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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한 페이지 ㅣ 빛소굴 세계문학전집 12
에밀 졸라 지음, 이미혜 옮김 / 빛소굴 / 2025년 12월
평점 :
사랑의 한 페이지, 사랑의 한 페이지라...
문장을 음미하면 할수록 참 좋다.
에밀 졸라의 소설 하면 떠오르는 잔혹한 비극적 이미지와는 다른, 낭만적인 정서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세상의 수많은 사랑 이야기 중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내용일까?
아니면 어떤 가슴 시린 사랑 이야기일까? 내용을 궁금해하며 제목을 음미하다, 문득 가슴이 아려오는 느낌을 받았다.
알 수는 없지만 회상적이며 쓸쓸한 감정이 북받쳤다. 책을 덮고 난 지금, 나는 왜 제목이 '사랑의 한 페이지'인지 깨달았다.
내가 에밀 졸라의 작품을 읽는 가장 큰 이유는 19세기 프랑스의 사회와 문화를 간접 체험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고전 작품들에서도 접할 수 있지만, 사실주의나 자연주의 작품은 이 부분이 특히 두드러진다.
『사랑의 한 페이지』를 통해서도 당시 프랑스의 사회와 문화를 엿볼 수 있었다.
엘렌은 남편을 여의고 딸 잔과 함께 살아가는 중산층의 미망인이다.
어느 날 딸이 발작 증세를 보이며 위급한 상황에 놓이자, 정신없이 의사를 찾아 데려온다.
다행히 딸은 목숨을 건졌고, 이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차츰 가까워지며 사랑에 빠지고 만다.
의사 앙리는 모범적이고 교양 있는 상류층으로 사교적인 성격의 아내 쥘리에트, 아들 뤼시앵과 가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엘렌이 세 들어 살고 있는 집의 집주인이기도 하다.
엘렌이 중산층 이상이라는 것은 소설 도입부에서 묘사되는 집안의 가구와 장식들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다.
그녀는 한 층 전체를 임차하여 살아간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굳이 집을 임차하여 사는 걸까?
당시 파리에서는 중산층 이상이라 하더라도 건물 한 층을 임차해 사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특히 혼자가 된 여성에게는 저택 전체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부담이 컸을 수 있다.
신뢰할 수 있는 집주인의 건물에 거주하는 방식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도 안정적인 선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작품 속 일상의 디테일에서도 당시의 문화를 엿볼 수 있었다.
하녀 로잘리가 자신의 약혼자를 집안으로 데려와 밥을 먹이다가 들키는 장면이 나온다.
만약 이 장면이 현실에서 일어났다면 과연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못난 주인이라면 온갖 모욕적인 소리를 하며 쫓아내지 않았을까?
감정을 숨기고 육체 노동을 하며 견뎌내던 당시 하녀들의 삶이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작중 두 연인이 연애하는 행위도 몇 차례 나오는데, 약혼남 제피랭이 자꾸만 애인을 꼬집는다.
『목로주점』에서도 나오는 이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문이었다.
당시 남성 노동자 계층이 주로 하는 원초적인 몸짓으로 이성을 희롱하는 의미가 있다.
꼬집힘을 당하는 여성은 팔뚝 따위를 때리며 답한다.
서로 말주변이 없으니 어색한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한 행위였으리라.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이상하지만 재밌는 장면이다.
성대한 파티를 열고 그것을 즐기는 쥘리에트의 모습에서 또다시 의문이 생긴다.
파티란 게 준비하는 과정도 어렵거니와,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까지의 사람들을 초대하고 이들을 일일이 상대한다.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여기에 더해 의상부터 음식까지 신경 쓸 게 너무나 많은데, 고전 소설 속 부르주아들은 왜 이토록 파티를 좋아하는 걸까?
이는 가문의 사회적 지위와 평판, 인맥 관리와 깊은 연관이 있다. 남편의 사업 파트너를 관리하고 자녀의 좋은 혼처를 탐색하는 과정일 수도 있고(비즈니스 미팅),
'나 이만큼 잘 산다'라는 허세와 평판에 민감한 문화가 있다고 한다.
피곤해도 파티를 열 수밖에 없었던 사회였다.
화려함의 이면에는 하녀와 하인들의 고된 노동 역시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씁쓸함이 밀려든다.
작중 성당에서 성모의 달 행사를 하는데, 잔이 그렇게 흥분하며 좋아하던 장미꽃으로 화려하게 꾸민 내부 장식이 궁금하여 찾아보았다.
지금도 이 행사는 이어져 오고 있어 찾아보는 데 어렵지 않았다. 장미꽃으로 카펫을 만들어 바닥에 깔고 제단을 화려하게 꾸며놓는다.
온통 장미꽃으로 꾸며진 아름다운 내부를 내가 직접 체험했다면, 나 역시 어린아이처럼 흥분하며 좋아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번에는 루공마카르 시리즈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고 읽었다.
루공과 마카르라는 성을 가진 두 가문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델라이드 푸크라는 여성이 나온다.
푸크는 신경증을 가지고 있고, 이 여성의 첫째 남편인 루공은 야망과 탐욕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다.
