 같은 지역적인 특성과 비슷할 수도 있지만 어떠한 경험을 통해 공유되는 환경이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극한의 환경 속에서 버텨온 이들만이 가지게 되는 의리. 또는 그들만의 세계에서 돌고 돌며 함구하는 꺼림직한 무언가. 지역사회라면 그 지역의 분위기만 파악하면 그만이지만, 환경은 정해진 그 순간 밖에 느낄 수 없는 정취다. 그래서 이미 사라지고 없는 흐릿한 잔상 만을 단서로 추정해야 되기 때문에 어려울 수밖에 없다.

부인과 함께 여름 휴가를 가려던 매그레 반장은 지인이 보낸 편지를 받고 휴가지를 변경해 페캉으로 떠나게 된다. 페캉에 정박한 대구잡이 저인망 어선인 오세앙 호에서 선장 살해 사건이 발생했고, 용의자로 검거된 전신 기사이자 지인의 제자인 피에르 르 클랭슈의 결백을 밝혀 달라 했기 때문이다. 수감되어 있던 클랭슈가 노란 구두를 신은 누군가가 선장을 공격하는 순간을 목격했다는 증언을 해서 사건은 순조롭게 풀릴 것 같았다. 그런데 조작된 흔적이 전혀 없는 선장의 유서가 발견되면서 모두가 당황하고 마는데...

뱃사람들 만의 세계를 다루는 내용이다 보니 복잡한 면이 꽤 보인다. 사건 자체의 난해함이라기 보다는 속내를 알기 어려운 사건 관계자들의 모습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간단하게 해결될 일을 쓸 때 없이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는 인상도 있다. 동료 의식을 통해 나오는 의리나 도리 같은 건 아니다. 조직이 있으면 늘 대두되는 침묵의 규율이라 하는 오메르타에 가깝다. 하지만 하나 같이 신경질 적이고 불길한 인상만 가득한 분위기를 보다 보면 점차 알게 된다. 그들 역시 제대로 파악이 안 되는 대혼란이라는 걸 말이다.

겉으로 볼 때는 굉장히 사소한 사건처럼 보여도 장소가 장소다 보니 심각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고 봐야 한다. 자연스러운 일상이 있던 육지가 아니라 출항을 떠나 바다 한가운데 있던 배라는 특수한 상황이라 그렇다. 거친 바다 위의 생활은 사소한 실수에도 목숨이 왔다갔다 하기에 늘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긴장감과 함께 한다고 어디서 들은 적이 있다. 이래서 규칙에 엄격할 수밖에 없다고. 그런데 이러한 분위기를 흩뜨리는 일이 생긴다면 어떨까. 언제나 한결 같은 규칙이 깨지고 질서가 망가지니 남은 건 이거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시간 속에서 계속되는 비정상적인 긴장감과 극한의 환경이 만들어낸 뒤틀린 감정들 뿐이다.

사람의 감정은 주변 환경에 따라 쉽게 휩쓸릴 수도 있다는 걸 여러 사례를 통해 알긴 안다. 그럼에도 멀쩡하던 사람이 이렇게 까지 분별력 없고 극단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만도 하다. 한순간의 충동으로 이성을 잃었다고 보기에는 바다와 육지에서의 모습이 너무 달라서 그럴 것이다. 이건 양심이 없어서 그렇기 보다는 오히려 양심의 가책을 크게 느끼기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방어기제이자 돌발 행동이라고 봐야 한다. 차라리 뻔뻔하게 모르쇠로 일관할 수 있었으면 모를까, 바다 위에서 잃어버린 이성이 육지에서는 다시 돌아오니 그만한 비극은 또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정직하고 평판이 나쁘게 살아오지 않은 이들이라 더 그렇다.

