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예쁜 것 - 그리운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
박완서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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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기 암으로 죽어가는 환자에게 조차 웃음이 번지게 만들 만큼 예쁜 것은 무엇이었을까?
포대기 끝에 살짜기 삐져 나온 발그레한 아가의 발가락. 

삶이 끝나가는 자락 끝에 새롭게 움트는 생명력이란 게 그런 것인가 보다.(83쪽)

 

우리 엄마한테도 이런 예쁜 게 있었더라면 그렇게 허망하게 삶을 버리지 않았을까?

피를 나눈 형제를 잃는 슬픔에 이어, 남편의 사업 실패, 어머니의 비극적인 죽음까지.

내가 그 혼란과 고통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올 수 있었던 힘은 내 뱃속에서 꼬물거리던 아이의 태동이었고 내 눈물을 닦아주던 아이의 조막만한 손이었다.

생명이란 것이 그런 것인가 보다.

 

6.25 전란의 와중에 빨갱이로 몰렸다가 반동으로 몰렸다가 하면서 도저히 인간 같지 않은 자들로부터 온갖 수모와 박해를 당하면서 언젠가는 저자들을 등장시켜 이 상황을 소설로 쓸것이란 예감만으로도 버티어 낼 수 있었다는 (21쪽) 노작가의 담담한 고백은 얼마나 솔직한지.

 

흐르는 강가에서 바람을 쐬면서 어린 손자가 뛰노는 모습과 젊은 아들과 사위가 강물에 물수제비를 뜨는 걸 구경했다. 그때는 보이는 모든 것이 왜 그리도 아름다웠던지. 젊은 내 새끼들의 옷깃과 검은 머리칼을 나부끼게 하는 바람조차도 어디 멀고 신비한 곳으로부터 그 애들이 특별히 아름답게 보이라고 불어온 특별한 바람처럼 느꼈으니까. 아마도 나는 그때 곧 세상을 하직할 남편의 눈으로 그 모든 것을 보았을 것이다.(79쪽)

 

남편과의 사별로 인한 그녀의 상처는

'시간이 나를 치유해준 것이다.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깨달은 소중한 체험이 있다면 그건 시간이 해결 못할 악운도 재앙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이야말로 신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라는 고백을 읽으면서 내게도 시간이 흐르면 어느 날엔가는 담담히 지금의 상처도 추억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위로해 본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얻은 위로이다.

 

박완서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늘 이분의 겸손함에 감탄하곤 했다.

자전적 소설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와 '그 산이 거기 있었네' 그 어디에도 잘 난척 거만떠는 대목을 찾을 수 없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80세 가까운 노작가쯤되면 어깨에 힘 좀 넣어도 될만하건만 초등학생의 편지에 조차 이렇게 진지하게 답변해주는 모습은 감동이다. (이런 노작가에게 그토록 도발적인 질문을 할 수 있었던 넌 누구냐, 부럽다.)

 

나의 세속적인 호기심 중의 하나가 박완서 작가와 박경리 작가, 공지영 씨와 신경숙 씨는 서로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작가가 80년대 부터 서로를 아낀 추억을 읽으면서 대작가로 존경 받는 이유를 알것 같다.

서로를 이렇게 존경해주다니.

 

이 책의 대부분의 글들이 작가가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에 쓴 것이다.

노년에도 태어나서 살았던 고향과 가족에 대한 애정은 식지 않는 모양이다.

작가의 글 곳곳에서 인용되었던 그리움이 이 작품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지갑 잊고 외출했다 겪은 혼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렇게 유명한 사람도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구나 싶은게, 마치 이웃집 할머니를 만난듯한 반가움에 활칵 생긴다. 거기에 더해 참 귀엽기까지 하니.

 

이젠 이걸로 끝이겠거니 했던 박완서 님의 책을 또 이렇게 시간이 흘러 만날 수 있는 기쁨이라니....

세상에 예쁜 책 한 권.

 

 

 

___ 한우리북까페의 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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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빈 라덴이 아니에요! 가로세로그림책 2
베르나르 샹바즈 지음, 바루 그림, 양진희 옮김 / 초록개구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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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유명인 누군가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도 먹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리틀 누구로 불리며 누구 못지 않은 인기를 누리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는 멘토로 삼아 닮아 가기를 소원하는 사람도 있다.

