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시선>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한낮의 시선
이승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그에게는 생의 이면이라는 전작이 있었다. 누군가를 의식하는 표정의 표지에서 그들의 '시선'은 참 인상적이었다. 한낮의 시선도 그렇다. 한 사람인 것 같지만 어쩌면 한 사람이 아닌 듯한 여러사람이 중첩된 듯한 뭉툭한 질감의 그림, 그리고 그 안에서 보는 거무튀튀한 시선. 그 둘의 시선이 어느정도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 심한 착각인걸까. 잘 모르겠다.  

   
 

불쑥 기숙사를 나왔지만, 갈 곳이 따로 있을 리 없었다. 반사적으로 고향을 떠올렸다.(중략) 감나무가 서 있는 뒤란으로 돌아가서 아버지를 보고 싶었다. 뒤란을 돌아가기만 하면 아버지가 아직 거기 있을 것만 같았다. 아버지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아직도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그의 출입이 금지된 땅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출입이 금지된 곳에 있었다. 금령을 내린 큰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 금령을 풀어 줄 사람이 없었다. 영원히 그의 출입이 허락되지 않은 금기의 땅, 감나무가 서 있는 뒤란-그곳이 고향이었다. 그는 영원히 고향에 가지 못할 것이었다.  

생의 이면 중,

 
 

 

고향에 갈 수 없었던 사람이(물론 박부길과 한낮의 시선의 그는 좀 다르다고는 해도), 드디어 고향에 간다. 고향은 태어난 곳만을 이르지는 않는다. 아버지가 있는 곳. 그곳이 고향이다. 금기를 풀어줄 사람이 없던, 그리고 스스로 행한 단절을 넘어서서 고향을 찾아간다. 아, '찾아간다'라니.. 이 때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가. 그의 나이 곧 서른은 어쩌면 고향을 찾아가기 위해 작가가 보낸 오랜 시간을 지칭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찾아가기에도 찾아가기 힘들었던 그 고통의 시간을 더하고 더해야 나올, 그 시간.

지옥에서 걸어나오던 오르페우스보다도 더 많이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보며 찾아간 고향에서 아버지는 사랑으로 감싸주는, 그가 바라던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아들을 향해 있지 않았다. 아들이 아버지의 일부가 되기에는 아버지의 말대로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그래, 아들은 아버지에게 접해지기만으로도 만족할 텐데, 오직 한 사람에게만 사랑받으면 좋을텐데, 막상 그 사랑의 대상은 아직 사랑을 원하는 자를 사랑하지 못한다. 그 뿐이랴, 아직 아버지의 집안에 발도 못붙이고 있다. 울타리 밖과 울타리 안에서 서로를 대면하는 아들과 아버지. 아들이 원하는 바는 그저 아버지가 아들을 들어 울타리 밖에서 울타리 안으로 들어올려주는 것인데. 아버지는 그 초월 대신 예사로운 그 표정 그대로 다시 울타리 안으로 들어갈 뿐이다. 만났을 때 그런 것처럼, 헤어지는 것도 예사롭게.  

 여전히 저자는 아직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는, 그러니까 그가 스스로 들어갈 수 없는 영역을 쉽사리 넘어가지 않고 있다. 아니 그보다는 그 근처에서 아직 서성인다는 게 좀 더 맞을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그가 가졌던 그 영역의 문제의식은 아직 진행형인 것 같다. (물론 그게 맞다고 생각하고) 울타리로 대변되는 영역과 그 영역의 초월 사이에서 그는 아직 고민중이고, 여전히 고통주고, 고통받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느껴지는 여유로움은 뭘까. 도대체 그 이전의 그 날카로움으로 아버지에게 고통을 가하던 그가 뭔가 달라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의 이면에서 고향대신 어둑한 하숙집으로 돌아가던 것처럼 자기가 존재로 존재하는 공간으로 여기는 천내의 숲으로 돌아가는, 여전히 별반 차이 없어 보이는 그가 생의 이면에서와 달라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게다가 한 단어로 치환시켜버리는 데에서 오는 약간의 허탈함은 감수하고서라도, 그리고 좀 유치하고 뻔한 이야기인지는 몰라도, 사랑받고자 하는 존재임을 차츰 더 인정한 건 아닐까. 그렇게 스스로 걸어놓은 금기를 푸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차츰 명징하게 알게 된 건 아닐까, 아니 그보다 사랑받고 싶은 대상을 확인했다고 하면 어떨까. 찾아간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초월이 아니었을까. 더 이상 어둑한 곳에서 울며 자기존재를 확인하지 않고, 하늘을 받치고 선 키 큰나무들과 투명한 햇빛이 큰 품이 되어 껴안는 가장 오래된 시간의 정적속에서도 존재할 수 있게 되었기에 그런걸까. 좀 더 과장하자면, 그에게 울타리는 더 이상 넘어가거나 서성대야 할 대상이 아니게 된 건 아닐까?

 어쨌건, 그게 울타리 밖이든 안이든 어디든, 그가 어디든 찾아갔다는 건, 그리고 어디에가도 있는 그 시선을 이젠 어느정도 담담히 받아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상당한 의미로 다가온다. (이건 또다른 착각이지만, 생의 이면에서 힘겹게 끊어낸 듯한 절절했던 감상은 한낮의 시선에서는 한결 여유롭게 느껴지기도 하고)  

 다만 혹여 기회가 된다면, 작가의 말에서 쓴 것 처럼, 미지의 큰 시선과 좀 편해졌다는 고백에 대해서는 한번 꼭 여쭤보고 싶다. 적어도 아직까지 많이 불편하고 조금 편한 나로서는 정말, 궁금하니까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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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5 01: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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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5 02: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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