결국 환경이라는 안개를 걷어내고 밝혀낸 진상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나 다름 없다. 어느 누구를 탓하기도 어렵다. 의미를 잃어버린 선원의 약속 앞에서 모두가 미쳐 있었고, 모두가 피해자였으며,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었던 부조리 그 자체였으니까. 매그레 반장에게는 더 큰 파국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바다에서 일어난 일이 망령처럼 계속 남아 연이은 비극을 만들어내기 보다는 이대로 끝내야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이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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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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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나는 물

미시마야에서 열리는 괴담대회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어느 가게의 대행수 후사고로와 어린 견습 점원 소메마츠. 후사고로의 말에 따르면 소메마츠가 있으면 물이란 물은 전부 달아나서 바싹 말라 버린다고 한다. 이걸 소메마츠의 장난으로 여기고 매우 화가 난 상황인데, 정작 소메마츠는 자신은 아무 짓도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이 살던 마을에 있던 신이 들러 붙어서 저지른 것이라 주장한다. 실제로 소메마츠가 흑백의 방에 있던 사이에 주전자와 화병의 물이 순식간에 말라버리는 일이 발생하는데...

옛날에는 지금처럼 상수도 같은 것이 거의 없었기에 물이 귀해서 이와 관련된 일이라면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물이란 것이 과해도 문제긴 하지만, 없어도 문제가 생기는 점에서 자연과 미신에 의지하면서도 동시에 경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기에 작중의 이야기 주인공인 소메마츠는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다. 가끔 무섭거나 기묘한 이야기에 나오는 신기한 일을 몰고 다니는 아이 취급을 넘어, 민폐 그 자체로 여겨 지니까.

필요와 불필요의 문제가 작중 핵심이다. 이게 물건이 아닌 존재로서의 가치를 따지는 거라 더욱 복잡하다. 사람도 그렇지만 신과 관련된 이야기를 보면 이런 경우가 있다. 필요할 때 불러 놓고, 나중에 필요 없어지니까 소홀히 대하는 상황.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은 이거다. 왜 필요가 없다고 무조건 쓸모 없는 취급만 하는 걸까. 세상에 쓸모 없는 것이란 없다. 어딘가 쓰이는 일이 있고, 필요로 하는 곳이 있기 마련이다. 이걸 못 알아보는 이들이 나쁜 거나 마찬가지다. 필요로 하는 곳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으면서 멀쩡히 도움이 될 존재를 망가뜨리고 있으니 말이다.

다소 기괴한 면이 있으나 소메마츠와 함께 하는 신이 생각보다 귀엽게 묘사된 편이라 대체로 유쾌한 내용이다. 아무래도 필요에 대해 다루다 보니 사람이든 신령이든 외부의 편견과는 다르게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것이 중요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무작정 무서운 면만 돋보이지 않게 했다고 본다. 이해심 많고 좋은 사람들에게 유쾌함을. 이해심이 전혀 없는 고약한 사람들에게 벌을. 이렇게 정리가 되겠다.

덤불 속의 바늘 천 개

나막신 가게인 에치고야의 오타카와 세이타로와 함께 꽃놀이에 따라나선 오치카와 견습직원 신타. 도중에 미시마야 옆집에 있는 바늘가게인 스미요시야의 안주인 부부와 외동딸 오우메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스미요시야 가족들과 거리를 두며 따라 다닌 얼굴을 가린 여자의 존재를 목격하면서 오치카는 신경이 쓰이게 된다. 이 부분에 대해 오치카의 숙모인 오타미는 무언가를 알고 있으면서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곧 있을 오우메의 혼례가 끝나고 흑백의 방에서 스미요시야 안주인에게 물어보라고 한다...

자녀에 대한 문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아무 탈 없게 잘 자라기 만을 바랄 뿐이지만, 언제 어떻게 위험에 처할지 모를 일이다. 옛날에는 이런 부분에서 더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치료가 힘든 질병 같이 현실적인 것도 그렇고, 말도 안 되는 미신이나 설명하기 어려운 괴이한 일 같은 것도 있었으니. 여러 방면에서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미신으로 인해 벌어진 가족 문제이자 저주에 가까운 일이라 여러모로 복잡하다는 인상이다. 이 저주라는 것이 오컬트에 나오는 괴이한 것이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근간을 따라가면 결국에는 사람이 원인이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나타낸 것이라고 보면 쉽다. 하지만 대부분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결국은 사람 아닌 존재의 짓으로 여기는 일이 많다. 살아 있는 누군가의 악의라 믿고 싶지 않아서 일까, 우연의 우연이 겹쳐서 그렇게 보이는 걸까. 아니면 의심 가는 사람이 있더라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에 책임을 떠넘기는 걸까.

