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들판 - 침묵은 어떻게 역사를 드러내는가
마거릿 주혜 리 지음, 장상미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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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2세들의 기록을 읽다 보면 비슷한 흐름이 보인다.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자신의 뿌리인 한국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마침내 나라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점이다. 작가 마거릿 주혜 리의 삶도 이와 닮았다. 조금 다른 점은 부모님의 나라를 알아가는 것을 넘어, 그 뿌리에 자리한 할아버지의 삶을 깊이 파헤쳐야 했다는 점이다. 그의 할아버지 이철하는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였으며, 오랫동안 가족들이 침묵한 존재였다. 미국에서 자란 그는 한국사의 한복판을 관통했던 가족의 역사를 스스로 복원해야 하는 미션이었던 셈이다. 


독립운동가 할아버지는 자랑스러운 존재여야 마땅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현재 한국의 이념 체계와 정반대인 사회를 꿈꿨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광복과 6·25 전쟁, 이어진 독재 정권을 거치며 가족들에게 할아버지는 쉬쉬해야 하는 수치였다. 


그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는 친척들의 생생한 증언이 꼭 필요했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철하는 학생운동을 이끌다 퇴학당한 뒤 사회주의 사상에 빠져들었다. 할머니는 가족에서 소원했던 남편이 원망스러웠고, 아들을 지키기 위해 그의 서적과 증거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물어도 결코 들을 수 없던 비밀스러운 이야기는 기자로 일하는 손녀 마거릿이 취재를 시작하며 봉인이 풀리기 시작한다.


가족들의 이야기는 마치 구전설화처럼 쏟아지며 저자는 퍼즐을 맞추듯 진위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 작업에서 이민 가정의 장녀로서, 여전히 유교적 분위기가 짙은 가족 안에서 자신이 자라며 느낀 불편함의 뿌리를 발견하다. 항상 털어내고 싶던 아픈 손가락, 할아버지를 말할 수 있는 대상으로 끌어올린다. 이렇게 이야기는 현재 진행형으로 이어진다. 


결국 이철하는 독립운동자로 인정받아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고, 어둠 속에 묻혔던 기록들도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흩어져 살던 친척들이 새롭게 조성된 묘 앞에 묘여 찍은 사진을 보며, 오랫동안 가슴속에 삼켜온 깊은 한숨을 토해낼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온전한 안식처를 갖지 못했던 저자는 취재 이후 좋은 배우자를 만나 두 아이의 엄마가 된다. 한때 공허함을 느꼈던 그는 이제 없던 안식처를 직접 만들어 나간다. 자신이 느꼈던 혼란이 자녀에게 대물림될 수도 있겠지만,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 단단하게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엄마가 될 것이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할아버지를, 손녀인 자신이 어떻게 세상 밖으로 찾아냈는지 털어놓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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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신재민 지음 / 북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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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피드를 장악한 넷플릭스 드라마 <동궁>의 여파일까. 오컬트 장르와는 거리가 멀다 여겼는데 되려 새로운 취향을 발견했다. 신재민 작가의 소설 <생가> 역시 비슷한 결의 장르적 매력을 품고 있으면서도, 한국적 색채와 대를 이어가는 복수의 서사를 절묘하게 엮어내며 독보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야기는 이운암 전 대통령 생가 화재로부터 시작된다. 이운암의 손자 이건승이 처음 생가를 건축한 도편수 지범근의 아들 지재헌에게 복원을 의뢰하면서 사건의 막이 올라간다.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 어릴 적 생가 도면을 베끼다 분노를 사 절연했던 재헌. 독일에서 가정을 꾸렸으나 아내의 혼수상태와 불안정한 삶 속에서 거액의 돈과 명성을 위해 그는 건승의 손을 잡는다.


사건의 중심에는 한 시대를 호령했지만 뒷방 늙은이로 전락한 이운암이 있다. 생가 화재와 함께 의문의 죽음들이 이어지며 재헌은 이 복원이 단순한 고집이 아님을 직감한다. 어려서부터 터의 기운을 느끼던 그는 생가 지하 공간에서 방화범을 마주하며 이 공간에 비밀이 있단 걸 깨닫는다.


지범근은 생가를 복원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재헌은 반발심과 인정에 대한 갈증으로 오히려 그 위험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다. 작품은 이전 독재 정권의 그림자를 오마주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월남전의 잔혹한 처사와 그곳에서 마주한 험한 것이 인간의 시꺼먼 욕망과 결합해 거대한 발판이 되었다는 설정은 소설 전반에 서늘한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생가는 보란 듯이 더 깊은 심연을 개방했다. 대체 무엇이 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구멍 속에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재헌은 원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지하실로 내려오는 사이 늙어 버렸는지 아버지의 얼굴이 돼 있었다. 지범근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실망스럽습니까? 아니면 대견스럽습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이제 어른이 된 아들은 스스로의 길을 결정해야만 했다.

