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령사 오백나한의 미소 앞에서 - 김치호 한국미술 에세이
김치호 지음 / 한길아트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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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한 마디로 소개하자면 한국 고미술품 덕후의 영업 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고미술의 아름다움에 푹 빠진 김치호 작가는 미술에 대한 책을 여러 권 펴냈다. 이 책에서는 크게 미술시장과 컬렉션’, 그리고 고미술품 관람두 가지를 영업한다. 미술관 팜플렛 같은 고요한 표지와는 달리 첫 장부터 냉혹한 미술시장에 대한 정보가 쏟아져 나와서 당황했지만 미술 시장이라는 생소한 세계의 생태가 흥미롭게 느껴졌다. 미술품은 다른 투자재와는 달리 투자의 가치가 있음과 동시에 감상하고 즐길 수도 있다는 차별점을 가지고 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 세계도 한 번 발 들이면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지독한 매력이 있는 세계인 것 같다. 작가가 경제학을 전공해서 그런지 경제학적으로 미술시장을 분석한 것도 보통의 미술책들과 달리 신선하게 다가왔다.

 후반부로 가면 우리나라 미술의 역사와 함께 도자, 불상, 불화, 조각보, 반닫이, 소반 등 다양한 미술품에 대한 정보와 감상이 쏟아진다. 글에서 느껴지는 열성은 이 사람 찐이군..’이라는 생각을 절로 들게 하며 읽는 사람까지 고미술에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어린 시절 다들 소풍으로 미술관과 박물관은 지겹게 가보았겠지만 미술품에 대한 뻔한 설명만 듣다 보면 이 흙덩이가 대체 왜 대단하고 아름답다는 건지 공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찐 덕후의 설명을 읽다 보니 이 도자기가 왜 대단하고 아름다운지 느껴짐은 물론 옛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이것을 만들었을지까지 헤아려볼 수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영업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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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의 거짓된 삶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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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소녀는 자라 어른이 된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정신보다는 먼저 몸이 어른이 된다. 아직 속에는 여린 아이가 들어 있지만 세상은 더 이상 소녀를 아이로 대하지 않고 여자로 대한다.

어른들의 거짓된 삶의 주인공인 조반나 또한 그런 과정을 겪는다. 나폴리 지식인층의 부모 아래에서 사랑받으며 자란 외동딸 조반나는 13살 어느 날 우연히 자기 아버지에게 충격적인 한 마디의 말을 들은 후 평화로워 보이는 세상 뒤의 역겨움을 보기 시작한다. 가슴이 커지기 시작하며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이웃집 아저씨는 은근히 몸을 훑고, 학교의 남자아이들은 추파를 던진다. 자상하게만 보였던 아버지는 사실 비겁한 인간이었으며 남자와의 관계는 전해 듣던 것처럼 낭만적이지 않다. 조반나는 위대한 남성 사상가들이 쉬는 동안 가지고 노는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애완동물보다는 더 나은 존재이고 싶었’(p.447)으나 강인하고 현명하게만 보였던 주변 여성들이 사랑에 목을 매고 말라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혼란스럽기만 하다. 아이는 자라 여자의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나의 유년시절은 끝났다.’(p.168)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제목이 말해주듯 조반나가 바라보는 어른들의 삶이란 위선에 가득 차 있다. 소설을 읽으며 처음에는 위선적 세계를 거부하며 차라리 어른이 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겁내지 않고 어른의 세계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조반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가 어른의 세계로 들어가는 여정에서 한 첫 번째 행동은 싫은 것을 참아내는 일이었다. 그 순간 그 무엇도 자신이 어른이 되는 것을 막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스쳐가는 장면이었지만 싫은 것을 참지 않아도 되는 것이야말로 아이들의 특권이라는 점에서 조반나가 어른이 되었다는 걸 가장 잘 보여준 것 같다. 참고로 이 장면에서 조반나는 꽤나 큰 굴욕감을 느낀다. 그 감정이 공감돼서 싫었다.

이 소설에서는 이성 간의 사랑동성 간의 사랑이 서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전자는 주로  육체적인 관계와 폭력성, 불안 등의 이미지로 그려지고 후자는 우정과 좀 더 정서적인 교감의 모습을 띤다. 이는 마치 어른들의 세계아이들의 세계의 간극을 보여주는듯하다. 두 세계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던 조반나는 소설의 후반부에서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어른이 되기로결심하며 앞으로의 성장을 암시한다. 엘레나 피란테가 또 다른 시리즈의 문을 연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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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게 뭐라고
장강명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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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좋아서가 아니라 재밌어서끝까지 붙들고 읽은 책이다. 뭐가 다르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분명히 다르다. 표지를 봐서는 가벼운 에세이처럼 보이지만 장강명 작가의 꽤나 묵직한 생각들이 담겨 있었다. 그는 팟캐스트를 진행하며 생겼던 일상생활의 에피소드를 들어 읽고 쓰는 행위에 대해서, ‘한국의 문학시장과 그 방향성에 대해서, 그리고 나아가 존재와 자아에 대해서까지 논한다. 평소 남들이 그다지 고민하지 않는 것까지 고민하는 투머치띵커인 나로서는 공감되는 생각도 많았고 정말 즐겁게 읽었다.