가까운 사람 간의 질투가 더 무섭다고 하던가. 겉으로는 잘 지내다가 어떤 식으로든 폭발하면 매우 무섭게 돌변한다고 하니까. 참으면 병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건 이런 뜻일 테다. 서로 조심한다고 하면서 무작정 참기만 하니까 이상한 형태로 표출되고 마는 것이다. 원인을 알 수 없이 어디가 갑자기 아픈 것부터, 생각지도 못한 음습한 짓을 벌인다던가 하는 일이 일어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어디까지나 표현의 문제나 다름 없다. 표현을 하지 않으니 어떤 생각인지 알 수가 없고, 표현을 하지 않으니 마음에 쌓아두게 되고, 표현을 하지 않으니 마음의 병이 된다. 무엇보다 가까운 사이던 아니던 간에 모든 걸 아는 듯이 여기는 것부터가 큰실수다. 사람은 겉만 봐서는 알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속을 터 놓고 솔직하게 말을 해야 가까워지지, 숨기는 것이 많으면 가식만 늘어 멀어질 뿐이다.

안주

비가 내리던 어느 날, 미시마야의 견습직원 신타가 습자소에 갔다가 심하게 다쳐서 돌아왔다. 신타는 누구와 싸운 건 아니며 나오타로라는 아이가 관련된 일이지만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주장한다. 나오타로는 고용살이를 하던 아버지가 화재 사고로 돌아가신 이후, 어쩔 수 없이 사촌 집이자 비싼 값에 팔아서 악평이 많은 채소 가게인 야오노에 양자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런데 급격한 환경의 변화 때문인지 나오는 이따금 엄청 사소한 일로도 갑자기 화가 나면 짐승처럼 날뛴다고 한다...

환경의 변화는 어른이라도 잘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경우도 많은데 어린 아이라면 오죽할까. 안 그래도 아직 의사 표현이 서툰 시기인데 이래저래 요구 사항만 늘어나니 돌발 행동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을 만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최선일지 고민해 봐야 한다.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해피엔딩 같은 것이라면 좋겠지만 현실은 언제나 냉혹한 타협의 연속이다.

작중에서 나온 안주라 지칭된 존재는 일종의 어린 아이에 대한 비유가 아닐까 싶다. 사람의 나이나 성장 정도에 따른 어리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어떤 만물에 있을 법한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면 말이다. 어쩌면 요괴 같은 존재들은 어린 아이에 가까운 존재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면 그저 성가시다 못해 때로는 무섭다는 인상이 생긴다는 점만 봐도 그렇다. 악의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서로가 서로에게 서툴다 보니 발생하는 오해라고 본다.

자연의 이치로 인해 가까워질 수 없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든다. 어른에게도 어른만의 생각할 시간과 설명이 필요하듯이, 아이에게도 똑같이 필요하다고. 그냥 어린 애라서 이해하지 못할 게 뻔하니 받아들이라고 강요하거나, 그렇다고 일방적인 요구 사항을 들어주는 건 잘못됐다. 필요한 건 어떻게 해야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스스로 깨닫게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언제나 똑같을 수 만은 없다. 하지만 똑같지 않다고 모든 게 사라지는 건 아니다. 마음 깊이 남는 인연이 있다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혼자가 아니라고.

비록 아이의 관점에서 다루긴 했지만, 이건 어른에게도 해당되는 문제다. 아이는 제대로 된 설명을 해주지 않기에 이해를 못하는 일이 생긴다. 반면 어른은 오히려 설명을 해줘도 무작정 단정 지은 결론 때문에 이해를 못하는 경우다. 이걸 보면 설명을 해줘도 못 알아 듣는 건 아이가 아니라 오히려 어른 쪽이지 않을까 싶다. 나이가 들어서도 사람이 바뀔 수도 있지만 쉽지 않다는 건 이러한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무작정 꽉 막힌 사람이 아니라면 마냥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 해내는 법이다.

