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세상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피에르 르메트르의 [대단한 세상 Le Grand Monde]을 읽었다. 오랜만에 벽돌책을 읽었다. 800여쪽에 달하는 촘촘한 간격의 글씨를 읽느라 시간이 꽤나 걸렸지만 파리와 베이루트와 사이공을 오가는 네형제의 이야기에 지루함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역자 후기에서도 말하듯이 일흔이 넘은 나이에 이런 놀라운 대작을 연속적으로 써낸다는 것이 정말 놀랍기만 하다. [오르부아르], [화재의 색], [우리 슬픔의 거울]에 이르는 재앙의 아이들 3부작을 읽으면서도 대체 이 많은 이야기거리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구성할 수 있는 것인지 경탄을 금할 수 없었는데, 이번 작품을 시작으로 영광의 세월 4부작이 시작된거라고 하니, 두 번째 이야기가 벌써부터 기대된다. 


혹자들은 지금 제3차 세계대전이 발생된 것과 마찬가지의 혼돈의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며 진단하고 있듯이 세계 각지에서 발생된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냉전이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그 혼란의 소용돌이 우리나라도 포함되어 있기에 긴장된 촉각이 곤두서야겠지만 평화를 지켜나가기 위한 준비가 잘 되어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지난 3부작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제2차 세계대전까지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새로 시작된 4부작의 서막인 [대단한 세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8년에 일정 기간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던 레바논의 베이루트와 완전 공산화 되기 이전의 베트남의 사이공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네 형제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누군인지 밝혀지는 깜짝 놀란 반전이 있기에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전작들과의 유기적인 연관성을 이루며 동시대의 실존했던 인물들처럼 생동감을 배가시킨다. 네 형제의 부모인 루이 펠티에와 앙젤은 베이루트에서 비누 공장으로 크게 성공하여 부유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장, 프랑수아, 에티엔, 엘렌이라는 네 자녀가 있었는데, 이들은 각자의 꿈과 자유를 위해 부모의 품을 떠나 파리와 사이공으로 떠나게 된다. 


먼저 맏아들인 장은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기 위한 과정에서 여러차례의 실수를 반복하며 자신의 무능함을 드러내게 되었고, 그의 아내 준비에브는 장과는 다른 치밀함과 약삭빠름으로 남편을 옭아매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는 막무가내로 밀어부치는 불도저 스타일이었다. 장은 준비에브와 전혀 다르게 소심하고 무능력해보이지만,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익명의 누군가에게 억눌렀던 분노를 표출하며 연속된 묻지마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과도한 폭력이 자행된 일련의 살인 행각들이 운좋게 발각되지 않지만 마치 준비에브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장을 떠보기에 장은 초주검이 된 것처럼 아내에게 더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둘째 아들인 프랑수아는 장과는 다르게 바칼로레아를 합격해서 고등교사 자격을 얻을 수 있는 엘리트 코스로 나아갈 수 있는 명석함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기자가 되고 싶었기에 부모에게 거짓말을 하고 르 주르날이라는 신문사의 잡보로 취직하게 된다. 정식 기자로서 인정을 받기 위해 부단하게 애를 쓰지만 애송이 취급을 받던 프랑수아에게 절호의 찬스가 다가오게 되는데, 자신의 형과 형수를 억지로 만나기로 했던 영화관에서 벌어진 유명한 여배우의 살인 사건 현장을 두 눈으로 직접 목도하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프랑수아는 혼란에 빠진 관객과들과는 달리 재빠르게 여배우의 가방을 뒤져 그녀의 신분을 알게 되고 그녀에게 남겨진 의문의 메시지를 기억하여 편집장에게 알려 기자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신호탄을 쏘게 된다. 아마도 다음에 이어질 작품에서는 장의 잔인한 살인 행각이 밝혀지며 프랑수아는 극도의 충격을 받게 되지 않을까 싶다. 