재헌은 공허 속으로 몸을 던졌다. 생가는 기꺼이 그를 삼켰다. (p. 291)


중반부까지 흩어져 있던 인물들과 꺼림칙한 의문들은 하나의 궤로 모이며 후에 거대한 뒤통수를 친다. 조력자 시록이 찾아 헤매던 아버지의 존재, 그리고 시록의 출생의 비밀이 이운암이라는 지독한 인물과 엮이는 과정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특히 단순한 재미를 넘어선 탄탄한 고증과 융합이 이 책의 미덕이다. 풍수지리와 민속신앙, 한국적 오컬트 요소들이 촘촘한 서사 속에 녹아들어 실제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전통 건축에 지식이 없음에도, 낯선 전문 용어들이 각 소제목과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구전설화처럼 자연스럽게 읽히는 점 역시 신선했다.


그림 그려지듯 머릿속에서 이미지가 재현되는 작가의 놀라운 묘사력은 자연스럽게 영상화를 기대하게 만든다. 휘몰아쳐 단숨에 읽어 내려가게 되는, 간만에 여름의 맛을 온전히 느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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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 - 최신개정판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북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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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보물을 찾아 피라미드로 떠나는 양치기 청년 '산티아고'의 여정을 그린 <연금술사>. '반드시 읽어야 할 책', '고전 반열에 오른 책' 같은 화려한 찬사 속에 오히려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수많은 이들에게 꾸준히 읽히는 책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어 책을 펼쳤다.


주인공 '산티아고'는 자아를 찾아헤매는 청년이다. 양치기라는 직업을 선택한 순간부터 내면의 물음표에 귀를 기울이던 그는 '피라미드에서 엄청난 보물을 손에 넣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된다. 말뿐인 예언을 믿고 떠난 여정에서 그는 모든 것을 잃고 빈털터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겪는 위기와 사랑, 기회의 순간들을 통해 점차 확신을 얻어 나간다.


"사람들은 삶의 이유를 무척 일찍 배우는 것 같아. 그래서 그토록 빨리 포기하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게 바로 세상이야." 노인이 씁쓸한 눈빛으로 말했다. (p. 59)


여전히 우리는 삶의 이유를 너무 일찍 배운다. 삶에 거창한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쉽게 시도를 멈추거나 아주 작은 실패도 무서워하면서. 산티아고의 여정은 그래서 특별하다. 교훈적이고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지만, 숱한 고난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서 자신의 보물을 향해 가는 일은 배울만하다. 애초에 길을 떠나지 않았으면 운명의 표지도, 기회도 그의 손에 쥐어지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미래를 추측할 수 있냐고? 현재의 표지들 덕분이지. 비밀은 바로 현재에 있다네. 현재에 주의를 기울이면 현재를 더 좋게 만들 수 있지. 현재가 좋아지면 그다음에 오는 날들도 좋아지는 거고. 그러니 미래는 잊고 율법이 가르치는 대로, 신께서 그분의 자녀들을 돌보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 속에 영겁의 세월이 깃들어 있다네." (p. 191~192)


사막을 건너는 동안 산티아고에게 타인의 인정은 더 이상 중요치 않았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안에서 찾아낸 그에게 허울뿐인 평가는 불필요했으니까. 결국 자아를 찾는 일은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된다. 바로 현재에 충실하라는 것.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은 잠시 내려놓아도 좋다. 모든 것을 잃고 크리스털 가게에서 일하며 다시 막대한 부를 거머쥐는 산티아고의 모습이 이를 증명한다. 가능성은 놓친 것이 아니다. 놓지 않은 사람만이 가능성을 얻게 된다. 좌절할지언정 무너지지 않은 채, 오늘을 살아가며 내일의 미래를 그려내는 것. 바로 이 시대의 산티아고들에게 <연금술사>가 건네는 다정한 응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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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우주 - 더 잘 머물고 싶어 유영하는 삶의 기록
정영한 지음 / 북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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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휴가 전과 후, 이 책을 찬찬히 읽었다. 용기가 없는 건데 돈이 없다는 핑계를 대며 안전지대를 벗어나지 못하던 20대 초중반의 나. 그때 나는 여행 에세이를 탐독하며 상상의 여행을 떠났다. 그런 나를 떠올리며 묻는다. 훌쩍 떠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지금이 그려지냐고.


이른 나이에 아나운서가 된 작가는 최연소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능력을 증명해야만 할 것 같은 부담감 속에서 매일을 보낸다. 자연스레 계획 없이 훌쩍 떠나던 20대의 자유를 갈망하며 휴가를 내고 다시 여행길에 오른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떠난 30대의 그는 달라진 시선에서 이전의 여행을 반추한다. 너그러웠던 어린 나와 경계심으로 세모눈을 뜨는 현재의 나. 경계에 서 있는 같은 또래로서 그의 감정에 깊이 공감했다.


