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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장선하 옮김 / 책만드는집 / 2012년 7월
평점 :
나는 왜 노인과 바다가 두꺼운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처음 노인과 바다를 읽은 것은 고등학교 입시에 시달리던 때였다.
내가 세들어 살던 주인집 거실에는 멋진 장식용 책꽂이(벽 전체를 차지하는 책장이 아닌)가 있었다.
그 책꽂이엔 출판사는 기억나지 않지만 세계문학 전집이 꽂혀있었는데 얼마나 반짝반짝 새거였던지.
처음엔 어떤 책이 있나 제목을 훑어 보다가, 다음엔 슬쩍 몇 장 넘겨보기 시작한 것이 결국 전질의 대부분을 읽어버렸다.
그집에도 아들 둘, 딸 둘이 있었는데 나중에 주인 아저씨 말을 빌자면 아무도 읽지 않고 그저 장식용으로 꽂아 두나했는데 학생이 즐겁게 읽는것 같으니 다행이라 했다.
뭐 그 진심이야 손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었을지, 죽쒀서 개준다였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덕분에 참 잘 읽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열심히 읽었던 책들의 줄거리들은 대충 이러이러했지 하면서 기억이 나는데 왜 감명깊었던 대목이나 문장은 이렇게도 생각나는게 없을까?
그런데 40대가 되어 다시 읽게된 노인과 바다, 이번에는 다르다.
요즘 이 책을 가방에 넣고 다닌다.
벌써 두 번을 연거푸 읽고도 손에서 놓질 못하고 있다.
나이란 이런 것일까?
산티아고 노인처럼 나도 그와 같은 인생의 황혼무렵에 이 책을 읽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젊어서는 하룻밤을 꼬박 세운 팔씨름에서 챔피언을 차지할 만큼 힘이 넘치던 어부였던 산티아고.
이젠 늙어 노인이 된 그는 벌써 84일 째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다.
그런 그에겐 언제나 그를 믿고 따르는 친구가 있다.
다섯 살 때부터 노인에게서 고기 잡는 법을 배웠던 소년은 노인과 함께 양키스를 응원하고, 디마지오를 응원하며 노인이 결코 실패자가 아니라 지금은 다만 운이 나쁠 뿐이며 언제든 다시 옛날처럼 큰물고기를 잡아 올 것이라 믿어주는 든든한 친구이다.
노인은 친구가 준비해준 미끼를 들고 바다로 나간다.
그런 그에겐 오랫동안 고기를 잡지 못한데서 오는 불안감도 조급함도 없다.
그는 부표를 낚싯줄의 찌로 사용하고 모터보트 배를 몰며 바다를 남성으로 생각해 엘 마르라 부르는 젊은이들과 다르다.
싱싱한 진짜 물고기를 미끼로 쓰고, 낚싯줄과 작살과 방망이를 쓰는 노인에겐 바다가 라 마르이다. 여자바다.
그는 새들과 물고기들의 움직임을 읽는다.
그것은 오랜 어부생활에서 오는 습관이다. 삶의 경륜인 것이다.
그리고 그 판단은 틀리지 않았고, 드디어 자신의 배보다 더 큰 청새치를 낚는다.
물고기가 처음 미끼에 입질을 할 때도 노인은 서두르지 않는다.
미끼를 다 삼킬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린다.
다른 물고기가 낚시에 걸려도 낚시 줄을 잘라내는데 결코 주저하지 않는다.
욕심이 화를 자초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미끼를 문 청새치와의 밀고 당기는 싸움에서도 상대를 인정해준다.
'물고기야, 난 너를 사랑하고 존중한단다.'
그러면서도 바다의 방향을 읽고, 바닷물에 손을 넣어 물고기의 움직임과 속도로 물고기가 언제쯤 물밖으로 나올지를 가늠한다. 언제 끝날지 모를 이 싸움에 대비해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어떻게 체력을 아껴둘 것인지를 판단한다.
이제 청새치가 그의 작살에 꽂혔다.
돛을 펴고 무역풍에 몸을 맡겨 돌아간다.
그러나 청새치의 피냄새를 맡은 상어의 공격을 받는다.
노인은 상어를 물리치지만 결코 자신이 잡은 물고기가 멀쩡한 상태로 항에 닿을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노인은 결국 졌다는 것을 알았다.
노인은 사흘만에 돌아왔으나 그에겐 아무것도 없다.
아니다.
배는 무사하고, 키도 조금만 손을 보면 다시 쓸 수 있고, 침대도 그대로 있다.
아침이 되었을 때 노인을 위해 커피를 가지러 가면서 울어주는 소년도 있고, 그를 걱정해주는 마을 사람들도 그대로 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근사한 상어를 잡은 노인은 거센 바닷바람이 멎는 사흘쯤 후엔 소년과 다시 바다에 나갈 것이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20대에 이 소설을 읽었다면 청새치를 낚으면서 더 치열하게 힘겨루기 하지 않는 노인에 실망했을 것이다.
자신이 잡은 물고기를 공격하는 상어떼를 물리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하지 않는 노인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잡지 못했던 상어를 잡고도 선술집에서 거품물고 자랑하지 않는 것이 의아하고,
함께 낚인 다른 고기를 너무도 쉽게 포기해버리는 노인에 실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인도 팔씨름 챔피언을 지냈던 그때였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다는 오늘도, 내일도 나가야 한다.
그렇게 노인은 40이 되고, 50이 되었겠지.
노인은 내일도 바다에 나갈 것이고, 또 그다음 내일도 바다에 나갈 것이다.
야구를 사랑했고, 사냥을 사랑했고, 쿠바의 바다와 낚시를 사랑했던 헤밍웨이.
그의 고독과 외로움이 산티아고의 것과 같았을까?
나도 지금보다 더 나이든 다음에 다시 노인과 바다를 읽게 되겠지.
그때는 또 어떤 느낌일까?
-- 헤밍웨이 사후 50년이 되는 해라 저작권에서 풀린다고 해서 많은 출판사에서 그의 작품이 해로이 출판되고 있다.
나는 출판사마다 다 비교해 볼 수는 없으니 그에 대해서는 뭐라 표현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 기회에 많은 이들이 좋은 책을 만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