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메리 스튜어트』를 알게 되었을 때, 기존 출판사에서 나온 책은 이미 오래 전 품절되었다.
판매량이 많지 않은 책들은 품절 이후 몇 배의 가격표가 붙는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로 48000원이라는 고가에 판매되고 있었다. 
낡은 중고책을 이 가격에 산다는 건 내 성미로는 용납할 수 없어 구입을 포기하고 잊어버렸다.
그러다가 오늘 알라딘 신간 목록에서 이 책을 봤을 때 기쁜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심리 묘사에 탁월한 츠바이크는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심리적 해석을 덧붙인 평전을 여러 권 집필했다.
나는 그중 『조제프 푸셰』,『발자크 평전』 등을 읽어봤는데 웬만한 소설보다도 깊이 몰입하여 읽었다.
특히 『발자크 평전』은 발자크 본인의 소설들보다도 츠바이크가 그려낸 그의 인생이 더욱 드라마틱한 소설처럼 느껴졌다. 
여기에 더해 역사적으로도 흥미로운 시대와 인물들을 다루니 나의 기대감이 큰 것은 당연한 일이며, 
신간 소식을 접했을 때 느꼈던 기쁨 역시 큰 것이다.  

이 책의 배경이 되는 16세기의 영국 왕실은 정치적 암투가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같은 시대에 살았던 두 여왕, 스코틀랜드의 메리 스튜어트와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을 왕위 계승권 다툼 속에서 보냈다.
결국 엘리자베스의 명령으로 메리는 처형되었다. 
이러한 혼란스런 시대와 한 여인의 기구한 운명이 만나 츠바이크의 필력으로 되살아난다니, 벌써부터 두근거린다.

하지만 이 책은 비판적인 관점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그의 평전들을 읽어본 경험으로 보건대, 평전이지만 100% 역사적 사실만을 말하진 않는다. 
역사라는 기록 사이사이에 빈 공간은 저자의 상상력으로 채워넣었다.
특히 심리적인 부분이 그렇다. 작가의 편향이 많이 반영되었을 것이라 예상된다.
따라서 역사적 인물들이 살아 숨쉬는 듯한 생동감을 느끼며, 소설처럼 흥미롭게 읽고 싶은 독자에게 추천한다.  

마지막으로 『조제프 푸셰』를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느긋하게 구매하려다 품절되어 당황했던 경험이 있다.
혹시 이 책에 마음이 끌린다면 서둘러 구매하길 권한다. 
나 역시 기쁜 마음으로 다음 달에 구매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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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타닉>은 이번까지 포함해 아홉 번을 본 영화다.
이처럼 여러 번을 본 영화는 많지 않은데, 이렇게 다시 찾게 되는 영화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내가 타이타닉에서 높게 평가하는 부분 중 하나는 작품 속 뛰어난 고증이다.
계급에 따른 복장의 다양성, 선실 내부의 가구와 장식들, 노동자층과 상류층의 대비되는 놀이와 예절 등.

타이타닉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을 통해 1912년 영국 사회와 문화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영화를 다시 찾게 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1912년 사우스햄튼을 출발하여 미국 뉴욕을 향하던 타이타닉은 항해 중 빙산과 충돌해

침몰하였다.
'신조차도 이 배는 침몰시킬 수 없다'고 요란하게 떠들던 배가, 그것도 첫 항해에서 허무하게

가라앉은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이를 바탕으로 두 남녀의 아름다운 로맨스를 사이에 녹여내어

예술 작품으로 탄생시키는 작업은 아무나 할 수 없다.
감독의 역량에 엄지를 치켜세우지 않을 수 없다.
영화의 주제는 재난과 로맨스이지만 외피를 살짝 벗겨보면 좀 더 다양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종종 이 영화를 상업 영화라는 이유로 낮게 평가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세기의 영화를 꼽는다면 <타이타닉>은 반드시 그 리스트에 들어가야 할 위대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우선 미장센이 너무나 훌륭하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뛰어난 고증은 물론이며, 30여 년이 지난

