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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쓸모
로랑스 드빌레르 지음, 박효은 옮김 / FIKA(피카) / 2024년 8월
평점 :
철학이라고 하면 형이상학적이고 난해하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고등학생 때 윤리 시간에는 항상 딴 생각하기 일쑤였고, 대학생 때 호기롭게 수강 신청했던 철학 강의는 철학은 나와 안 맞는다는 생각만 더 확고하게 굳힐 뿐이었다. 하지만 언젠가 철학과 가까워지고 싶다는 소망을 계속 품고 있었으니, 내게 철학의 쓸모는 부끄럽게도 지적 허영심의 충족이었다. 철학을 어렵게만 여기다 보니, 나는 이만큼 어려운 내용을 다 알아! 라며 어딘가에서 으스대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책, ‘철학의 쓸모’는 철학의 새로운 쓸모를 내게 일깨워 주었다. 전작을 통해 바다에서 찾아낸 삶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줬던 저자는 이번에는 우리가 삶에서 겪는 갖가지 고통들에 대해 철학적 처방전을 써준다. 육체적 고통, 영혼의 고통, 사회적 고통 그리고 그외의 흥미로운 고통을 진단하고, 철학자의 말을 통한 치료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철학자의 치료법이라니 굉장히 어려울 것 같지만 저자는 우리와 같은 눈높이에 서서 철학자들의 말을 전하기 때문에 편안하고 쉽게 읽을 수 있다. 고통에 대해 낙관하거나 미화하지 말고 하소연하라거나, 열심히 일만 하다 본인을 잃어버리지 말고 불성실한 노동자가 되는 게 낫다는 부분에서는 이게 내가 알던 철학이 맞나 싶을 정도이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나오는 이 책이 부담스럽지 않은 이유는 책에서 다루는 고통들은 우리가 모두 한번쯤 겪어봤을 고민들이기 때문이다. 죽음, 질병, 노화, 공포, 사랑, 우울, 돈, 직장생활 등 우리 일상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주제들이다. 저자가 나열한 고통의 목록을 보고 있으면 삶이란 감당하는 것이며 고통 없는 삶은 없다는 저자의 말이 와닿는다. 이렇게 고통의 밭인 만만치 않은 삶을 살아나가는데 있어 철학은 고통을 헤치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내주는 역할을 한다. 물론 철학이 내주는 길이 다 내 맘에 들지는 않을 수 있다. 하나의 주제에 대한 여러 가지 사유가 있는 만큼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철학의 길을 찾아 나만의 지도를 만드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직장 생활에 대한 부분을 인상깊게 읽었다. 직장인으로서 마르크스처럼 극단적인 해결책은 가능하지 않지만, 일이나 회사라는 조직에 잡아먹히지 않고 나 스스로를 지키는 법이 무엇인가, 이를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는 기회가 되었다. 현실적으로 파스칼의 말처럼 무릎은 굽히되 정신은 굽히지 말라는, 일종의 정신승리가 가장 실천 가능성이 높지만, 이마저도 진심으로 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멀게만 느껴지던 철학이 우리 삶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다는 당연하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새삼스레 깨달았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왜 철학에 삶의 지혜가 담겼다고 하는지 이해가 간다. 어릴 때는 지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서 철학을 가까이 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내 삶을 단단하게 꾸려가기 위해 철학을 가까이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