 독서 팟캐스트를 몇 번 들어본 사람이라면 요조와 장강명이 함께 진행했던 , 이게 뭐라고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두 진행자와 저자가 펼치는 만담이 재밌어서 나도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진행하는이 아니라 진행했던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시즌2를 마지막으로 장강명 작가는 , 이게 뭐라고를 떠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 이제 뭐라고는 시즌3부터 시대의 흐름에 따라 유튜브 컨텐츠 중심으로 그 방향을 전환할 것이라고 한다.

 장강명은 끊임없이 말하는 자신쓰는 자신사이에서 갈등한다. 점점 읽고 쓰는 사람은 줄어들고 세상은 쓰는 장강명보다 말하는 장강명을 요구한다. 훨씬 더 돈벌이가 되는 것도 그쪽이다. 나또한 새로운 사람과 만나 말하고 듣는 것보다는 읽고 쓰는 쪽이 훨씬 편안하기에 장강명 작가의 이런 고민에 깊이 공감했다. 세상은 자꾸 유튜브를 하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뒤쳐진다고 하는데. 나는 그러고 싶지가 않다. 장강명 작가는 이러한 변화를 호흡에 비유하며 깨달음을 얻은 어류가 되기보다 서툴게 걸으며 공기를 직접 들이마시는 양서류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시대가 변해도 자극적이고 다이나믹한 영상매체보다 길고 복잡한 언어로 이루어진 글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있을 것이다. 독서 팟캐스트인 , 이게 뭐라고가 유튜브 위주로 형식을 개편한다는 글을 읽었을 때는 정말로 씁쓸했다. 공존이라는 말이 어색한 시대이지만, 그래도 공존할 수는 없는 걸까? 혹시 이런 변화에 씁쓸함을 느끼는 나는 시대에 뒤떨어져 도태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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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는 세계에 속한 사람으로서 나는 다소 고립된 기분을 맛보기도 한다. 나는 둘 중에 고르라면 어떤 사람을 그가 쓰는 글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찾아 읽어도 그를 직접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그다지 하지 않는다.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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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하드보일드한 세계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용서라든가 사랑이라든가 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를 똑바로 보겠다는, 어둠을 직면하겠다는 의지다.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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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를 묻고 따지는 것은 나의 고약한 버릇이고, 읽고 쓰는 세계 거주자들의 운명인 것 같다. 그것은 힘이고 은총이며 고통이자 저주다. 나는 이게 어느 정도 죽음이나 소멸과 관련이 있는 문제가 아닐까 추측한다. 중력을 버티기 위해 골조를 세우는 것처럼 시간을 버티고 싶어 의미를 구하는 것 아닐까.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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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고 듣는 세계에서 돈을 버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자기 자신이라는 한 인간, 한 인격을 판매해야 하는 것 같다. 강연, 방송, 영업, 상담, 정치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은 기술자나 연구자와는 다른 삶을 산다. () 간혹 강연이나 방송 출연을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땀을 흘린 대가가 아니라 나를 판 대가로 돈을 번 게 아닐까 의심에 빠진다. 사람을 만나면 에너지를 잃는다.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더 그렇다.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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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실 우리 시대의 문학과 예술이 논평가의 업무라도 제대로 해내는지 의문이다. 눈물 흘리거나 비명 지르는 걸 논평이라고 부른다면 모를까. 지금 문학이 과학기술에 대해서만 무력한 것도 아니다. 가령 선물 시장이나 투자은행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는 문인이 몇 명이나 될까? 금융시장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 현대자본주의의 탐욕을 지적할 때 그 목소리에 과연 얼마나 힘이 실릴까?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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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열대 한길그레이트북스 31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음, 박옥줄 옮김 / 한길사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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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2020년 여름 방 안에서 1930년대 브라질 원주민의 모습을 이리 생생하게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경의를 표한다. 과거에는 책이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는데, 지금은 손가락만 까딱하면 양질의 도서를 바로 읽어볼 수 있고, 세계 각지의 사람들과 생각도 나눌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특히나 요즘 같은 코로나 시대에는 집에 읽을 수 있는 책이 가득하다는 사실이 더욱 감사하게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논란이 되는 도서정가제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나도 서점에서 책 몇 권을 집어 들었을 때 10만원을 겉돌면 쉽게 어우 비싸하고 말하지만 사실은 알고 있다. 책 안에 들어간 내용과 그 책을 만들어내기 위한 노고, 그리고 알리고 판매하는 사람들의 시간을 생각하면 결코 비싼 가격이 아니라는 것을. 책을 사랑하고 책 파는 공간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책의 가치가 너무 가볍게 여겨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슬픈 열대>는 인류학자인 레비 스트로스가 1930년대에 브라질에서 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원주민을 연구하던 때를 회상하며 1950년대에 집필한 책이다. 800페이지에 육박하는 두꺼운 책이며 이것을 보고서라고 해야 할지, 일기장이라고 해야 할지 분류하기가 모호하지만 딱딱한 학술 보고서라고 하기에는 서정적인 문장들도 더러 있고 대중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책의 전반부에서는 원래 철학을 전공하던 자신이 인류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 브라질로 향하는 여로에 대해 세세하게 말하고 후반부부터 본격적으로 브라질에 거주하는 원주민의 삶에 대해 풀어간다. 모험을 하며 애벌레를 먹기도 하고, 더러운 물은 예사로 먹는 등 레비 스트로스가 갖은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학문에 대한 그의 열정이 참 대단하구나 싶었다. 또한 (책의 분량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속내와 풍경의 모습을 굉장히 자세하게 서술해놓은 걸 보면 마치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읽는 듯한 느낌도 받을 수 있었다.