둘째 남편인 마카르는 술주정뱅이며 폭력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이것을 알게 되니 작품에서 주인공의 성을 알면 어떤 내용일지 대충 예상해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작품에선 유전적 신경증을 물려받은 캐릭터가 잔이다.
잔은 질투심이 너무나 강한 아이다.
질투심으로 의사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장면에선 이토 준지의 어느 작품에서 나오는 고약한 어린애의 모습이 떠올라 몹시 얄미웠다.
이후 두 사람의 만남에 떼쓰기를 하지 못하고 가슴 아파하는 장면에선 연민이 느껴졌다.
페튀 할멈이라는 인물이 흥미롭다.
졸라는 이 인물을 소설에서 매우 교활한 인물로 묘사한다. 하층민이라고 해서 선량하게 그려내지는 않는다.
엘렌에게 한 푼의 적선을 받기 위해 가늘게 눈을 뜨고 행동을 살피며 이리저리 눈치를 본다. 갖은 아첨과 마음에도 없는 기계적인 축복도 빌어준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두 사람은 다시 마주치게 되는데, 공동묘지에서 다리를 절며 장례식을 치르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여 연명하는 비참한 모습으로 엘렌과 마주친다.
이에 페튀 할멈은 엘렌의 주머니에서 20수 동전 하나를 끄집어내기 위해 필사의 화술을 펼친다.
결국 엘렌이 동전을 꺼내 할멈에게 건네주려던 순간, 할멈은 그만 잔의 이야기를 꺼내는 실수를 범하고 만다.
엘렌은 잔의 죽음을 떠올리며 충격으로 동전을 건네주던 손이 허공에서 멈춘다.
페튀 할멈은 실수를 깨닫고 필사적으로 화제를 돌려 끝내 동전을 얻어내고야 만다.
이 과정까지의 이야기는 블랙코미디를 연상케 해 씁쓸함을 자아낸다.
저자의 의도가 어쨌든 나는 이 페튀 할멈이 그리 밉지가 않다.
그녀의 교활함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비참한 현실 속에서 살기 위한 몸부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또한 할멈의 행동을 보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평범한 월급쟁이들의 모습도 겹쳐 보였다.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가늘게 눈을 뜨며 눈치를 살피고, 승진을 위한 갖은 아첨과 마음에도 없는 기계적인 호응이 페튀 할멈과 다를 게 무엇인가?
작중 파리의 풍경 묘사가 수차례 등장한다. 그중 처음과 끝의 묘사가 특히 인상 깊다.
"그날 아침, 파리는 미소 짓는 나른함 속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센 강 계곡을 따라 올라온 수증기에 강 양안이 잠겨 있었다.
점점 커지는 태양이 우윳빛 엷은 아지랑이를 비추었다.(중략) 파리 위에 내려와 잠든 거대한 운무 너머로 거의 흰색에 가까운,
바랜 듯한 푸른색 맑은 하늘이 깊은 궁륭처럼 펼쳐졌다.(중략) 어린아이의 연한 금색 머리카락 같은 빛이 산산이 부서져 허공을 온통 따스하게 반짝이게 했다"
처음 등장하는 파리의 묘사인데, 바쁜 하루를 시작하는 신선함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도시 위에는 티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펼쳐졌다. 엘렌은 추억이 싫증 나 고개를 들었다. 깨끗한 하늘이 기분 좋았다.
그것은 투명하고 창백한 푸른빛, 햇빛이 환한 가운데 살짝 감도는 푸른빛이었다. 지평선 위에 낮게 걸린 별이 은제 램프처럼 반짝 빛났다.
그것은 눈이 반사되어 얼어붙은 공중에서 온기 없이 타올랐다."
소설 후반부 마지막 묘사인데, 쓸쓸하면서 허망함이 느껴진다.
이 두 장면의 대조는 엘렌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열정적으로 시작했던 사랑이 결국 쓸쓸한 여운만을 남긴 채 끝나버린 것처럼 말이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지겨운 편이었다.
파리의 풍경 묘사가 좋은 부분도 있었지만, 상당 부분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한국 사람이 상상하기에는 너무나 벅찼다.
그리고 주인공 엘렌은 도덕적이며 절제된 인물이라 심리 묘사가 그다지 흥미롭지 못했다.
이야기 또한 특별한 사건이나 긴장 없이 평범하게 흘러간다. 이런 점들이 지루함을 유발했으나, 마지막 분위기와 결말이 그것을 만회해준다.
지루함의 크기만큼 여운도 크게 남았다.
책을 덮고 나니 마지막까지 독서에 쏟았던 시간과 노력이 후회되지 않는다. 졸라의 작품들이 대개 이렇다.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게 아닐까?
'앙리와의 불같은 사랑도, 사랑하는 딸의 죽음도 모두 엘렌의 인생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랑의 한 페이지일 뿐이다.
이처럼 당신(독자)이 살아가면서 겪을 행복과 불행은 앞으로 살아갈 수많은 인생의 한 페이지일 뿐, 너무 그것에 연연하지 말고 당신의 인생을 살아가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