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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열대 ㅣ 한길그레이트북스 31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음, 박옥줄 옮김 / 한길사 / 1998년 6월
평점 :
우선, 2020년 여름 방 안에서 1930년대 브라질 원주민의 모습을 이리 생생하게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경의를 표한다. 과거에는 책이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는데, 지금은 손가락만 까딱하면 양질의 도서를 바로 읽어볼 수 있고, 세계 각지의 사람들과 생각도 나눌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특히나 요즘 같은 코로나 시대에는 집에 읽을 수 있는 책이 가득하다는 사실이 더욱 감사하게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논란이 되는 도서정가제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나도 서점에서 책 몇 권을 집어 들었을 때 10만원을 겉돌면 쉽게 ‘어우 비싸’ 하고 말하지만 사실은 알고 있다. 책 안에 들어간 내용과 그 책을 만들어내기 위한 노고, 그리고 알리고 판매하는 사람들의 시간을 생각하면 결코 비싼 가격이 아니라는 것을. 책을 사랑하고 책 파는 공간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책의 가치가 너무 가볍게 여겨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슬픈 열대>는 인류학자인 레비 스트로스가 1930년대에 브라질에서 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원주민을 연구하던 때를 회상하며 1950년대에 집필한 책이다. 800페이지에 육박하는 두꺼운 책이며 이것을 보고서라고 해야 할지, 일기장이라고 해야 할지 분류하기가 모호하지만 딱딱한 학술 보고서라고 하기에는 서정적인 문장들도 더러 있고 대중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책의 전반부에서는 원래 철학을 전공하던 자신이 인류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 브라질로 향하는 여로에 대해 세세하게 말하고 후반부부터 본격적으로 브라질에 거주하는 원주민의 삶에 대해 풀어간다. 모험을 하며 애벌레를 먹기도 하고, 더러운 물은 예사로 먹는 등 레비 스트로스가 갖은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학문에 대한 그의 열정이 참 대단하구나 싶었다. 또한 (책의 분량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속내와 풍경의 모습을 굉장히 자세하게 서술해놓은 걸 보면 마치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읽는 듯한 느낌도 받을 수 있었다.
레비 스트로스는 문화 구조주의를 주장한다. 구조주의란 언어학, 정신분석학, 미학 등 폭넓은 학문을 포괄하는데 레비 스트로스가 말하는 인류학에서의 문화 구조주의란 쉽게 말하자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대립하는 두 개의 요소로 세상을 보는 ‘이항대립적’ 특성을 가지며, 모든 문화 속에는 이러한 이항대립적 요소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현재 서구인들의 사회처럼 진보적이며, 발명과 업적을 중요시하는 사회를 ‘과열된 혹은 동적 사회’ (hot or mabile society)라고 부르며, 종합의 재능과 인간적 교환의 가능성이 반복적으로 지속되는 사회를 ‘냉강된 혹은 정적 사회’ (cold or static society)라고 불렀다.(p.86) 즉 그는 문명화된 사회를 무조건 우월한 사회라고 보지 않았으며 미개해 보이는 원주민들의 삶 속에도 그들만의 합리성이 있음을 인정했다. 동시에 문명화라는 이름 아래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착취하는 서구인들의 행태를 비판하였다.
레비 스트로스는 ‘인간과 자연 사이에 어떤 균형과 조화가 유지될 수 있었던 시점’(p.87), ‘인간이 자기 세계와 호흡을 같이하던 시대의 영상, 즉 자유의 행사와 자유의 표상 사이에 적절한 관계가 존재하던 시대의 영상’(p.311)을 동경하며 그리워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에게 현대 사회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조직적인 가치 박탈이 만연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 ‘균형’, ‘조화’, ‘적절’ 등의 단어가 사라진지가 얼마나 오래인가. 모든 것이 과잉 혹은 결핍되어 있는 세상에서 레비 스트로스가 보여주는 브라질 원주민들의 삶은 미개하다기보다는 그 자체로 충만하고 오히려 이상적으로 보인다. 실제로 레비 스트로스는 남비콰라족이 황야에서 야영을 하는 것을 보고 서글픔보다는 ‘인간적인 애정의 가장 감동적이며 가장 진실된 표현 같은 무엇’을 느꼈다고 한다. 레비 스트로스가 브라질을 탐방하던 1930년대 당시에도 많은 원주민들이 토벌되고 사라진 상태였다고 한다. 100여년이 더 흐른 지금은 그들의 터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인간은 문명의 발전과 함께 모든 것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쉽게 확신하지만 나는 자꾸만 그런 것에 회의가 든다. 많은 사람들이 적절한 질의 삶을 누리지 못하는 시대에 수명만 자꾸만 연장되는 것이 과연 자랑스러운 일인지, 홍수 때 물도 흡수하지 못하는 평평한 아스팔트가 울퉁불퉁한 미포장의 그것보다 나은지, 무자비하게 동물을 살상하는 현대인들이 브라질의 원주민보다 덜 ‘미개’하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지. 식량이 모자라는 시기에도 가축 몫의 먹이는 꼭 남겨주고, 이동할 때는 원숭이를 머리에 지고 양팔에 애완동물들을 안고 간다는 남비콰라족의 모습을 보고 숙연한 마음이 들 뿐이다. 문명이 가장 먼저 발생한 곳은 동양의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황허 등이지만 전쟁과 식민지 개척 등으로 현재 힘들 갖고 있는 건 서양인들이다. 세계사를 보다 보면 문명이라는 것은 사실 잔혹성과 파렴치를 가장 많이 가진 자들의 불명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문명으로 인해 인간이 많은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무조건적인 선으로 여겨지는 것은 위험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