이방인의 시선으로 나를 돌아보기 위해서,

나아가고 있는 방향 키를 조정하기 위해서,

흘러가는 젊음을 여행의 장면으로 조금이나마 묶어 두기 위해서. (p. 28)


간만에 여행자의 해방감이 묻어나는 문장을 읽으니, 흘러가는 생각을 붙잡아 둔 지 오래됐다는 걸 자각했다. 붙잡고 흘려보내는 것이 소중하던 날이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생각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 편안한데 왠지 갇혀 있는 기분. 나는 그걸 바로잡으려 늦은 여행을 시작한 것 같다. 


내가 가보지 못한 나라들(그가 2군으로 점찍어둔 지역)을 다니는 이야기를 보면서 특정 시기만이 주는 힘이 와닿았다. 초록의 반짝임, 안락한 숙소와 탁 트인 풍경 앞에서 가만한 시간을 갖는 것. 매년 달라지는 체력을 느끼며 이 순간이 영원하지 않겠구나 체감한다.


오직 ‘나’만 신경 써도 누가 뭐라지 않는 유일한 시기가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 아닐까. 그리고 이 시기에는 선택권도 늘어난다. 신체적 컨디션도 최상이고, 연애를 비롯해 사람들을 사귀기에도 좋으며, 가치관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된다. (p. 192)


그의 감상을 손으로 짚어가며, 체크박스 안에 열망을 가득 채우던 어린 내가 자주 소환됐다. 지난 시간에 머무르는 이유는 이 또한 과거가 되고, 계획은 자주 나를 배신한다는 명징한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마냥 소용없지는 않다는 모순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보는 데에 초점을 두기보다 내면으로 가라앉기 위해 떠나는 여행. 여행 앞에 ‘살아보는’이란 수식어가 중요하게 다가오는 건, 잠시 숨을 고르라는 뜻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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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비인 - 성해나 기담집
성해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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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왜 보나,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


배우 박정민의 한 마디로 신드롬을 일으킨 성해나 작가가 <혼모노>에 이어 강렬한 기담집으로 돌아왔다. 기담이란 장르가 다소 생소한데다 새로움에 대한 두려움을 방지턱처럼 깔고 시작하는 독자인 나는 사실 엄청난 기대를 하진 않았다. 낯설다는 것은 호불호를 가르는 중요한 영역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웬걸. 앉은 자리에서 후루룩 다 읽었다. 보통 소설집과 달리 단편마다 작가 본인이 풀어놓는 작품에 대한 해설이 수록되어 작품 특유의 기묘하고 서늘한 기운을 중화시켜 주었다.


소설은 9개의 단편이 3개의 부로 구성되어 있다. '어제', '오늘', '내일'이란 직관적인 시간 흐름 아래 친일파와 그 후손,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 AI와 로봇 등 기술 발달로 도래할 SF적 미래를 그린다. '인간이지만 인간 같지도 않은 이들의 욕망과 불안'을 괴이한데 그럴듯한, 흡인력 있는 전개로 독자를 휩쓸고 간다.


인간 아닌 인간. 그것은 인간의 형상을 한 괴수나 AI일 수도 있고 귀신 혹은 신일 수도 있지만, 인간 그 자체일 수도 있을 것이다. (P. 51)


표제작이기도 한 <인비인>은 일제가 조선인을 대상으로 감행한 생체실험에서 탄생한 괴이한 생명체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사람이 아닌 것', 또는 '사람이어야 하지만 사람이 아니길 원하는 것'이라는 숨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조만간 닥쳐올 위기와 불안을 생생하게 그려내서일까. 궁지에 몰린 인간이라면 당장을 모면하고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겠구나, 떨떠름한 수긍을 하게 된다.


결핍은 늘 다른 조건을 달고 돌아온다. 인생에서 내보낸 줄 알았던 불청객이 나도 모르는 새 문 앞에 서 있듯이 말이다. 허상으로 채워지는 건 결국 결핍이 아닌 더 단단해진 불안 아닐까. (p. 137)


연달아 상영된 짧은 영화를 보고 나온 느낌이다. 친일의 잔재인 핏자국이 묻은 책상과 대대손손 간직해 온 가보, 윤회를 위한 사이비적 모임, 모든 것을 가졌으나 결핍이 있는 보통의 삶을 돈으로 구매하는 사람들. 인간의 일그러진 욕망이 섬뜩하다. 나아가 나의 지난 프롬프트를 백과사전처럼 꿰고 있는 기계가 나의 프라이버시를 역이용해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려 무서운 협박을 해올 것만 같다.


점점 익숙해지는 편리함이 파국을 향한 지름길의 급행열차는 아닐까. 결국 우리가 가진 인간성이란 무엇일까. 시대의 흐름에 맹목적으로 올라타는 것 말고, 타인과 다른 나의 차별점을 용케 찾아내는 것 말고, 순수하게 본연적으로 우리가 가진 것들 말이다. 사소한 불편함조차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기심과 만행이 인비인의 시작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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