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 조금씩 비틀려 있는 사람들을 통해 보는 인간 본성의 면면들. 작품 내내 부정적인 의미였던 ‘카라마조프‘가 마지막 장면에서 긍정적인 의미로 탈바꿈하는 것은 그럼에도 인간에게 희망이 있다는 작가의 메시지일까?
" ... 모든 선택에는 후회가 따르기 마련인데 애초에 그 후회를 할 필요가 없어. 아무도 답을 모르거든." - P283
이미 내가 던진 야구공에는 미련을 둘 필요가 없다.다음에 던질 공에 집중하면 된다.지금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현재에 실패한 것이지 미래에까지 실패한 것은 아니다. 내 인생 전체가 실패한 것도 아니다. - P289
다시 생각해보면 젊을 때 즐기라는 말이 흥청망청 돈 쓰고, 음주가무를 하라는 뜻이 아니고, 진심으로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 에너지와 돈을 쓰라는 뜻일 수도 있다. - P282
"송 과장, 나는 회사를 내 비즈니스 파트너라고 생각해.""무슨 말이야?""사장이든 회장이든 우리를 월급 루팡으로 볼 수도 있고,충실한 직원으로 볼 수도 있고, 하나의 부품으로 볼 수도있고, 그저 비용으로 볼 수도 있는데 우리는 그런 거 생각하지 말자고,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필요 없어. 그냥 우리 재능과 노동력을 그 사람들한테 파는 거야. 팔고 돈을 받는 거야. 장사하듯이. 비즈니스 파트너처럼." - P320
"늦었다고 해서 살던 대로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 합리화할 거리를 만들지도 않았으면 좋겠고, 선택하는 것에 대가와 책임이 따르고, 선택하지 않는 것에도 대가와 책임이있어. 가만히 있는 것도 가만히 있기로 본인이 선택한 것의 결과거든." - P334
예를 들면 성냥갑 라벨, 우유병 뚜껑, 책갈피, 전단, 화장지 등의 포장지같은 장기보존을 염두에 두지 않고 만들어진, 이른바 쓰고 버리는 인쇄물 종류를 ‘프린티드 에페메라‘라고 한다. 에페메라는 ‘단명한‘, ‘쓰고 버리는‘이라는 의미가 있어서 번역해보면 ‘하루살이 인쇄물‘. 오래전부터 있었던 인쇄용어다. ... "소비자는 포장지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벗겨내버리지요. 그런 점에 하루살이 인쇄물로서의 역할을 느낍니다." ... "화장지는 종이가 마지막으로 맞이하는 운명의 종점이라서, 즉 재생할 수 없다는 점에서 더 귀하게 느껴집니다."에페메라 컬렉터의 경지는 알 수 없지만 인간의 뒤처리를 맡아 종이로서의 마지막 생명을 다하는 화장지의 안타까움, 허무함은 이해가 된다. 포장지의 감촉 역시 얇고 팔랑팔랑한 재질이라 손에 쥐기도 허무하다. - P46
종이라는 게 어차피 시간이 지나고 빛을 쬐면 퇴색하게 마련. 변화하고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완성품이 아니다. - P54
몇 년 전뷰터 일부 작업자들 사이에서 활판인쇄는 꽤 열띠게 회자되었다. 그러나 와타나베 씨는 그 흐름이나 붐을 잘 알지 못한다. 흥미가 있느냐 없느냐 그런 속 편한 이야기가 아니고 그에게 있어서 활판인쇄는 가족을 부양하는 생계수단인 것이다. 주문한 인쇄물을 납품할 때, "일이 익숙지 않아 번져버렸습니다" 같은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그랬듯이 프로로서 완벽한 인쇄물을 납품하는 것이 최소한 해내야 하는 일이다. 그런 마음으로 정신없이 활판인쇄 기술을 연구했다."무조건 많이 경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잉크 배합도 여름과 겨울이 달라서 직접 수백 번을 만들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경험을 쌓는 수밖에 없지요." - P163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내가 직접 키운 닥나무로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연구를 반복하는 거지요. 유유자적한 생활은 절대로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그랬다면 더 깊은 산속에서 살고 있겠지요."모리타 씨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넘겼다. 닥나무는 쑥쑥 자라기 때문에 베어내고 껍질 벗기고, 말리는 등 해야 할 일이 많다. 한가로운 일상일 수 없다. 자연을 상대로 하는 작업은 일 년 내내 바쁘다."쑥쑥 자라는 닥나무를 보면 마음이 급해져요.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어요. 무럭무럭 자라는 닥나무에서 매일 힘을 얻고 있습니다." - P177