레비 스트로스는 문화 구조주의를 주장한다. 구조주의란 언어학, 정신분석학, 미학 등 폭넓은 학문을 포괄하는데 레비 스트로스가 말하는 인류학에서의 문화 구조주의란 쉽게 말하자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대립하는 두 개의 요소로 세상을 보는 이항대립적특성을 가지며, 모든 문화 속에는 이러한 이항대립적 요소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현재 서구인들의 사회처럼 진보적이며, 발명과 업적을 중요시하는 사회를 과열된 혹은 동적 사회’ (hot or mabile society)라고 부르며, 종합의 재능과 인간적 교환의 가능성이 반복적으로 지속되는 사회를 냉강된 혹은 정적 사회’ (cold or static society)라고 불렀다.(p.86) 즉 그는 문명화된 사회를 무조건 우월한 사회라고 보지 않았으며 미개해 보이는 원주민들의 삶 속에도 그들만의 합리성이 있음을 인정했다. 동시에 문명화라는 이름 아래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착취하는 서구인들의 행태를 비판하였다.

레비 스트로스는 인간과 자연 사이에 어떤 균형과 조화가 유지될 수 있었던 시점’(p.87), ‘인간이 자기 세계와 호흡을 같이하던 시대의 영상, 즉 자유의 행사와 자유의 표상 사이에 적절한 관계가 존재하던 시대의 영상’(p.311)을 동경하며 그리워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에게 현대 사회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조직적인 가치 박탈이 만연한세계이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 균형’, ‘조화’, ‘적절등의 단어가 사라진지가 얼마나 오래인가. 모든 것이 과잉 혹은 결핍되어 있는 세상에서 레비 스트로스가 보여주는 브라질 원주민들의 삶은 미개하다기보다는 그 자체로 충만하고 오히려 이상적으로 보인다. 실제로 레비 스트로스는 남비콰라족이 황야에서 야영을 하는 것을 보고 서글픔보다는 인간적인 애정의 가장 감동적이며 가장 진실된 표현 같은 무엇을 느꼈다고 한다. 레비 스트로스가 브라질을 탐방하던 1930년대 당시에도 많은 원주민들이 토벌되고 사라진 상태였다고 한다. 100여년이 더 흐른 지금은 그들의 터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인간은 문명의 발전과 함께 모든 것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쉽게 확신하지만 나는 자꾸만 그런 것에 회의가 든다. 많은 사람들이 적절한 질의 삶을 누리지 못하는 시대에 수명만 자꾸만 연장되는 것이 과연 자랑스러운 일인지, 홍수 때 물도 흡수하지 못하는 평평한 아스팔트가 울퉁불퉁한 미포장의 그것보다 나은지, 무자비하게 동물을 살상하는 현대인들이 브라질의 원주민보다 덜 미개하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지. 식량이 모자라는 시기에도 가축 몫의 먹이는 꼭 남겨주고, 이동할 때는 원숭이를 머리에 지고 양팔에 애완동물들을 안고 간다는 남비콰라족의 모습을 보고 숙연한 마음이 들 뿐이다. 문명이 가장 먼저 발생한 곳은 동양의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황허 등이지만 전쟁과 식민지 개척 등으로 현재 힘들 갖고 있는 건 서양인들이다. 세계사를 보다 보면 문명이라는 것은 사실 잔혹성과 파렴치를 가장 많이 가진 자들의 불명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문명으로 인해 인간이 많은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무조건적인 선으로 여겨지는 것은 위험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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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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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사악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대부분 한 번씩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에 대한 이론을 설명하기보다는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 전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생애를 따라가며 역사적 격변 앞에서 그가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아돌프 아이히만은 어떤 사람인가를 풀어낸다.