 

낫시르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을까?

빈 라덴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니다.

 

 

'나는 빈 라덴이 아니에요'의 주인공 이슬람 소년 낫시르는 아직 어떤 사람이 될지를 선택하지 못한 어린 소년이다.

그러나 누군가와 같은 피부색과 같은 인종, 같은 종교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2001년 9월 11일 그날 이후로 불가촉천민이 되고 말았다.

 

침례교도인 존의 부모님, 이슬람교를 믿는 낫시르의 부모님과 달리 존과 낫시르는 종교엔 그다지 관심이 없고, 야구 이야기와 낚시를 더 좋아하며, 같은 반 쌍둥이 친구에 대해 이야기 하기를 좋아는 평범한 소년들이다.

9월 11일 새학년이 된 낫시르와 학교 아이들은 동물원 견학 중이었다.

그러나 그날의 사건은 아이들이라고 비켜가는 것은 아니었다.

텔레비전을 통해 생생하게 중계되는 끔찍한 장면들은 낫시르에겐 밤마다 악몽으로 나타났고, 존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존이 걱정된 낫시르가 편지를 보내보지만 탄저균에 감염된 우편물이 배달된다는 이유 때문에 낫시르의 편지를 존이 열어보진 못했을 것이다.

결국 존은 부모님의 뜻에 따라 침례교에서 운영하는 학교로 전학을 가고, 훗날 농구장에서 우연히 만난 존에게 말을 걸어보지만 부모님 때문에 더이상 어울릴 수 없다는 대답을 듣게 된다.

"왜 나만 안 돼? 페드로와 첸은 괜찮고?"

"너희 아빠가 이슬람교도라서 그래!"
"내 이름은 낫시르야, 빈 라덴이 아니라고!"

 

10년이 지난 2011년 5월 1일 낫시르의 스무 살 생일 파티에 어릴 적 친구 페드로, 바리, 첸 그리고 야구부 친구들과 대학 친구들의 왔다.

그날 밤 빈 라덴이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그라운드 제로에 가서 기쁨에 넘친 사람들을 만나겠다는 바리와 함께 낫시르도 그곳으로 갔다.  

그곳에서 혹시라도 존을 만날 수 있을까 해서.

 

9.11의 비극이 어떻게 어른들만의 비극이었겠는가?
우리는 큰 사건이 터지면 의례껏 어른들만의 일이라고 여겨왔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아이들일지 모른다.

낫시르가 악몽에 시달리고, 아랍 놈이라고 욕을 들어야 하고, 테러범으로 체포되는 가족과 이웃을 보는 것도 아이들이다.

어른들은 존의 부모처럼 선택 할 수 있지만 아이들은 존과 낫시르처럼 선택권 조차 없다.

 

이 책을 쓴 베르나르 샹바즈는 프랑스인으로 역사학자이면서 소설가로 이 책은 9.11을 우리가 알고 있는 CNN식의 미국 입장으로만 이해하기 보다는 뒷면에 숨은 이야기를 책 곳곳에 사진과 설명을 덧붙여서 균형잡힌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단지 9.11만이 아니라 1991년 걸프전이 일어났던 이라크, 팔레스타인을 공격하고 있는 이스라엘, 2003년의 이라크 전쟁이 실제로는 부시 대통령과 미국 석유 재벌들의 이익을 위한 전쟁이었음을 지적하고 있으며 이러한 사태들이 이슬람 국가들을 자극한 원인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존과 낫시르.

그들은 이제 생김새가 달라도, 피부색과 종교는 달랐지만 낚시와 야구는 같이 좋아하던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그들도 부모가 되어 자신들을 닮은 리틀 존과 리틀 낫시르 갖게 될지도 모른다.

그들도 자신들과 똑같은 아픔을 물려주고 싶진 않을 것이다.

 

이 책이 전하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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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이승우 지음 / 민음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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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천산 수도원의 갑작스런 몰락과 지하방 벽에 써진 성경과 관련한 의문. 

천산 수도원을 둘러싼 인물들의 원죄와 욕망 그리고 속죄를 통한 구원의 이야기. 

 

사촌 누이를 사랑하게 된 소년 후.

