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제 사놨는지 가물가물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몇 년 전 사서 보고는 책장에 꽂아놓은 것만 기억난다. 책에 대한 감상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그때는 지금보다 어려서 그랬는지 내 상태가 안 좋아서 그랬는지, 하여튼 별생각이 없었고 마지막 단편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만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있는 자들은 다 이렇게 오만한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최근 내 책장을 훑어보다가 문득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책장에서 빼내어 책상 위에 쌓아두었다. 책 첫 장을 펴고 읽기 시작한 작가의 말 '파괴와 거짓 희망, 모멸의 시대'부터 너무 마음에 들어 다 읽고 나서 필사까지 해두었다.
우리나라의 근로환경을 보면서 답답할 때가 많았다. 회사생활이라고는 이십 대 초반 2년간 해본 것이 다라 이제는 그때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이후로는 강사 생활을 했으니 회사라는 조직보다는 작고, 유연하고, 개인적인 환경에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나는 '위에서 시키면 무조건 다 해야 하는' 분위기가 잘 이해가 안 됐다. 그런가 보다 하면서도 왜 저렇게 밖에 하지 못할까, 답답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현재 어른이 된 세대(어른이라기보다는 '꼰대'라고 부르고 싶은)가 젊은 세대에게 '당연히' 따르기를 기대 혹은 강요하는 것들을 보면 어처구니없는 수준인 것이 많아 저 인간들은 도대체 왜 저 모양일까, 민주주의를 맞이했다고는 하나 일부 사람들의 피 터지는 노력을 통해 쟁취한 것이지, 그동안 나머지는 뭐 했나, 입 다물고 엎드려 있다가 달콤한 결과만 나눠 누린 비겁한 사람들 덕에 이 나라는 아직도 말로만 민주화를 실행하고 있지 않나, 하는 분노에 시달린 적도 있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다 보니 상식이 상식이 아니었던 세대를 답습하는 유물 같은 그들의 생각 체계가 뭔지 알 것도 같았다.
누구의 말대로 우리 부모 세대는 '무에서 유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다 누구의 공인가. 못 먹고 못 입고 못 자며 만들어낸 돈은 다 어디로 갔을까. 생리대 갈 시간도 주지 않아 다리에 시뻘겋게 흘려가며 일했다는 이들은 지금 얼마나 잘 살고 있나.
그리고 지금의 우리는 얼마나 인간다운 환경에서 일하고 있나. OECD 국가 중 제일 오래 일하는 우리들. 정당히 받아야 할 초과근무 수당도 당연히 누려야 할 육아 휴직이며 연차며 월차를 눈치 보며 써야 하는 대한민국 국민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그려낸 문제는 절대로 끝난 것이 아니다. 아직도 갈 길이 먼 우리의 이야기다.
책의 문장 하나하나가 나의 신경줄을 건드리는 것만 같아 읽는 것이 조금 힘들었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사실적인 문체가 슬픈 느낌이라면, 이 책은 사실적인 문체가 참담한 기분이 들게 한다.
삼성의 이재용 씨가 구속되었다. 이 책이 씌어질 당시에는 상상도 못 했을 일일 거다. 어쨌든 우리는 해내고 있다. 바로 지금 이때 우리가 읽어야 할 이야기가 바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아닐까 싶다.
16 사람들이 꼽추네 집을 무너뜨렸다. 쇠망치를 든 사나이들이 한쪽 벽을 부수고 뒤로 물러서자 북쪽 지붕이 거짓말처럼 내려앉았다. 그들은 더 이상 꼽추네 집에 손을 대지 않았고, 미루나무 옆 털여뀌풀 위에 앉아있던 꼽추는 일어서면서 하늘만 쳐다보았다.
36 이 세상엔 왜 이렇게 온전한 사람이 없을까?
100 "언제나 알아듣겠니? 아버니는 지치셔서 그런 거야."
131 나는 처음 약속대로 ‘안 돼요‘라는 말은 그에게 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에게 ‘안 돼요‘라고 말하지 못 했다.
189 "쫓겨났다니? 해고당했단 말야? 그들이 뭘 잘못했어?" "아니." "노조가 없었군. 그렇지?" "있어." "그런데 그런 부당 해고가 가능해? 노조 간부들은 뭘 하지?" "사용자를 위해서 일하지." "그게 무슨 노조야?" "그게 노조야."
210 오른쪽 어금니 1500원 왼쪽 어금니 1500원
나는 가계부를 덮었다. 어머니가 두 개의 어금니만 뽑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달에 삼천 원의 돈을 문화비로 지출할 뻔했다. - 가계부대로라면.
309 "오늘 죽어 살면서 내일 생각은 왜 했을까?" "목돈이 필요했으니까. 토끼 새끼들을 넣어 기를 토끼집이 필요했지."
310 앉은 뱅이는 보이지 않고 기어 오는 소리만 들렸다. 우물을 찾아 작은 두레박을 내렸다. 얼굴이 밤하늘을 향해 들려질 때까지 물을 마셔 빈 배를 채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