으르렁거리는 부처

최근 들어 흑백의 방에 시답지 않은 사람만 드나들어 뒤숭숭한 상황에서 오치카는 나오타로의 친구들이 알고 있던 가짜 스님 교넨보를 다음 손님으로 결정한다. 예상보다 사나운 인상의 교넨보는 이제는 정직하게 살고 있다면서, 가짜 스님 행색을 하던 시절에 겪은 일을 들려준다. 어느 산간 지방을 지나다가 발이 미끄러져 사고를 당했다가 근처 마을 사람들에게 구조됐다. 그 마을은 외관과 다르게 풍요로운 곳이었고, 가쿠넨이라는 스님이 사실상 마을을 대표하고 있었다. 그런데 교넨보의 몸 상태가 많이 좋아졌을 무렵에 우연히 마을의 비밀을 알게 되고 마는데...

외부와 고립되어 숨겨져 있던 마을의 비밀. 무서운 이야기나 영화에서 은근 자주 나오던 소재라 이제는 익숙하다. 하지만 이 작품의 경우는 처음부터 비정상적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광신적인 요소가 나오긴 나와도 끔찍함을 돋보이는 요소가 아니라 사람의 어리석음에 대해 다루는 교훈적인 부분에 가깝다. 어떻게 보면 불교 설화 같다는 느낌도 있다.

단순히 집단 이기주의와 개인에 대한 사적제재 문제로 인한 인과응보를 다룬 내용으로 보일 수 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가짜 스님 행세를 하던 사람이고, 끊임없이 부처님의 존재에 대한 논쟁이 나오다 보니 종교에 대한 내용으로 생각될 수도 있고. 하지만 실제로 말하고자 하는 건 이거라고 본다.

자비.

남을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며 도와주는 마음.

부처님이 곧 자비이기에 일종의 비유로 쓸 수도 있겠다. 그렇기에 작중에서 말하는 부처님이란 곧 자비에 대한 문제다. 부처가 없다는 건 자비가 없다는 뜻이고. 부처가 두렵지 않다는 건 자비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다는 거나 마찬가지다. 결국 자비 하나 없는 곳에 남은 건 무엇인가. 원망과 저주를 담은 냉소 뿐이다.

이 책의 작품 중에서 가장 무섭다는 인상이면서도 큰 의미를 주기에 마지막 에필로그까지 깊은 인상을 남기게 한다. 자비가 있는 아름다운 세상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부처님은 멀리 있다고 느껴지면서도 사실은 가까이에 있다고. 단지 그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아무렇지 않게, 또는 다소 매정하게 흘려 보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를 통해 사람과 사람이 인연으로 이어진 세상이 마냥 어둡지 않으며 밝은 곳을 찾을 수 있다고 느낀다. 미시마야에서 만들어진 인연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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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살인 사건 매그레 시리즈 7
조르주 심농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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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하다고 하면 정말 조금의 흠도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너무 깔끔해서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인상이 들기도 한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모습과 다른 어두운 구석. 이런저런 문제가 발생해도 체면을 생각해서 쉬쉬하는 풍조. 소란이 싫다는 이유로 진실에 다가가는 것을 경계하는 시선. 이런 게 있으면서 과연 깔끔하다고 할 수 있을까? 제 아무리 소란이 싫어서 감추고 싶은 일이 있다 해도 완전히 숨길 수는 없다. 결국은 균열이 발생하고 마련이니까. 깨끗함 밑에 가둬 두고 억압하던 오래 묵은 불만과 분노가 폭발해서.

네덜란드 델프제일에서 해군 사관 학교 교수 포핑아가 집에서 총에 맞아 살해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유력 용의자로 초청을 받아 방문한 낭시 대학 교수 장 뒤클로가 지목된다. 이런 통보를 받고 매그레 반장은 사실상 비공식으로 델프제일에 파견을 나가게 된다. 반장은 사건 관계자들로부터 당시 상황에 대해 더 자세히 들어보니 이상한 점이 더 발견된다. 뒤클로 교수가 범인으로 지목된 이유가 총을 들고 있었기 때문인데, 문제의 총은 2층 욕실에서 발견해서 무심코 들고 나왔다는 것. 그리고 욕실의 욕조 안에서 낡은 선원 모자가 발견됐고 주인은 포핑아와 친분 있던 오스팅이라는 노인이라고 한다...