지금 봐도 어색한 부분을 찾을 수 없다.
놀라울 정도로 생생한 현장감을 비롯하여, 아름다운 바다의 풍경과 다채로운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바라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그리고 무엇보다 CG를 최소한으로 사용한 것이 신의 한 수였다.
실제 크기의 모형을 만들어 촬영했다고 알고 있는데, 만약 대부분의 장면을 CG로 처리했다면

지금쯤 어색하고 초라한 화면들을 보며 실망했을 것이다.
타이타닉의 미장센은 현재 나오는 그 어떤 영화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음악 역시 미장센에 견줄 만큼 훌륭하다. 이 영화의 주제곡인 'My Heart Will Go On'은 당시

대히트를 쳤다.
1998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판매된 음반이었으며, TV 채널을 돌리면 수없이 반복되어 나오던 노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 주제곡보다 특정 장면에서 적절하게 쓰인 다른 곡들이 더 마음에 든다.

Never An Absolution - 출렁이는 깊은 밤바다를 배경으로 한 메인 타이틀에서 흐르는 곡이다.
이 장면은 슬프지만 낭만이 깃든 영화의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타이타닉과 함께 잠든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을 떠오르게 만드는 곡이며, 몇 번을 보아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Southampton - 꿈과 희망을 싣고 미국을 향해 힘차게 항해하는 타이타닉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곡이다.
배가 출항할 때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갑판에서 손을 흔드는 잭의 모습은 볼 때마다 미소 짓게 만든다.
배의 선수에서 돌고래를 구경하다가 "나는 세상의 왕이다!"라고 외치는 장면에서는 나까지 어떤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Rose - 정략결혼을 강요하는 어머니의 지속된 설득에 잭을 밀어내던 로즈는, 어느 순간 그를

찾아와 "마음을 바꿨어요."라며 함께하겠다는 뜻을 전한다.
이때 흘러나오는 'Rose'는 노을 진 바다의 풍경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영화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장면이다.

Unable To Stay, Unwilling To Leave - 마지막 구명보트 자리에 혼자 타기를 거부하던 로즈에게,

잭의 자리도 마련해 뒀다는 하클리의 거짓말에 잭도 맞장구를 친다.
둘은 처음으로 같은 마음으로 뭉쳤지만, 실은 하클리의 자리만 남은 상황이다.
내려가는 로즈를 바라보며 계약 같은 건 없었냐고 묻는 잭에게, 하클리는 자신의 자리만 있다며 내가 이겼다고 조롱하듯 말한다.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로즈는 문득 깨달은 듯 배에서 뛰어내린다. 두 사람은 기쁨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강하게 끌어안는다.
이 감동적인 장면에서 흐르는 구슬픈 멜로디는 몰입감을 한층 더 높여준다.

연출 또한 완벽에 가깝다. 3시간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늘어지지 않고

흥미롭게 이어지는 흐름이 좋다.
잭이 도박으로 배표를 따내고 시간에 쫓기듯 탑승하기까지의 신나는 순간.
배의 하층부에서 육체적 노동을 하는 일꾼들과 거대한 증기 기관의 웅장함.
상류층의 식사 장면과 대비되는 노동자들의 가식 없는 흥겨운 놀이 장면.
로즈와 약혼자의 갈등, 전직 탐정을 연상케 하는 칼의 심복 러브조이와의 추격전.
배가 빙산과 충돌하고 침몰하기까지의 긴장감 넘치는 연출까지,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이어져 지루함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하지만 내가 이 영화를 아홉 번이나 보게 된 결정적인 또 하나의 이유는 연출보다도

'잭 도슨'이라는 인물에 있다.
꼭 주인공이라서, 혹은 외모가 출중해서 좋아하는 게 아니다. 그의 긍정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이 좋다.
이러한 면은 하클리가 기를 죽이려고 의도한 식사 초대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긴장될 법한 자리지만 짐짓 당당하게 행동하며 이런 말을 한다.