누이를 농락한 박중위를 칼로 찌르고 나서 아버지 손에 이끌려 천산 수도원으로 가게 된다.

후가 천산 수도원에서 읽게 된 성경은 그에겐 거울이다.

"그것은 성경이 큰 거울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비추지 못하는 것, 비출 수 없는 것은 없다.....거울을 들여다볼수록 형제는 거울이 아니라 형제를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성경을 읽을수록 형제는 성경이 아니라 형제를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111쪽---

 

후는 압살롬의 길을 걷는다.

여동생을 범한 이복 형을 죽이고 자신의 딸에게 사라져버린 자신이 사랑했던 누이의 이름을 지어주고 그리워했던 것처럼  

천산 수도원을 떠나게 된 후는 사라져버린 누이를 찾아 헤맨다.

후는 오랜 헤매임 끝에 천산 수도원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로부터 시작된 벽서, 그는 과연 거기에 무엇을 담았던 것일까?

 

세상의 기억에서 자기를 없애는 것이 소원이었던 사람 한정효.

1961년 혼란에 빠진 사회를 안정시키고 가난과 부정부패에서 나라를 구한다는 대의를 따라 군복을 입은 장교 신분으로 한강을 건넌 선글라스를 낀 그와 함께 했던, 아내가 선물한 선글라스를 꼈던 한정효.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복귀한다는 것이 군사 혁명 위원회의 '혁명 공약'중에 하나였지만 그 공약은 그 이후의 다른 많은 약속들과 마찬가지로 지켜지지 않았다. 군은 정권을 넘겨줄 양심적인 정치인을 찾지 못했으므로 본연의 임무로 복귀할 수 없었고, 국민들의 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고 확신했으므로 본연의 임무로 복귀하는 대신 스스로 양심적인 정치인이 되는 편을 택했다. 본연의 임무로 복귀하지 않고 군복을 벗은 정치인의 힘은 군복을 벗기 전의 장군보다 더 커졌다."

---164쪽---

 

3선을 위해 헌법을 바꾸고, 공권력과 금력을 동원해서 다시 권력을 잡은 것으로 충분하다. 세 번이나 했고 10년이 넘었다. 지나쳤다. 이제 그만 해야 한다. 여기서 멈춰야 한다. 계엄령은 안 된다. 국회 해산도 안 되고 정치 활동 중단도 안 되고 대학의 문을 닫는 것도 안 된다. 영구 집권은 불가능하고 무모한 욕망이다. 여기서 멈춰야 한다." 

---167쪽---

 

다른 날 한정효는 같은 말을 했고, 구체적인 계획안을 문서로 제시했다.

결국 "임자가 지금 나한테 훈계하는 건가? 못쓰겠다."는 선언을 듣고 유폐당한다.

외국으로 나가 언론과의 회견을 한 측근으로 타격을 입은 장군은 그를 천산 수도원에 감금해버린다.

세월이 흘러 자신 때문에 피해를 입을 천산 수도원 형제들을 위해 그곳을 떠나 머나먼 길을 걸었으나 다시 돌아와 역사와 형제들에게 속죄해야 했던 한정효.

그는 벽서에 무엇을 담았을까?

 

상부의 명령으로 한정효를 천산 수도원에 감금했고, 그의 감금을 위해 후를 강제로 세상으로 내보냈으며, 훗날 저돌적이고 야욕에 사로잡힌 또 다른 장군이  선글라스 장군이 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장군의 또다른 장교의 명령으로 천산 수도원을 파괴했던 장.

 

그는 자신이 했던 행동을 교회사 강사 차동원의 입을 빌어 속죄한다.

 

선글라스 장군에 의해 한번 형제를 강제로 떠나 보내야했던 수도사들.

20년이 지나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제 다시 그때와 같은 일을 하지 않겠다는 형제들을 산 사람들을 위한 방이 아니라 죽은 사람을 위한 방에 몰아 넣고 입구를 시멘트로 막아버렸던 그 일을 했던 강영호는 자신의 여행기 책을 통해 천산 수도원을 세상 밖으로 알려 속죄하고자 한다.

 

"세상의 권력은 그들의 구별된 공간인 천산을 침범하고 파괴하여 카타콤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침범하고 파괴하는 권력이 행사되는 이 세상이야말로 카타콤에 다름 아님을 그들의 구별된 삶과 특별한 죽음으로 증거했다. "

---346쪽---

 

 

정말 단순한 추리소설이라 여기고 들었던 책이 어찌나 가슴을 누르는지.

