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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의 거짓된 삶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20년 9월
평점 :
품절
모든 소녀는 자라 어른이 된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정신보다는 먼저 몸이 어른이 된다. 아직 속에는 여린 아이가 들어 있지만 세상은 더 이상 소녀를 아이로 대하지 않고 여자로 대한다.
‘어른들의 거짓된 삶’의 주인공인 조반나 또한 그런 과정을 겪는다. 나폴리 지식인층의 부모 아래에서 사랑받으며 자란 외동딸 조반나는 13살 어느 날 우연히 자기 아버지에게 충격적인 한 마디의 말을 들은 후 평화로워 보이는 세상 뒤의 역겨움을 보기 시작한다. 가슴이 커지기 시작하며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이웃집 아저씨는 은근히 몸을 훑고, 학교의 남자아이들은 추파를 던진다. 자상하게만 보였던 아버지는 사실 비겁한 인간이었으며 남자와의 관계는 전해 듣던 것처럼 낭만적이지 않다. 조반나는 ‘위대한 남성 사상가들이 쉬는 동안 가지고 노는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애완동물보다는 더 나은 존재이고 싶었’(p.447)으나 강인하고 현명하게만 보였던 주변 여성들이 사랑에 목을 매고 말라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혼란스럽기만 하다. 아이는 자라 ‘여자’의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나의 유년시절은 끝났다.’(p.168)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제목이 말해주듯 조반나가 바라보는 어른들의 삶이란 위선에 가득 차 있다. 소설을 읽으며 처음에는 위선적 세계를 거부하며 차라리 어른이 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겁내지 않고 어른의 세계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조반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가 어른의 세계로 들어가는 여정에서 한 첫 번째 행동은 싫은 것을 참아내는 일이었다. 그 순간 그 무엇도 자신이 어른이 되는 것을 막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스쳐가는 장면이었지만 싫은 것을 참지 않아도 되는 것이야말로 아이들의 특권이라는 점에서 조반나가 어른이 되었다는 걸 가장 잘 보여준 것 같다. 참고로 이 장면에서 조반나는 꽤나 큰 굴욕감을 느낀다. 그 감정이 공감돼서 싫었다.
이 소설에서는 ‘이성 간의 사랑’과 ‘동성 간의 사랑’이 서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전자는 주로 육체적인 관계와 폭력성, 불안 등의 이미지로 그려지고 후자는 우정과 좀 더 정서적인 교감의 모습을 띤다. 이는 마치 ‘어른들의 세계’와 ‘아이들의 세계’의 간극을 보여주는듯하다. 두 세계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던 조반나는 소설의 후반부에서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어른이 되기로’ 결심하며 앞으로의 성장을 암시한다. 엘레나 피란테가 또 다른 시리즈의 문을 연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