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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평점 :
아마, 이건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민담이 될거야.
성석제를 보며 자주 드는 생각이다. 아마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의 글들은 민담이 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그만큼 그의 이야기는 맛있다. 호랑이가 민가에 들어와 할머니를 위협하면 공포의 사건사고지만, 곶감에 혼쭐이 나 도망가는 호랑이는 무섭다기보다 새삼 귀여워지는 것처럼, 성석제는 맛난 곶감처럼 쫄깃하고 유쾌하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너무나도 부러운 재주가 있다.
위풍당당. 자연이 담은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봉래산 한 자락 어딘가에 드라마와 관광을 목적으로 지은 썩지도 않는 실리카겔 같은 마을로 여러 사연을 안은 채 강처럼 흘러온 사람들로 이루어진 한 가족과 더 끈끈한 식구가 되기 위해 이 시골까지 와서 빡세게 합숙을 하는 한 패밀리와의 만남이 그려지고 있다.
그냥 서로를 모른 채 뜨고 지는 해를 벗삼아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며 평화로이 살다 가면 좋으련만, 하필 이 궁벽한 시골에 어울리지 않는 아가씨의 본의 아닌 외출과 하필 먹고픈 음식의 재료는 직접 수확해야 한다기에 음식따위 포기하고 돌아오는 두목의 일견 기가막히도록 평범하고도 우연해보이는 조우로부터 이 소설은 꼬이기, 아니 풀리기 시작한다.
자연 그대로의 아가씨를 한번 즐겨보겠다던 폭력배들은 목표를 코 앞에 두고 의외의 일격을 받아 전립선 일대에 큰 부상을 입고, 그 와중에도 하필 주변에 자라는 대마를 잊지 않은 두목은 조직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신 사업 테마에 대한 정제된 욕심과 부하에 대한 날것 그대로의 복수심으로 마을을 정벌하러 떠난다. 근데 워~매. 멀지도 않아 보이던 마을은 도대체 가다가 힘 다 빼게 생겼고 그나마 복수 한번 질펀하게 질러보려다 더 질펀하고 생생한 천연 똥에, 꽉 차게 매운 고추에, 봉독세례에 온갖 자연의 매서운 맛을 다 보고나니 차라리 화투판에서 똥폭탄을 맞고 개털 되는 게 차라리 인생의 낙이지, 옷깃과 허우대로 세우던 가오는 이미 '멘붕'이다. 그런데 멘붕의 약이 또 똥이라니 이건 멘붕도 보통 멘붕이 아니다.
진짜 내 가족은 누구인가
그럼 이건 서로 만나서는 안될 깡패와 시골마을 사람들 이야기냐? 오호라 잘못된 만남이었냐?하는 반응이 있을지 모르겠다. 맞다, 어느 정도는. 하지만 가만 돌아보면 어설프게 연대하여 사는 사람들과 끈끈함으로 꽉꽉 다져진 듯한 한 패밀리 간의 복통나게 웃기는 갈등을 통해 과연 진짜 가족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꼬박꼬박 묻는다. 웃기는 와중에도.
어설퍼 보이는 연대를 하고 있는 여산, 이령, 소희 등을 위시한 마을사람들은 흘러들어온 사연이 너무나 구구절절하다. 화목해야 할 가정은 언제나 화목(火木)같았고, 그곳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들은 생각 한번 못해봤을 법의 바깥 영역을 선택하거나, 날선 편견과 욕설로 얼룩진, 그러면서도 합법의 탈을 쓴 권력과 자본에 쫓겨 아무것 하나 가진 것 없이 이 곳까지 흘러들어온다. 쉽게 말하면 전과자요, 성폭력 피해자요, 장애우요, 힘없는 늙은이들이다. 한번 벗어난 법의 영역안에 들어가기란 너무나 어려워 여전히 불법의 영역에서 삶을 이어간다. 그럼에도 말만 마을사람이지 대개 서로가 참 별로다. 완~젼.