한정효의 감금을 두고 말한다.

그들은 그를 가둠으로서 감옥을 만들고자 했지만 그는 스스로가 나가기를 거부했으므로 수도원이 된 것이다.  

 

작가의 뛰어난 묘사 능력에 문장 하나하나 허술하게 읽을 수가 없다.

십여년을 준비했다는 작가의 말이 헛말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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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숭미에 살어리랏다 - 배반의 역사 수구의 로망
정운현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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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을 읽는데는 하루면 충분했건만 책에 대해 쓰는데는 이렇게 힘이든다.

책이 주는 무게 때문이다.

 

나는 안중근 의사의 무덤이 사후 10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비어 있다는 사실,

그의 시신이 묻힌 가묘는 이제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는 순국 직전 조국이 광북되면 자신의 유해를 조국으로 옮겨 묻어 달라 유언했다 한다.

--20쪽--

 

그는 조국을 위해 주저함 없이 목숨을 던졌다.

그러나 독립된지 60년이 넘었건만 그의 아주 작은 유언조차 지켜주지 못하는 조국은 도대체 무얼하고 있는가?

부끄럽지 아니한가?

부끄럽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라고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명시되어 있다.

임시정부 산하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하던 그 많던 젊은이들은 어디에 묻혔는지도 알길이 없으니 하물며 그 후손들은 어디서 무얼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백범,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을 테러리스트로 부르는 얼빠진 인간은 도대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독립군을 잡으러 다니던 만주군이 되기 위해 '진충보국' 혈서까지 바치고, 일본 육사에 입학 황군 소위 계급장까지 달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훗날 대통령으로 장기집권에, 그의 딸은 유신시대 퍼스트레이디로 활약하다 지금은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어 대통령 당선을 눈앞에 두었다.

그의 아들 박지만씨는 친일인명사전에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름이 들어가는 것을 금지시켜 달라는 '게재금지 가처분신청'을 했다.

이유는 부친이 '일본군'이 아닌 '만주군'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주군은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고 세운 만주국의 군인이며 당시의 만주지역 최고통치권자는 관동군 사령관이었으며 만주군은 이 관동군의 휘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만주국의 연호가 대동인데 최규하 전 대통령이 졸업한 대동학원의 대동이 바로 여기서 따온 것이란다. --180쪽~181쪽--

그의 가처분신청으로 인해 오히려 숨기고 싶은 그의 과거는 더 철저하게 드러나고 있으니 그는 과연 효자이긴 한가?

그의 가처분신청 직후 박정희 전 대통령 측으로 부터 암살 당했을 것이라 추측되는 장준하 선생의 아들이 공개편지를 보냈다.

거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지만 씨의 이름이 내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아버님의 의문사 이후 학업을 중단하고 낮에는 가게 점원으로 밤에는 포장마차에서 일을 하며 살아가던 시절.....1980년 5월을 훈련소에서 보내고 전방에서 사병 생활을 하던 때,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가 되었다는 지만씨.....싱가포르에서 마약중독자 상담원으로 일을 하던 당시에 지만씨가 마약중독으로 치료감호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통해서였습니다.......나는 지만씨의 아버지는 일황에게 충성을 바쳤던 일본군이었고, 내 아버지는 일제와 맞서 싸웠던 독립군이었다거나, 지만 씨의 아버지는 쿠테타로 정권을 장악한 독재자였고 내 아버지는 민주와 통일을 위해 목숨을 바친 민족주의자였다는, 또는 지만 씨의 아버지는 부정한 재산을 남겨 주었지만 내 아버지는 깨끗한 동전 한 닢 남겨준 것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185쪽~186쪽---

 

나는 이 편지가 이 책을 통해 작가가 기록하고 싶었고,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다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 장준하 선생의 아들이라서만이 이렇게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윤봉길의 후손, 안중근의 집안,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이름도 남기지 못한 수많은 젊은이들과 만주와 간도땅을 떠돌다가 고려인이 되었고, 조선족이 된 수많은 이들이라고 다른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없다.