디지털을 눈엣가시로 여겨 폄하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디지털에는 흔적과 감촉이 없다. 만지고 느낄 수가 없다. 나는 종이에서 전해오는 감정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다. 그 감정은 시대의 흐름과 함께 흔들리고 변화한다. 그것을 숫자나 수요, 환경으로 분석하고 제품화하는 것이 분명 아오야나기 씨나 야마네 씨의 일일 것이다. 색깔이 있는 실을 넣어서 종이를 뜨는 ‘데마리‘처럼 개발에 5년씩 걸리는 종이도 있다. 장사니까 채산성을 도외시할 수는 없다. 5년이 걸려도 시장에서 살아남는 것은 국내뿐 아니라 세계에서 종이의 품질, 디자인 수준, 풍부한 품목이 주목을 받고 그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다케오에 가길 잘했다 싶은, 10년 전 방문 때와 똑같은 생각이 들었다.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프로덕트를, 참을 수 없이 종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개발하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P189
포장해서 선물하고받은 사람이 내용물을 꺼내면 그 역할은 끝난다.포장지는 잠깐 동안의 생명.그러나 그 덧없는 한순간에점포의 위신과 긍지, 시대의 향기와 고객을 생각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단지 맛있는 음식을 포장해왔을 뿐인 조역은주역인 음식 없이도 순수하고 아름답다. - P209
종이에는 감촉과 주름과 두께라는 물리적인 실감이 있다. 거기에 필적이나 잉크의 질감, 때로 눈물자국이라는 감상적인 느낌까지 포함하여 기억이나 시간의 퇴적이 시각화된다.나는 이 책을 통해 각각의 종이에 퇴적된 마음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누구에게나 소중한 종이가 있고, 아무렇지도 않은 종잇조각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감정과 추억을 엿볼 수도 있다.그것들을 ‘종이의 신‘이라고 부르고 싶어진 것은 순식간에 쓰고 삭제할 수 있는 디지털 도구와 구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종이에 담은 생각에 이름을 붙인다면 이거겠지 하고. - P246
" ... 종이나 활판인쇄에 끌리는 사람은 그릇이나 옷의 소재에 관심이 높고 나아가서는 생활양식에도 애착을 가진 사람과 교차가 되는구나 하고." - P18
이 밖에도 유노키 씨는 여행을 하면서 수집한 추억이 되는 종이류를 많이 갖고 있었다. 냅킨, 식탁매트, 커피설탕 봉투, 컵받침, 전단 등등. 이런 것들을 커다란 포켓파일에 한 장씩 넣어 두었다가 여행별로 파일을 만들어 보관한다."귀한 물건이라는 표현을 하기도 전이었습니다. 좀 더 생활에 가까운, 이런 종이를 좋아해요. 생활도구란 그런 것일 테니까요."여행지에서는 옛날 도구가게를 자주 들른다. 거기에 깃들어 있는 옛주인의 생활을 몸으로 느끼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 물건을 갖고 있던 사람을 상상하면 바로 그 사람이 귀하고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 P25
" ... 나는 여행에서 찍은 추억의 사진들을 뽑아서 일일이 앨범에 붙입니다. 거기서 비로소 여행이 끝나지요. 이런 건 이제 아무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 앨범이 자꾸 늘어나다 보니 최근에는 정리하는 데 애를 먹긴 합니다만."그 말을 하는 표정은 전혀 힘들어하는 기색이 아니라 괜히 웃음이 났다. 파리의 블랑제리 폴은 지금 신주쿠에도 진출해 있지만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는다. 예술의 거리 상제르망 드 프레에서 갓 구운 빵을 샀던 그날 파리의 하루는 이 봉투에만 담겨 있다. - P26
종이라는 표현수단을 갖는 것은 하나의 언어를 획득하는 것과 똑같이 자유롭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그 아름다움에 빠져 있다 보면 어느새 미나의 사상이 배어든다. - P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