반면에 이 깡패집단은 한 식구, 즉 한 집에서 끼니를 때우는 사람들, 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어찌나 끈끈하고 서로를 위하는지 '화목'이 이 식구들의 표어다. 그러니 힘깨나 쓰고 학교 좀 오래 다녔답시고 동생들을 때리다가는 합리적인 보스에게 한소리 듣고, 도태되지 않으려는 보스의 전략적 사고로 합법적 사업 포트폴리오고 짜여진다. 게다가 보스는 깔끔하기까지 하다. 남자는 그저 주먹이니 쓸데없이 연장을 휘두르지도 않는다. 그리고 가오도 있어서 쉽게 돈 버는 약쟁이들은 미치도록 혐오한다. 거기에다 운도 좋다. 이러면 이미 게임은 불공평해 보인다.
그러나, 이 힘깨나 쓰는 깡패들의 마을 난입과 예기치 않게 벌어진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두 그룹이 보이는 면면은 도대체 무엇이 가족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깡패들이 가진 의리란 사실 '일단 나부터 살고 보자' 이상의 것이 없다. 모두가 살기 위한 의리가 아니라 보스를 살리기 위한 의리일 뿐이다. 화목과 질서는 사실 모두의 치밀한 계산과 폭력의 용인 아래서만 유지된다. 그나마 연장을 사용하는 초보수준의 비겁함과 마약거래에 대해서는 단호히 혐오해오던 자기들끼리의 '사나이 다움', '가오'는 그저 마을을 무슨일이 있어도 접수하고 이기겠다는 생각아래 모두 다 허물어진다. 가오는 자본의 축적을 위해서라면 희생된지 오래라, 아니라는 핑계만 화려할 뿐 보스에게 대마는 끝까지 관심사항이고, 맨손으로 서있는 마을 사람과 결전을 벌이는 그의 손에는 횟칼이, 옷 안주머니에는 만일을 대비한 전기 충격기마저 들려있다. 그렇게 운좋게, 이기며, 살아온 그는 드디어 도태의 두려움을 제대로 직면한다. 권력과 자본으로부터의 거리감이 눈 앞에 다가온 이 순간. 그는 그 외에 모든 것을 다 버리는 최악의 방법을 택한다. 영원히 하나일 것을 외치던 끈끈하도록 화목하던 깡패집단은 커지는 위협앞에 와해되고 분열된다. 갈수록 깡패 집단은 없어지고 깡패 보스만 남는다. 그의 뜻에 따르지 않으면 죽을 뿐인 그런 화목함을 횟칼에 새겨둔. 남의 생으로 나의 생을 이어갈 뿐인 그 혼자만.
찾던 모든 것, 강 같은 평화를 만나게 될 때에, 비로소.
반면, 마을 사람들은 위기가 다가올수록 점점 변화하고 성장한다. 문제를 일으킨 아이들만 내보내면 된다는 두려움을, 도망가면 아무런 피해가 없으리라는 당연한 두려움을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신은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과 대답들을 통해 떨쳐낸다. 죽지도 썩지도 않는 이 인공의 마을에 생명과 평화를 심고 길러낸 애정이 너무나도 그리워서, 여기에서 살아가는 삶 자체가 너무 소중하기에, 내 옆의 사람이 소중하기에 이들은 위협이 다가올수록 오히려 강해진다. 그동안 권력과 경쟁, 자본에 치이고 뺏기며 분노로 파편화되던 이들이 한데 모여 강처럼 부드러우면서도 강해진다. 화목(火木)으로부터의 자유만으로도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던 이들이 이제는 무엇을 위한 자유가 필요한지 무엇을 향한 자유가 필요한지를 묻지 않아도 깨닫고 쓰지 않아도 이해한다. 바로, 운명을 벗어나 서로를 선택하는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가정이 탄생한다. 바로 이때가 내게는 소설의 제목과 내용이 이해되는 순간이다. 위.풍.당.당.
이토록 생명과 자유의 의미를, 소중함을 명백히 깨달은 이들에게 깡패집단은 더 이상의 적수가 될 수가 없다. 그 뿐이랴, 자연의 생명력을 끊어버리려는 기계군단의 등장과 접근도 그다지 두렵지 않다. 이제 "우리 가족이 가는 데는 어디나 우리 무대가" 될 테니까. 준비할 것도 별로 없다. 일단 고픈 배 부터 추리면 될 일이니까. 그래, "강같은 평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