 

이 책은 지면의 절반을 지금의 MB정부와 보수주의자들이 나서서 우상화하고 있는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백선엽을 위시한 만주군관학교를 통해 형성된 인맥들이 대한민국을 어떻게 장악했는지를 파헤치는데 할애했다.

우리가 궁금해 하던 내용이다.

어찌 그렇게들 반성이라곤 없이 떵떵거리며 권력을 누리며 살았는지 그리고 죽어서는 현충원에 묻힌 민족반역자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민주통합당의 대통령 후보인 문재인씨가 현충원에서 다른 묘역을 참배하지 않았다고 구설수를 만들고 싶어하는 언론들이 있다.

이런 보도를 한 동아일보의 사주 김성수는 징병과 학병을 찬양, 선전 선동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서 이사로 활동, 동생 김연수는 중추원참의, 만주국 명예총영사를 비롯한 친일단체 간부로 활약했다.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는 일제에 헌금은 물론 조선신궁봉찬회, 조선대아세아협회, 경성군사후원..... 다 언급하기도 어려울 만큼 많은 단체에서 간부로 활동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장지연의 친일행위가 인정되어 건국공로훈장이 박탈되자 조선일보의 고문이란 분이 이런 칼럼을 냈다.

'이 상의 명예가 사라졌기 때문에 상을 반납해야 하는지 고민이라는 내용이다.'

---108쪽--

이분이나 이런 내용을 칼럼이라고 싣는 조선일보는 민족보다 개인이 영달이 더 중요한 사람들이다.

 

그들을 위시한 세력들이 문재인씨 같은 사람들을 음해하는 이유는 지금의 친일, 숭미주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정권을 잡았을때 자신들의 과거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이렇게 친일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제목이 숭미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친일과 숭미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다 같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멀리갈 것 없이 MB를 보시라.

단적으로 이완용을 모두들 뼛속까지 친일파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을 보면 이완용은 일신의 영달에 유리한 쪽으로 수없이 변신한 배신의 귀재다.

중국(당시 청)의 힘이 셀 때는 친중,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가 득세할 때는 친러, 미국의 입김이 작용하자 친미, 일본이 득세하자 친일로.

 

우리 주위엔 아직도 너무나 많은 이완용이 득세하고 있단 생각이 든다.

 

얼마전 KBS에서 보도된 백선엽, 이승만 우상화 프로를 보면서 역사가 올바로 기록되지 않으면 어떤 비극이 발생할 지를 너무나 잘 보여주었단 생각이 들었다.

정훈현씨가 이 책을 쓴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부친과 관련한 질문에 박근혜씨가 자주 하는 말이있다.

'역사가 평가하게 두자'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고 평가를 하고 있다.

 

어렵지 않은 책이다.

현대사에 대해 관심있는 청소년이라면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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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장선하 옮김 / 책만드는집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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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노인과 바다가 두꺼운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처음 노인과 바다를 읽은 것은 고등학교 입시에 시달리던 때였다.

내가 세들어 살던 주인집 거실에는 멋진 장식용 책꽂이(벽 전체를 차지하는 책장이 아닌)가 있었다.

그 책꽂이엔 출판사는 기억나지 않지만 세계문학 전집이 꽂혀있었는데 얼마나 반짝반짝 새거였던지.

처음엔 어떤 책이 있나 제목을 훑어 보다가, 다음엔 슬쩍 몇 장 넘겨보기 시작한 것이 결국 전질의 대부분을 읽어버렸다.

그집에도 아들 둘, 딸 둘이 있었는데 나중에 주인 아저씨 말을 빌자면 아무도 읽지 않고 그저 장식용으로 꽂아 두나했는데 학생이 즐겁게 읽는것 같으니 다행이라 했다.

뭐 그 진심이야 손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었을지, 죽쒀서 개준다였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덕분에 참 잘 읽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열심히 읽었던 책들의 줄거리들은 대충 이러이러했지 하면서 기억이 나는데 왜 감명깊었던 대목이나 문장은 이렇게도 생각나는게 없을까?

 

그런데 40대가 되어 다시 읽게된 노인과 바다, 이번에는 다르다.

요즘 이 책을 가방에 넣고 다닌다.

벌써 두 번을 연거푸 읽고도 손에서 놓질 못하고 있다.

