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탄생 -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이 전하는 ‘안다는 것’의 세계
사이먼 윈체스터 지음, 신동숙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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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플북으로 읽었던 ‘지식의 탄생’을 풀 버전으로 읽었다. 이 책 자체가 하나의 ‘지식의 탄생’을 보여주고 있어서 꽤 두꺼운 책임에도 즐겁게 그 여정을 함께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저자의 스토리텔링 실력에 감탄했는데, 프롤로그부터 시작해서 6장까지, 각 파트별 연결성이 탁월해서 각 장을 읽을 때마다 도대체 다음 장으로 어떻게 연결될까 궁금해 하며 읽는 재미가 있었다.


 샘플북으로 일부 읽었던 1장과 2장에 이어 3장에서는 지식이 어떻게 전달되어 왔는지 그 변천사를 짚어본다. 문자가 발명되고, 파피루스나 점토판, 양피지에 기록되던 지식은 중국에서 종이가 발명되고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보편화의 기틀을 닦게 된다. 양피지에 비해 만들기 쉽고, 점토판에 비해 가벼웠던 종이는 기록하는 행위의 부담을 크게 낮춰주었고, 이는 더 많은 지식이 생산됨을 의미했다. 여기에 15세기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활판인쇄술과 종이의 결합은 저자의 말대로 ‘지식의 민주화’를 의미했다.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책의 가격은 낮아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책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이어서 신문까지 등장하면서 지식은 점점 더 보편화되었다.

이에 더해 해저케이블 등 통신망이 발전되면서 전보를 통해 원거리로 지식이 전달될 수 있게 되었고, 사진과 영상이 새로운 지식의 매개체로 등장하였다. 활자를 벗어나 이제 이미지로도 사람들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고, 이는 방송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렇게 정보 전달이 쉬워지고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이 등장함과 동시에, 지금까지도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가 등장했다. 바로 왜곡과 가짜뉴스 말이다.


 4장에서는 정보 조작의 역사에 대해서 살펴본다. 특히 저자는 정치적 목적에 의한 언론 조작 및 통제의 사례를 제시한다. 영국, 중국, 미국 등 각 국에서 과거와 현재에 두루 있었던 정보 조작 사례를 읽고 있자면 낯설지가 않아서 묘한 기분이 든다. 국내외 정치에 영향을 미치고, 전쟁도 야기하고, 사람들의 생각과 일상까지 바꾸는 사례들을 보면서 조작된 정보의 위력을 느낄 수 있었다. 유튜브 등 SNS의 발달로 더더욱 횡행하는 정보 조작의 홍수에서 우리는 어떻게 진짜 정보를 찾을 수 있을까.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우리가 더이상 지적 노동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5장에서는 생각이 필요없는 시대에 이르게 된 기술의 발전사를 다룬다. 기술은 인간의 노동을 덜어주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실제로 과거에 수작업으로 하던 많은 일들이 기계의 힘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제는 인공’지능’이 사람의 지능을 능가하면서 예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많은 일들을 수행하고 있다. 저자는 기술의 발전과 반비례하여 지식의 가치가 사라지고 있다고 평한다. 이제는 인간이 직접 수많은 정보를 외우고, 지식을 탐구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럼 인간의 지적 능력은 이제 어디에 써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든다.