"더욱 행복한 것은 하루하루가 예측 불가능하며, 누굴 만날지도 모르고 어딜 갈지도 모른다는

것이죠. 어젯밤에는 선교 밑에서 자다가 지금은 세계 최고의 배에서 여러분과 샴페인을 들고

있습니다. (...) 인생은 축복이니 낭비하면 안 됩니다. 미래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클리와 장모가 한 팀이 되어 망신을 주려 했지만, 오히려 삶의 긍정성을 이야기하며

"순간을 소중히"라는 건배사까지 이끌어내는 모습이 멋지다.
그는 돈도 없이 이리저리 떠돌며 그림 판매로 생계를 이어가는 처지이지만, 세상에 불평하지 않고 그 속에서 삶의 긍정성을 찾아내며 행복을 느낀다.
참으로 본받을 만한 삶의 자세 아닌가.

나 역시 그의 생각에 동의한다.
이 지구라는 아름다운 행성에서 곤충이나 동물로 태어날 확률을 뚫고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세계의 수많은 국가 중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은 또 얼마나 운이 좋은가.
외모나 빈부 격차는 아무 상관 없다.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종종 떠나는 당일치기 여행에서 바라보는 자연의 풍경은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새삼

깨닫게 해준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 태어난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이런 생각들이 잭과의 공감대를 형성해, 다른 영화의 인물들보다 더 큰 호감을 갖게 된 듯싶다.
그의 인생이 낭만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해, 나도 이런 삶을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로즈는 시대적 관습을 거부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물로 그려진다.
상류층의 위선적인 예절과 청첩장만 5백 장이라는 정략결혼은 그녀를 숨 막히게 만든다.
이런 생활을 견디다 못해 배 위에서 뛰어내리려는 그녀를 마침 근처에 있던 잭이 발견한다.
설득 끝에 그녀의 마음을 되돌리고,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서로에게 마음을 빼앗긴 두 사람은 항구에 도착하면 함께 떠나기로 약속하지만, 그 약속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그녀가 살아온 인생을 짐작할 수 있다.
카메라는 나이 든 로즈의 잠든 모습과 함께 액자 속 사진들을 비춘다.
말타기, 비행기 조종, 자동차 운전, 바다낚시 등, 사진들은 그녀가 시대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게 백 년을 살며 잭과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잠들기 전 로즈가 바다에 '대양의 심장'이라는 목걸이를 던지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자신의 영혼을 구원해주었던 잭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그럼으로써 마음의 짐을 벗은 듯 홀가분하게 타이타닉과 잭에게 진정한 작별을 고하는 것이 아닐까.
또한 그 목걸이는 오래전 타이타닉과 함께 가라앉았어야 할 물건이므로, 미련 없이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낸다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주제는 타이타닉의 침몰과 두 남녀의 로맨스다.
하지만 중요한 한 가지가 더 있다.
영화는 '인생을 주변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말고 주체적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소하지만 의미심장한 내용이 하나 나온다. 스스로를 '왕족'이라 칭하던 갑부

하클리가 훗날 파산하여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계급적 선민의식에 휩싸여 있던 그도 대공황이라는 예측 못한 경제적 재난 앞에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됐다.
앞서 잭이 말한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와 일치하는 상황이며, 사람은 어떤 자리에 있든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만약 로즈가 관습에 순응하고 돈을 택해 하클리와 결혼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그와 함께 몰락하여 불행하게 삶을 마감했을 것이다.

항상 자신이 이긴다며 자만하던 하클리는 졌고, 주체적인 삶을 택한 로즈는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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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메리의 아기 밀리언셀러 클럽 57
아이라 레빈 지음, 공보경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이 작품의 백미는 로즈메리의 착란인지 실제 상황인지 모를 아슬아슬한 줄타기다. 마지막에 모든 진실이 드러날 때, 나의 엉성한 예측은 민망함을 드러내며 사라졌다.
후반부에 느껴지는 서스펜스가 탁월하여 독자를 놓아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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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식후 20~30분쯤 제자리 걷기와 종아리 운동을 한다. 
그냥 하기에는 지루하여 영화를 보는데 이렇게 하다보니 며칠이면 영화 한 편 뚝딱이다. 
그동안 영상물은 보기만 했지 감상을 글로는 써보지 않았다. 
이제 글쓰기 연습도 할 겸 내 감정의 기억을 남겨보려 한다. 
그 첫 번째 기록은 영화 『오아시스』다.


