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동네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무라카미 하루키의 [코끼리 공장의 해피앤드]를 읽었다.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중의 하나로 [코끼리 공장의 해피앤드](1983)과 [랑게르한스섬의 오후](1986)을 한 권으로 묶은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예술적 동지인 안자이 미즈마루가 그림을 담당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인가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인지에서 하루키는 세상을 떠난 안자이 미즈마루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하루키의 에세이와 다른 작품에 걸맞는 그림을 턱턱 그려내는 미즈마루가 아마도 몹시 그리운 것 같았다. 책을 함께 만든 동지이자 하루키보다 나이는 많았지만 꽤나 잘맞는 친구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번 에세이집은 하루키가 30대 때에 쓰인 글인 만큼 뭔가 젊음의 열기가 느껴진다고 할까? 전혀 개연성이 없는 글들의 연속이지만 나름대로 작가로서의 자리를 확고히 잡아가는 하루키만의 개성과 자유로움이 엿보인다. 그리고 하루키가 미즈마루와 꽤나 오랜 시간 협업을 해왔기에 하루키의 글에 들어가는 일러스트는 미즈마루가 딱이라는 공식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는 동화책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한 페이지 걸러 일상적인 물건들이 나오는 일러스트가 있다. 그림책을 보는 듯한 감상에 빠졌다가 하루키만의 엉뚱한 상상에 큭 하고 웃음이 터지기도 한다. 

“정말로 내 마음에 든 것은 커피의 맛보다는 커피가 있는 풍경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한다. 내 앞에는 저 사춘기 특유의 반짝반짝 빛나는 거울이 있고, 거기에는 커피를 마시는 내 모습이 또렷하게 비쳤다. 그리고 등뒤에는 네모난 틀 속 조그만 풍경이 있었다. 커피는 어둠처럼 검고, 재즈의 선율처럼 따뜻했다. 내가 그 조그만 세계를 음미할 때, 풍경이 나를 축복했다. 때로 인생이란 커피 한 잔이 안겨주는 따스함의 문제, 라고 리처드 브로티건은 어느 작품에 썼다. 커피를 다룬 글 중에서 나는 이 문장이 제일 마음에 든다.(39)”

“그리고 또 추운 계절에 이불 속으로 파고들 때 반드시 세 번은 들락날락하는 습관이 있다. 우선 이불 안에 들어가 길게 누었다가는 잠시 생각한 후,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양 슬며시 밖으로 나간다. 이런 과정을 세 번 되풀이하고는 네번째에야 간신히 안심하고 잠드는 것이다. 이 일련의 의식에는 대충 십 분에서 십오 분 정도 시간이 소요된다. 어떻게 생각해봐도 순전히 시간 낭비다. 고양이도 성가실 테고, 나도 이제 잠이 들락 말락 하는 와중에 자꾸 고양이가 들락날락거리니까 울컥 화가 치민다. 세상에는 ‘삼고의 예’라는 게 있다지만, 고양이가 한밤중에 그런 의식을 치러야 할 필연성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때때로 어째서, 어떤 이유로, 어떤 과정으로 그런 버릇이 고양이의 머릿속에 생겨나게 되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본다. 고양이에게는 고양이 나름의 유아체험이 있고, 청춘기의 뜨거운 고뇌가 있고, 좌절이 있고, 갈등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런 과정을 거쳐 하나의 고양이로 정체성이 성립되어, 그녀는 겨울밤에 정확하게 세 번 이불 속을 들락날락하는 것일까? 
고양이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것이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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