프랑스를 벗어나 타국에서 벌어진 사건에 개입하는 내용이다 보니 매그레 반장의 입장에서 주변 환경이 낯설게 묘사되는 편이다. 사실 〈생 폴리앵에 지다〉에서도 타국인 독일에서 사건이 벌어지긴 했지만, 돌고 돌아 결국은 프랑스 안에서 시작된 사건으로 해결됐다. 그렇기에 타국에서 벌어진 사건에 제대로 개입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할 수 있다.

대체로 네덜란드 하면 떠오르는 엄청난 운하와 아름다운 풍경이 돋보이면서 지금과는 다른 딱딱한 인상이 많은 편이다. 다소 과하게 행동 하나 하나를 조심스러워하고.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그 어떤 소란이나 추문이 발생하기를 꺼리는 모습에서 깔끔을 넘어 결벽증으로 보일 정도다. 실제로 지금의 자유분방한 네덜란드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이 2차 세계대전 이후라고 하니, 그 이전에는 상당히 다른 분위기였을지도 모른다.

살인사건이라는 중범죄가 벌어졌음에도 대체로 평온한 분위기를 유지하려는 느낌이라 점차 이상함을 느끼게 한다. 보통 한 번 정도는 나올 법한 의심이나 수상쩍은 면에 대한 논의가 일절 나오지 않고 사건 관계자들은 하나 같이 이런 식이다. 피해자는 누구에게도 미움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사건 관계자 그 누구와도 아무 일 없었다. 자신은 아무 짓도 안 했으니 결백하다. 분명 범죄는 내부에서 발생했는데, 사실상 죄는 저 멀리 외부의 다른 곳에 있다는 듯한 투다. 이렇다 보니 매그레 반장 입장에서는 그다지 좋게 보일 리가 없다. 시답지 않은 이유로 쓸 때 없이 사건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으니까.

추리 작품에서 흔한 사건 관계자들을 모아 놓고 진실을 밝히는 과정이 이 작품에서 쓰이게 된 건 이러한 배경 때문일 것으로 본다. 그저 말로 설명하는 것을 넘어 사건 발생 당일의 상황을 시간 순서 그대로 재현할 정도다. 이렇게 까지 해야 범인은 물론이고 사건 관계자 전원까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봐야겠다. 보통 이런 클라이맥스 부분은 범인을 몰아 붙이는 의도가 강한 편이나 이 작품에서는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그 만큼 범인도 범인이지만 사건 관계자 때문에 더욱 힘든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답답한 분위기의 문화 속에서 발생한 비극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자유분방함을 죄악으로 여긴 탓에 재미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불행. 그렇다고 자유를 위해 체면을 버릴 각오까지는 없었기에 발생하는 갈등. 여기에 체면 밖에 없었기에 생겨버린 뒤틀린 감정으로 인한 증오. 제일 경악스러운 건 이 모든 걸 덮어버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지내고자 하는 분위기다. 사건이 해결됐다고 관계자 대다수가 불쾌해 하는 경우라니. 진실 보다는 대외적 이미지에 흠집이 생긴 걸 더 중요하게 여기게 하는 그 놈의 체면이 뭐라고.

이러니 매그레 반장이 당혹감에 속이 터지다 못해 우울해질 수 밖에 없다. 근본적으로 무엇이 잘못됐는지 전혀 모른 채 그저 깨끗함만 중요시 해서 남는 게 뭐란 말인가. 오직 깨끗하기만 해서 그게 행복일까? 깨끗해지려 하는 행동이 지나치면 되려 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 걸까? 이걸 보면 엄격하게 체면 따져가며 살 필요가 없어 보인다. 너무 방탕한 것도 문제는 문제지만, 그 반대 역시 문제가 없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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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차로의 밤 매그레 시리즈 6
조르주 심농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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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이 살면서 서로를 파악하는 건 중요한 문제다.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파악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일이 많아서 그렇다. 이게 단순히 사람의 성격이나 어떤 과거를 살았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현재의 삶에서 무엇을 원하고, 무엇이 중요하고, 그리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가 묻는 것이다. 이걸 신경 쓰지 못한다면 한 쪽만 일방적인 관계가 되고 상대방은 전혀 다르게 생각하는 이상한 모습이 된다. 이렇게 되면 누가 거짓인지 알아보기 어렵고, 누군가의 진심은 의심을 받으며 왜곡될 수밖에 없다.