 이에 대해 저자는 6장에서 여러 위인들을 보여준다. 버트런드 러셀, 리처드 파인만 등 익숙한 인물도 있지만, 심괄, 제임스 빌, 하리나스 데 등 처음 들어보는 인물들도 많이 있어서 흥미롭게 읽은 부분이다. 이어서 저자는 현명함, 지혜에 대해 탐구한다. 지식에서 한 차원 더 들어간 이 개념들은 원자폭탄의 사례에서 지식과의 관계나 그 의미가 명확하게 와닿는다.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기술은 지식이지만, 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는 지혜의 영역인 것이다. 우리가 지식을 추구하는 이유는 보다 잘 살기 위해서이다. 잘 사는 것이 무엇인가, 여기에 지식의 본질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서 지금은 지식의 위기가 아니라 희망이 될 수도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제 우리는 단순 정보 습득을 위한 지적 노동은 기술에 맡기고,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지식의 본질에 대한 탐구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지식의 탄생, 이 책의 제목에 걸맞는 결론이다. 우리 모두 각자의 지식을 찾아 나설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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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이끄는 곳으로
백희성 지음 / 북로망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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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의 힘을 느낀 것은 7년 전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갔을 때였다. 별 기대없이 마주한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난생 처음 느끼는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성경의 내용을 조각해 놓은 외벽도 감동적이었지만, 내부에 입장했을 때는 그야말로 말을 잃었다. 누군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가우디가 무엇을 이 성당 내부에 구현하고 싶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햇빛은 무교인 내게 성스러움이 무엇인지 알려주었고, 시시각각 변하는 빛에 취해서 몇 시간이고 성당에 앉아있었던 기억이 난다. 건축물과 공간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짧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빛이 이끄는 곳으로’에 등장하는 건축물도 실존한다면 꼭 한 번 가보고 싶다. 글로도 잘 묘사가 되어 있지만 실제로 보고 경험하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특히 4월 15일에 왈처요양병원에서 펼쳐지는 빛의 향연은 글로만 보기에는 너무나 아까웠다. 건축가이기도 한 작가가 책에 등장하는 공간을 머리에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세밀하게 묘사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이 공간을 보고 싶다는 갈망이 더 크게 느껴졌다.


 건축물과 공간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 소설에서도 건축물이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그 안에 머물렀던 사람들이 펼친 드라마가 결국 핵심이다. 프랑스와 왈처가 왈처요양병원고 시테 섬에 남긴 집에 숨긴 비밀을 푸는 것은 어째서 이 공간은 이렇게 지어졌는지와 깊은 연관이 있고, 이는 이 공간에서 살던 사람들이 남긴 흔적과 그들의 이야기를 알아야만 제대로 풀 수 있는 문제이다.


 시테 섬의 집이 품은 세심하고 다정한 건축가 프랑스와와 가족을 잃고 삶의 의지마저 상실한 아나톨의 이야기는 집 곳곳에서 드러난다. 뤼미에르가 처음에 이상하게 생각했던 계단 난간이나 바닥, 벽에 남은 손자국 등. 누군가에게는 그저 낡아버린 흔적이고 지우면 그만이지만, 그 의미를 아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간직하고 싶은 추억이다.