홍종두는 전과 3범으로 이제 막 출소했다. 교통사고 과실치사로 복역 중에 가족들은 찾아오지도 않고 말도 없이 이사갔다. 
가족들은 그를 싫어하는 눈치다. 특히 형수는 불쾌감을 대놓고 드러낸다.
종두는 나이에 맞지 않는, 어린아이 같은 사회성을 보여준다. 
형이 알선해준 중국집 배달 면접에서 사장이 말을 하는데 중간에 끊고 자기 말을 하는가 하면, 
오늘부터 일을 시작하라고 권하자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내일로 미룬다.
보다못해 옆에 있던 형이 야단을 친다.  일을 할 때도 착실함과는 거리가 멀다.
배달을 간 장소에서 사람들이 고스톱 치는 걸 구경하다 가게 문이 닫히자, 도로를 질주하며 신나게 순간을 즐긴다. 
좋게 말하면 순수하고 뒷일을 생각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랄 수도 있겠지만 나쁘게 말하면 눈치 없고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인 것이다.
 
자기 나름대로 미안한 마음이 있던 건지, 종두는 일이 끝나면 피해자의 집으로 과일 바구니를 들고 찾아간다. 
거기서 한공주를 보게 된다. 그녀는 뇌성마비 장애인이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형편이지만 돌봐주는 사람은 없다. 
거울에 반사된 빛을 동물로 상상한다거나 라디오를 들으며 하루를 보내는 게 전부다.
그 허름한 집에는 그녀 외에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달은 종두. 그녀를 강제로 겁탈하려다 실패하고 만다. 
그는 여자와 손도 잡아보지 못한 사람이다. 여자의 발을 처음 본다며 신기한 듯 자신의 발을 대보는 장면에서 추측이 가능하다.
이 대목은 인간 관계의 고립과 외로움이 어떻게 양면성을 나타내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어느 날 옆집 부부가 한공주의 집으로 들어와 성행위를 한다. 
여자는 자신들의 행위를 바라보는 공주를 의식하지만, 남자는 괜찮다고 말하며 하던 일을 계속한다. 
이들에게 공주는 사람이 아니라 집 안에서 기르는 짐승인 것인가? 
공주는 문을 닫고 힘겹게 립스틱을 바르다 갑자기 눈물을 흘린다. 
그녀도 감정이 있는 사람임을 감독은 보여주는 것이리라. 
그러다 갑자기 공주의 오빠가 찾아온다. 어딘가로 데려갈 모양이다.
말끔한 아파트. 집안으로 사회복지사 두 사람이 들어온다. 
"장애인용 아파트예요. 명의를 빌려서 가짜로 입주하는 사람이 있다길래.." 
가족이 남보다 못하다는 말이 실감난다.
 
다시 허름한 아파트로 돌아온 공주에게 오빠는, 
"옆집 사람들 밥 제때 안 챙겨주거나, 마음에 안 들면 바로 전화해. 한 달에 20만 원씩 주는데.. 20만 원이면 작은 돈 아니다." 
그에게는 20만 원이면 자신의 의무로 족한 것이다. 
홀로 남겨진 그녀는 종두가 남겨두고 간 전화번호로 연락을 한다.
이 연속된 장면들을 보며 나는 매우 마음이 아팠다.
어느 누가 자신을 겁탈하려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고 싶겠는가? 
그녀가 느끼는 소외감과 외로움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두 사람은 그 후 가까워진다. 종두가 말동무도 되어주고 밖으로 나들이도 데려가고 몸도 씻겨주고 빨래도 해준다. 
참 아이러니하다. 종두가 교통사고를 일으켜 사망케 한 사람이 공주의 아버지란 걸 생각해보면.
아무도 돌봐주는 이가 없는 고독한 환경을 만든 가해자가 이제는 보호자가 되었다. 
이 지독한 역설 앞에서 복잡한 감정이 드는 순간이다.