셋째 아들인 에티엔은 어찌보면 이번 작품의 가장 중요한 핵심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해방 후 3년째인 1948년에 우리나라는 제주 4.3사건을 비롯한 미군정의 지배와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혼란스러움이 지속되는 시기였는데, 에티엔의 성적지향은 이미 부모와 형제들의 인정을 받을 정도로 동성애에 대한 열린 시각이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처음 표지를 통해 짐작할 수 있었던 에티엔의 연인에 대한 암시는 혹시 동성연인을 향한 에티엔의 사랑이 심각한 사회적 시선과의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내용이 아닐까 예상했었는데, 전혀 다른 내용이 펼쳐졌다. 에티엔은 벨기에 출신의 외인부대 군인으로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여한 레몽을 찾아 사이공으로 떠나게 된다. 사이공에 도착하여 외환국에서 일하게 된 에티엔은 레몽의 흔적을 찾는 것과 동시에 피아스트로 환전을 통해 부당한 이득을 얻는 거래의 문제점을 발견하게 된다. 사이공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그의 거주지를 알아봐주던 지엠을(나중에는 시에우 린이라는 신종파의 교황에 이르는 어이없는 상황이 펼쳐지지만) 도와주며 레몽의 죽음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지엠이 로안 교황이 되고 에티엔이 부정 거래의 전모를 밝히려 그의 하인이자 또 다른 연인이 된 빈을 통해 증거를 입수하게 되어 프랑수아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파리로 떠나려 하지만 고의의 사고가 의심되는 비행기 추락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다. 소설의 말미에 에티엔을 죽게 만든 이가 누구인지 엄마 앙젤과 여동생 엘렌이 사이공을 방문하며 아들의 흔적을 뒤쫓다 알게 되고, 전쟁이 지속 중이 혼란스러운 시대가 항상 그랬듯이 청부업자를 고용하여 아들의 죽음을 복수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막내 딸인 엘렌은 다른 형제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게 나오지만 아마도 이어지는 다음 편에서 좀 더 부분을 할애하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아직은 철부지인 엘렌은 부모의 품을 떠나 자유롭게 파리에서 자신의 꿈을 펼쳐보고 싶지만 결국 아버지의 청탁으로 전에 없던 기준을 부활시켜 청강생 자격으로 다니게 된 국립미술원에서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채 마약을 파는 이들과 어울리며 방황하게 된다. 엘렌의 방황은 형제들 중에 가장 가까웠던 에티엔이 사이공으로 떠나 의문의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녀가 에티엔과 주고받은 편지 덕분에 앙젤은 아들의 죽음이 단순한 비행기 사고가 아니라는 단서를 얻게 된다. 사이공에 도착한 앙젤과 엘렌이 외환국을 방문하여 장테 국장과 가스팔 이라는 음흉한 이를 만나는 장면에 대한 묘사에서 엘렌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대단한지, 젊은 여성이 성적 희롱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적절히 그려졌다. 


에티엔이 피아스트로 거래의 증거를 프랑수아에 넘겨 언론을 통해 부정 축재를 해온 아마도 고위층의 인물들을 저격하려 했지만, 너무나도 견고한 그들의 세계는 프랑수아와 다른 형제들을 모두 납치하여 루이와 앙젤의 숨겨진 충격적인 과거를 알려주며 만일 지금 멈추지 않는다면 그들의 삶이 모두 망가질 것이라는 협박을 받게 된다. 겁에 질린 형제들은 그들의 겁박에 물러나게 되고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자신의 부모님들이 과거에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베이루트에 정착하게 되었는지를 알게 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루이와 앙젤의 지혜롭고 솔직한 고백으로 형제들은 부모의 선택을 이해하게 되고 루이는 장과 프랑수아에게 파리에서의 삶을 응원하고 앙젤은 엘렌과 함께 사이공으로 떠나 에티엔의 유품을 가져오게 된다. 


네 형제를 둘러싼 많은 사건들이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다른 반전들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기대된다. 4부작의 시작이기에 다음 편에서는 네 형제 중 어떤 이의 이야기가 중심이 될까, 아마도 장의 살인사건과 프랑수아의 기사가 연관된 내용이 아닐까 예상해본다. 역자 후기에는 프랑스에서 4부작의 두번째 작품인 [침묵과 분노]가 출간되었다고 하는데, 하루 빨리 번역본이 나오기를 고대한다. 


"길이 잘 보이지 않거나 불확실하게 느껴질 때, 그녀에게 일탈은 논리적 귀결처럼 보였다. 모든 것에 의혹이 일고 ,자신이 갈망하는게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그녀의 해결책은 윤리적 문란이었다.(139)"


#피에르르메트르 #대단한세상 #LeGrandMonde #열린책들 #임호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