 뤼미에르가 시테 섬의 집을 원래대로 복원해 프랑스와와 아나톨, 피터의 과거를 되살리고, 진실을 알게 된 피터가 시테 섬의 집에서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장면은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한편, 과연 집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떠올리게 했다. 내 집 마련을 외치면서 집을 자산으로만 생각하고, 어차피 내 집도 아닌데 꾸며서 뭐해 라는 생각으로 지금 내가 머무르는 공간에는 소홀하지 않았던가. 만약 이 집에 나의 흔적이 남는다면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이번 주말은 집에서 햇빛을 바라보며 집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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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쓸모
로랑스 드빌레르 지음, 박효은 옮김 / FIKA(피카)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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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이라고 하면 형이상학적이고 난해하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고등학생 때 윤리 시간에는 항상 딴 생각하기 일쑤였고, 대학생 때 호기롭게 수강 신청했던 철학 강의는 철학은 나와 안 맞는다는 생각만 더 확고하게 굳힐 뿐이었다. 하지만 언젠가 철학과 가까워지고 싶다는 소망을 계속 품고 있었으니, 내게 철학의 쓸모는 부끄럽게도 지적 허영심의 충족이었다. 철학을 어렵게만 여기다 보니, 나는 이만큼 어려운 내용을 다 알아! 라며 어딘가에서 으스대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책, ‘철학의 쓸모’는 철학의 새로운 쓸모를 내게 일깨워 주었다. 전작을 통해 바다에서 찾아낸 삶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줬던 저자는 이번에는 우리가 삶에서 겪는 갖가지 고통들에 대해 철학적 처방전을 써준다. 육체적 고통, 영혼의 고통, 사회적 고통 그리고 그외의 흥미로운 고통을 진단하고, 철학자의 말을 통한 치료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철학자의 치료법이라니 굉장히 어려울 것 같지만 저자는 우리와 같은 눈높이에 서서 철학자들의 말을 전하기 때문에 편안하고 쉽게 읽을 수 있다. 고통에 대해 낙관하거나 미화하지 말고 하소연하라거나, 열심히 일만 하다 본인을 잃어버리지 말고 불성실한 노동자가 되는 게 낫다는 부분에서는 이게 내가 알던 철학이 맞나 싶을 정도이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나오는 이 책이 부담스럽지 않은 이유는 책에서 다루는 고통들은 우리가 모두 한번쯤 겪어봤을 고민들이기 때문이다. 죽음, 질병, 노화, 공포, 사랑, 우울, 돈, 직장생활 등 우리 일상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주제들이다. 저자가 나열한 고통의 목록을 보고 있으면 삶이란 감당하는 것이며 고통 없는 삶은 없다는 저자의 말이 와닿는다. 이렇게 고통의 밭인 만만치 않은 삶을 살아나가는데 있어 철학은 고통을 헤치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내주는 역할을 한다. 물론 철학이 내주는 길이 다 내 맘에 들지는 않을 수 있다. 하나의 주제에 대한 여러 가지 사유가 있는 만큼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철학의 길을 찾아 나만의 지도를 만드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직장 생활에 대한 부분을 인상깊게 읽었다. 직장인으로서 마르크스처럼 극단적인 해결책은 가능하지 않지만, 일이나 회사라는 조직에 잡아먹히지 않고 나 스스로를 지키는 법이 무엇인가, 이를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는 기회가 되었다. 현실적으로 파스칼의 말처럼 무릎은 굽히되 정신은 굽히지 말라는, 일종의 정신승리가 가장 실천 가능성이 높지만, 이마저도 진심으로 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멀게만 느껴지던 철학이 우리 삶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다는 당연하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새삼스레 깨달았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왜 철학에 삶의 지혜가 담겼다고 하는지 이해가 간다. 어릴 때는 지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서 철학을 가까이 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내 삶을 단단하게 꾸려가기 위해 철학을 가까이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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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 니블렛의 신냉전 - 힘의 대이동, 미국이 전부는 아니다
로빈 니블렛 지음, 조민호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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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생 때 사회 교과서에서 보던 세계화라는 말이 이제는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로 지금의 국제사회는 서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 세계 각 국에서 온 원자재가 세계 각 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손에서 가공되어 최종 소비자인 내게 도달한다. 글로벌 대기업들은 앞다투어 자신들의 가치사슬을 세계로 확대해 나가고, 아무리 대단한 기업이어도 혼자서는 제품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은 이 세계가 얼마나 상호의존적인지 보여준다.


 그런데 이 상호의존성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G2라고 불리는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부터다. 한 쪽에서는 수출제재를 가하면 다른 쪽에서는 보복관세를 물린다. 무역뿐만 아니라 안보 문제에 있어서도 두 나라의 관계가 삐걱거린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제1의 강대국이었던 미국과 세계의 공장이라 불리며 전 세계 제조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중국 사이에서 다른 나라들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바야흐로 신냉전의 시대인 것이다.


 사실 뉴스를 조금만 관심있게 보는 사람이라면 미국과 중국 사이의 갈등이 수 년 전부터 있었고, 우리나라 또한 그 영향권에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로빈 니블렛은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던 미중 갈등이 어떻게 촉발되고, 전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그야말로 ‘지구적’ 시각에서 보여준다. 신냉전을 미국과 중국의 관점에서만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대서양과 태평양 국가들과 아프리카, 남미 등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의 이해관계와 그들의 대응 전략까지 살펴보면서 지금의 세계 정세를 적확하게 풀어낸다.