아르파종 교외의 <세 과부의 교차로>에서 다이아몬드 상인 이자크 골드베르그가 총에 맞아 죽은 채로 발견된다. 발견 장소는 동생과 같이 살고 있던 카를 안데르센 집의 차고에 있던 차량 안이다. 그런데 시체가 타고 있던 차는 안데르센의 차가 아닌 근처에 사는 보험업자의 차였고, 안데르센의 차는 보험업자 집의 차고에 있던 것이다. 이런 탓에 유력 용의자 추정하고 체포된 안데르센에 대한 혐의가 확실하지 않아 매그레는 골머리를 썩는데...

뭔가 간단해 보이면서도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묘하게 보인다. 있는 그대로만 본다면 시체는 원래 그대로 있는데, 차량의 위치만 바뀐 것이다. 다른 가정을 한다면 시체가 원래 있던 위치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 수도 있는데, 굳이 차량을 바꿔치기 해야 할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문제가 생긴다. 사건 장소가 민가가 극도로 적은 한적한 시골의 교차로 지점이라 사건 관계자로 추정된 인물이 한정적인데도 이렇다는 것이다. 게다가 작은 사건으로 보이던 것이 갑자기 큰 사건으로 번져서 점점 더 이게 무슨 사건인지 감을 못 잡게 한다.

한편의 스릴러를 연상케 하는 느낌이 강하다. 엄청난 추격전이나 액션 같은 건 아니지만,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를 긴장감과 돌발적인 총격 장면이 자주 나와서 그렇다. 평소에 알던 매그레 반장이 나오는 작품 스타일과 조금 다르게 보여 낯설기도 하면서, 색다른 묘사들이 강렬하게 눈길을 확 끌어 흥미롭게 한다. 제목처럼 많이 나오는 밤 중의 교차로를 보여주는 장면에서 말이다. 이 어둠 속을 가르거나 점차 밝히는 다양한 빛에 대한 묘사가 다양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차량 불빛, 손전등 불빛, 담뱃불, 야간 조명 같은 인공적인 불빛에서는 초조함과 긴박감이 나타나고. 지평선 너머로 올라오는 새벽의 햇빛 같은 자연의 불빛은 긴장을 완화 시켜 안정감을 나타냄과 동시에 모든 게 끝난 뒤에 팍 나타나는 클라이맥스 효과 같기도 하다. 여기에 시골 풍경에서 들려오는 다양한 소음들까지 더해지며 외진 교외의 시골 교차로가 가진 두 가지 모습을 인상적이게 보여준다.

이렇게 마치 영화 같은 느낌이면서 평소의 드라마 부분은 여전히 안타까운 사연을 보여준다. 겉으로 보면 섞일 수 없는 두 사람이 만나 발생한 비극이지만, 한편으로는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나 올곧은 순정이라 발생한 희극 같기도 하다. 온갖 음모와 암투가 판치는 가운데서 그 순정은 참으로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이용해 먹을 검은 손길이 계속 덮치는데도 그 어떤 흠집 없이 한결 같으니. 되려 이 순정 때문에 엄청난 범죄가 마구 꼬여서 촌극 같이 보였을 정도라 말 다했다. 매사에 진심이고, 숨김 없이 사실을 털어 놓고도 의도를 의심 받고. 온갖 위협에 시달리고도 일편단심이기에 이 드라마 역시 양면이 돼버린다. 당사자에게는 누가 뭐라 해도 본인만 좋다면 상관 없을 희극. 타인이 보기에는 왜 저렇게 까지 하는지 이해가 안 돼서 그저 딱하게 보이는 비극.

이 희극과 비극이 동시에 공존하는 드라마를 보며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 다는 걸 다시 보게 된다. 제 아무리 지극정성을 다하는 순정이라 해도 손에 익은 버릇을 고칠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예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분명 나쁜 사람은 아닌데, 싫어지게 되는 애증으로 이어졌으니 말이다. 이게 나쁜 것인지 좋은 것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누가 뭐라 해도 어쨌든 이걸 받아들이는 당사자의 마음에 달린 문제라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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