전범, 살인자 등의 단어를 들으면 어떤 악마적 인물을 떠올리기가 쉽지만 언론이 밝힌 그들의 실상은 우리네 평범한 이웃인 경우가 많다. 아이히만도 똑같았다. 좋지 않은 성적과 가정 형편으로 학교를 중퇴한 그는 실업을 걱정하는 평범한 노동자였고, 먹고 살기 위해 큰 고민 없이 나치당에 가입하게 된다.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고민이 없었다는 것’. 이러한 사유의 부재를 한나 아렌트는 순전한 무사유라고 표현한다. 나치당에서 일하게 된 아이히만은 조직의 최종해결책을 이루기 위해 상사의 명령을 따르며 성실히 일한다. 최종 해결책은 유대인 학살을 뜻했지만, 그에게는 그저 일,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성과일 뿐이었다. 나치당은 절대 학살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쓰지 않았다고 한다. 학살은 최종 해결책’, ‘재정착등의 단어로 대체하여 사용되었는데, 이는 일을 수행하는 인력들의 죄책감을 덜어주었다. 또한 학살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끔찍한 일을 맡아서 수행하다니, 가엾은 나.’라며 자기 자신을 연민함으로써 죄책감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은 죄책감을 회피하려는 인간의 자기합리화가 얼마나 구역질나는지 보여준다. 아이히만도 사람인지라 유대인 억압정책이 학살로 이어지기 시작했을 때 강한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성과가 명예로 이어지자 그 죄책감은 1년 만에 씻은 듯 사라졌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행위가 타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본질적으로 그 행위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깊이 사유하지 않았다. 그러한 사유의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의 무사유가 모여 한 민족에 대한 홀로코스트라는 끔찍한 결과로 이어졌고, 아이히만은 결국 예루살렘에서 교수형에 처한다.

이쯤 되면 평범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성을 느낀다. 평범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평범과 악의 연관성을 느끼기 어려울 수 있지만, 아이히만과 나치의 모습이 보여주듯 평범한 사람들의 무사유가 모이면 참혹한 악이 된다. 예를 들어 현대 사회에 깊게, 그리고 넓게 존재하는 차별. 혹은 기후변화 등은 어떠한 악독한 한 민족, 국가가 만들어낸 현상이 아닌 평범한 우리 개인들의 무사유가 모여 만들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쉽게 책임을 회피한다. 어떠한 차별적인 사건을 접했을 때, 혹은 기후변화로 인해 피해를 입었을 때, 그에 대한 책임이 가장 커 보이는 다른 사람을 찾아 비난하고 스스로의 책임을 회피함으로써 마음에 안정을 찾는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책임이 없으니까.’ 한나 아렌트가 이 책을 통해서 말하고자 한 바는 무엇일까. ‘생각하자는 것이 아닐까. 얼핏 보기에 평화롭게만 보이는 자유주의, 중도, 무지, 무관심 등의 태도는 어떠한 문제에 있어서는 결국 악에 동조하는 것과 똑같은 결과를 낳는다.

끊임없이 마주해야 한다. 분명히 그 과정이 고통스러울지라도. 나의 사유가 결여된 사소한 행동 하나가 어떠한 결과를 낳는지,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고 느껴야 한다. 그러면 아마 현대인들의 삶은 매순간이 지옥일 것이다.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게도 인간이란 이성적인척하지만 지구상에서 가장 잔혹한 종족이고, 존재자체가 지구의 다른 생명들에게 민폐인 욕심쟁이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지만 나또한 사람이기 때문에 마주보기외면하기사이에서 매순간 갈등한다. 자주 책을 통해 참혹한 현실을 마주하지만, 계속 마주하고만 있으면 너무 고통스럽기에 어떤 순간에는 고개를 돌려 현실을 외면한다. 사유하지 않고 그저 화면 속 즐거운 영상들만 보고 있으면 평화롭고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런 순간이면 문득 내 자신이 너무 비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신경 끄기의 기술이라는 책에 당신이 선택한 고통이 당신을 만든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인간이 고통 속에서만 살아가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겠지만 고통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삶, 그것은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지구를 공유하고 살아가는 존재들은 누구나 자신 몫의 고통을 지닌다. 내가 사유하지 않고 고통을 외면하는 순간, 누군가는 내 몫의 고통을 대신 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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