 개인적으로 신냉전에 대한 미국과 중국의 반응이 흥미로웠다. 미국은 과거 냉전에서 자유민주주의의 대표로서 동맹국의 수호자로 나섰지만, 지금의 미국은 동맹국을 앞세워 자국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챙기려는 모습이 두드러진다. 반면 중국은 미국의 견제를 활용해 내부를 결집시키고 정권을 유지하고 있으며, 자유민주주의의 허점을 공격하고 있다. 이를 이데올로기적으로 분석한 파트도 경제, 안보 논리가 우선일 거라 생각했던 국제정세의 근저에는 여전히 이데올로기가 주효하다는 점을 깨닫게 해주었다.


 책 표지에도 나와 있듯이 한국은 ‘미국이 지은 집에서 중국이 지은 밥’을 먹고 있다.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끈끈하게 유지해야 하지만, 가까이 있는 국가이자 제1의 수출국인 중국과의 관계도 완전히 저버릴 수는 없다. 어느 한 쪽으로 기울 수는 있지만 과거 냉전 시기처럼 어느 하나만 선택할 수는 없다는 의미이다. 저자는 마지막에 신냉전 시대의 생존규칙 5가지를 제시한다. 한국 혼자서 이 규칙을 지킨다고 해서 신냉전이 해소될리도 없고, 또 단독으로 규칙을 행할 수도 없지만 최소한 현재의 국제정세에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힌트는 될 수 있다고 본다.


 신냉전은 이미 현재진행형인 상태에서 오는 11월의 미국 대선은 또 하나의 분기점이 될 것이다. 이 신냉전은 어떻게 진행되고, 그 끝은 어떨 것인지. 개인의 입장에서는 어쨌든 파국만은 오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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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은 쉽다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6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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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중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의 대부분은 이미 과거의 일로, 당연히 현장이 보존되어 있지도 않고, 아무런 증거도 남아있지 않다. 의지할 데는 마을 사람들의 증언뿐인데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도 사고사라는 생각에 힘이 실린다. 루크가 만난 노부인의 증언을 제외하면 일련의 사망사건들이 진짜 살인사건인지 자체가 모호한 상황.


 그렇다 보니 이 작품은 작중인물들과 그들의 관계를 집요하게 파고 든다. 루크는 컬트문화에 관한 책을 쓴다는 핑계로 이 마을에 내려오는데, 외지인인 그는 마을에 녹아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마을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대화를 나눈다. 마을 사람들 중에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도 있지만 어딘가 수상쩍은 사람들도 있고, 여기에 미신적인 요소들이 가미되면서 점점 분위기는 기묘해진다. 여기에 루크와 브리짓의 관계도 묘해지면서 평화로운 마을에 긴장감이 감돈다.


 이 긴장감은 위필드 경의 운전기사가 사망하면서 고조된다. 과거에 머물러 있던 살인이 현재로 끌어 당겨지는 순간이다. 이 기사는 사망 직전 위필드 경과 다투었던 상황. 루크는 자신과 마찰이 있던 사람들이 죄다 죽었다며, 천벌을 받은 것이라고 자랑스레 말하는 위필드 경의 말을 듣고 그동안 자신의 추측이 다 틀렸음을 깨달으면서 긴장감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하지만 이때 우리의 예측을 빗나가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스토리텔링 실력이 빛을 발한다. 위필드 경이 바로 범인일 것 같던 그 순간 크리스티는 진짜 범인의 정체를 드러낸다. 그럴듯해 보이는 트릭을 한 번 더 꼬아서 위필드 경을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데 여기서 이 작품의 제목인 ‘살인은 쉽다’라는 말도 이해가 간다. 정확히 말하면, ‘살인범으로 들키지 않기 쉽다’겠지만.


 이 작품에 대한 평가 중 ‘푸아로라면 가능하지 않은 소설’이라는 평을 보았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간다. 이 무작위적인 살인의 동기가 심리적 요소에 있는 만큼, 푸아로라면 그 회색 뇌세포를 가지고 범인의 심리를 파악해서 한번 꼬인 트릭을 금방 알아냈을 것이다. 다만, 루크와 브리짓의 캐릭터가 다소 평면적이고, 그간의 크리스티 작품에 많이 보인 커플 유형이라 다소 식상해서 아쉽다. 오히려 속물적인 위필드 경이나 범인의 캐릭터가 더 흥미로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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