반전은 어머니의 생신 축하 자리에서 드러난다. 종두가 그녀를 데리고 참석한 것이다.
식구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지켜보는 내가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듯했다.
참다못한 형이 종두를 밖으로 불러낸다. 
자신에게 대체 왜 이러냐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왜 형이 불편해할까?
사실 교통 사고를 낸 범인은 형이었다. 종두가 그 죄를 뒤집어 쓰고 대신 감옥에 갔던 것이다.
이 얼마나 강렬한 반전인가? 감독에게 한 방 얻어맞은 듯하다.
나조차도 반전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종두를 한심하게 생각했다. 
편견을 가지고 그를 평가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사회에서 큰 문제없이 살아가지만 장애인이라고 불쾌한 모습을 보이며 무시하는 사람과 행실에는 문제가 있지만 장애인을 보듬어주는 사람.
과연 누가 인간적인 사람일까. 

그런 꼴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간 두 사람. 
돌아가려는 종두를 하룻밤 자고 가라며 공주가 붙잡는다.
난 이 대목이 영화에서 가장 씁쓸하면서 슬픈 장면이라 생각된다.
여러 사람 앞에서 죄인 취급을 당하고 쓸쓸하게 돌아온 그녀가 느끼는 외로움이 얼마나 컸을까?
혼자 남겨지는 것이 싫어 남자를 붙잡는다. 하필이면 종두의 어머니와 생일이 같은 날인 건 또 뭐란 말인가?
두 사람의 육체적 관계는 오빠 부부가 갑자기 찾아오며 끝이 난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종두가 겁탈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그들에겐 장애인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다.
올케는 "우리 아가씨 불쌍해서 어떡해"라며 귀청이 찢어지도록 울부짖는다. 무엇이 불쌍하다는 것일까? 
월 20만 원으로 자신들의 의무를 옆집으로 떠넘기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홀로 방치한 자의 울부짖음이여!  

잡혀 들어가는 종두에게 형사들이 묻는다. 
"솔직히 말해봐, 너 변태지?", "얌마, 솔직히 성욕이 생겨?"
영화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장애인에게 편견이 심한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공주의 오빠는 물건 값을 흥정하듯이 합의금으로 2천만 원을 부른다. 
종두의 형은 합의금 요구를 거절하며 저런 놈은 사회와 격리시켜야 한다고 답한다. 
도움이 필요한 가족을 저버리고 2천만 원을 요구하는 자와 자신의 죄를 대신 짊어진 동생을 사회와 격리시켜야 한다는 자. 
뻔뻔함으로는 박빙의 승부다. 

공주는 온몸을 바둥거리며 아니라고 말을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다.
다들 겉으로는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진심으로 소통하는 인물은 전과자이며 사람들이 기피하는 종두뿐이다.

이 영화의 제목 '오아시스'는 공주의 방 벽에 걸린 그림을 말한다. 
하지만 중의적인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고립된 두 사람이 삭막한 사막과 같은 현실에서 서로에게 유일한 안식처이자 오아시스가 되어준다는 의미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기회를 틈타 도망친 종두는 공주의 집으로 찾아간다. 
집앞 나무 위에 올라가 톱질하여 가지를 전부 잘라 버린다.
언젠가 공주가 방안 벽에 걸린 오아시스 그림에 비치는 나무 그림자가 무섭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제 잡혀가기 전, 종두가 그녀의 오아시스를 지켜주기 위해 건넨 작별의 선물인 셈이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처럼.
라디오의 소리를 크게 높여 답하는 공주의 모습이 서글프다.

이후 감옥에서 보낸 종두의 편지와 함께 공주가 스스로 방청소를 하는 모습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공주는 누구의 도움 없이 자립하여 살아갈 수 있을까? 종두는 출소 후 바른 사람이 되어 살아갈 것인가?
글쎄, 그러기엔 두 사람에게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아 보인다. 
어쨌든 영화는 다소 희망적인 내용으로 마무리 된다.
 
참으로 보는 내내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그 불편함만큼 기억 속에 오래 남을 것 같다.
'당신은 범죄자와 장애인을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는가?' 
영화는 나에게 내내 이렇게 물어보는 것 같았다.
24년 전 영화이지만 지금도 이 물음에 '그렇다'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한 편의 자연주의 문학을 읽은 것 같은 매우 씁쓸하고 슬픈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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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름 동서 미스터리 북스 99
로스 맥도날드 지음, 강영길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7월
평점 :
품절


나는 이 작품을 읽어나가며 당혹감을 느꼈다.

이전에 읽었던 『지하인간』과 이야기의 구성이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마치 완성된 작품의 틀에 등장인물과 소재라는 부품만 갈아끼운 느낌이었다.

일반적인 추리 소설은 살인사건이 벌어지면 긴장감 있게 이야기가 진행되고

치밀한 논리적 추리를 통해 사건을 해결하는 양상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로스 맥도날드의 작품에선 탐정이 인물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통해

사건의 내막을 추적하고 서서히 진실에 가까워진다. 
그 과정에서 은은하게 느껴지는 미스터리 분위기마저 유사하다.

또한 수십 년 전 벌어진 사건이 현재의 사건과 연결된다는 공통점도 있다.
헬렌 해거티는 달리의 주임 교수이다. 그녀는 살해 협박을 받는다며 루 아처에게

하룻밤 같이 지내줄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아처는 요청을 거절하고 다음 날 헬렌은 누군가의 총에 의해 살해 당한다. 
그녀는 20~30년 전 루크 딜로니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데 같은 범인에 의해 살해 당한 것으로

추리된다.

두 세대에 걸친 가족과 주변 인물들의 얽혀 있는 복잡한 관계마저 이제는 친근하다.
헬렌이 살해되자 사건 현장에 있던 달리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달리는 10년 전, 아버지 첵 베그리가 엄마를 살해했다는 결정적인 증언을 하게 된다.

그 결과 베그리는 10년을 복역하고 막 출소한 상태다. 그는 현재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호프만은 헬렌의 아버지로 전직 경찰이다. 그는 수십 년 전 벌어진 로크 딜로니 사건을

담당한 후 괴로운 기억으로 알콜 중독자가 되었다.
로이 브래드쇼는 달리의 대학 지도부장이며, 그의 어머니 미세스 브래드쇼와 함께

어딘가 미심쩍은 모습을 보인다.
여기에 더해 많은 주변 인물들까지 등장하여 독자가 따로 인물 관계도를 작성해야 될 정도인데, 이 역시 『지하인간』과 마찬가지다.

이야기의 구조는 소름이 더 세련된 느낌이었다. 
마지막까지 범인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빈틈없는 짜임새가 돋보였다.
반면 작품을 감싸는 어두운 분위기는 거대한 산불을 배경으로 한 『지하인간』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책을 덮고 나자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왜 저자는 두 이야기의 구조를 과거와 현재가 이어져,

세대간의 문제를 일으키는 방식으로 정한 걸까?
이 작품들이 출간된 1960~70년대의 미국은 가족이라는 관계가 희미해진 시대였던걸까?
일반적으로 작가는 사회적 현상을 작품에 투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두 작품도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써 내려간 것일까?
이 물음이 당시 미국 사회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게 만들었다.

1969년, 무과실 이혼법이 통과되었다. 
명확한 잘못을 증명하기 전에는 이혼하기 어렵던 관례를 성격 차이만으로도

이혼을 가능하게 하였고,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이 쉬워져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는 이혼율이 급증하게 되는 원인으로 이어졌다.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자 젊은 세대는 반전 운동에 참여하며, 기성세대의 애국주의 가치관과

부딪쳐 점차 갈등으로 심화된다. 
결국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결속이 느슨해지게 된 것이다.
여기서 무릎을 탁 치게 된다. 역시 맥도날드는 이유가 있었구나! 

마지막으로 번역에 대해서 덧붙이자면, 두 작품 모두 강영길 역인데

『소름』은 DMB(동서 미스터리 북스)의 번역 수준에선 꽤나 양호한 편이었다. 
DMB 특유의 오래된 번역 스타일은 같지만, 『지하인간』처럼 등장인물의 말투가 바뀌거나

어색한 문장은 없었다.
이 묘한 상황을 루 아처처럼 추리해본다면 출판사에서 교정을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시리즈 전체의 번역 수준이 『소름』정도만 되었어도 독자들에게 만족을 주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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