나이란 이런 것일까?

산티아고 노인처럼 나도 그와 같은 인생의 황혼무렵에 이 책을 읽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젊어서는 하룻밤을 꼬박 세운 팔씨름에서 챔피언을 차지할 만큼 힘이 넘치던 어부였던 산티아고.

이젠 늙어 노인이 된 그는 벌써 84일 째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다.

그런 그에겐 언제나 그를 믿고 따르는 친구가 있다.

다섯 살 때부터 노인에게서 고기 잡는 법을 배웠던 소년은 노인과 함께 양키스를 응원하고, 디마지오를 응원하며 노인이 결코 실패자가 아니라 지금은 다만 운이 나쁠 뿐이며 언제든 다시 옛날처럼 큰물고기를 잡아 올 것이라 믿어주는 든든한 친구이다.

 

노인은 친구가 준비해준 미끼를 들고 바다로 나간다.

그런 그에겐 오랫동안 고기를 잡지 못한데서 오는 불안감도 조급함도 없다.

그는 부표를 낚싯줄의 찌로 사용하고 모터보트 배를 몰며 바다를 남성으로 생각해 엘 마르라  부르는 젊은이들과 다르다.

싱싱한 진짜 물고기를 미끼로 쓰고, 낚싯줄과 작살과 방망이를 쓰는 노인에겐 바다가 라 마르이다. 여자바다.

그는 새들과 물고기들의 움직임을 읽는다.

그것은 오랜 어부생활에서 오는 습관이다. 삶의 경륜인 것이다.

그리고 그 판단은 틀리지 않았고, 드디어 자신의 배보다 더 큰 청새치를 낚는다.

물고기가 처음 미끼에 입질을 할 때도 노인은 서두르지 않는다.

미끼를 다 삼킬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린다.

다른 물고기가 낚시에 걸려도 낚시 줄을 잘라내는데 결코 주저하지 않는다.

욕심이 화를 자초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미끼를 문 청새치와의 밀고 당기는 싸움에서도 상대를 인정해준다.

'물고기야, 난 너를 사랑하고 존중한단다.'

그러면서도 바다의 방향을 읽고, 바닷물에 손을 넣어 물고기의 움직임과 속도로 물고기가 언제쯤 물밖으로 나올지를 가늠한다. 언제 끝날지 모를 이 싸움에 대비해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어떻게 체력을 아껴둘 것인지를 판단한다.

이제 청새치가 그의 작살에 꽂혔다.

돛을 펴고 무역풍에 몸을 맡겨 돌아간다.

그러나 청새치의 피냄새를 맡은 상어의 공격을 받는다.

노인은 상어를 물리치지만 결코 자신이 잡은 물고기가 멀쩡한 상태로 항에 닿을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노인은 결국 졌다는 것을 알았다. 

노인은 사흘만에 돌아왔으나 그에겐 아무것도 없다.

아니다.

배는 무사하고, 키도 조금만 손을 보면 다시 쓸 수 있고, 침대도 그대로 있다. 

아침이 되었을 때 노인을 위해 커피를 가지러 가면서 울어주는 소년도 있고, 그를 걱정해주는 마을 사람들도 그대로 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근사한 상어를 잡은 노인은 거센 바닷바람이 멎는 사흘쯤 후엔 소년과 다시 바다에 나갈 것이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20대에 이 소설을 읽었다면 청새치를 낚으면서 더 치열하게 힘겨루기 하지 않는 노인에 실망했을 것이다.

자신이 잡은 물고기를 공격하는 상어떼를 물리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하지 않는 노인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잡지 못했던 상어를 잡고도 선술집에서 거품물고 자랑하지 않는 것이 의아하고,

함께 낚인 다른 고기를 너무도 쉽게 포기해버리는 노인에 실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인도 팔씨름 챔피언을 지냈던 그때였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다는 오늘도, 내일도 나가야 한다.

그렇게 노인은 40이 되고, 50이 되었겠지.

노인은 내일도 바다에 나갈 것이고, 또 그다음 내일도 바다에 나갈 것이다.  

  

 

야구를 사랑했고, 사냥을 사랑했고, 쿠바의 바다와 낚시를 사랑했던 헤밍웨이.

그의 고독과 외로움이 산티아고의 것과 같았을까?

 

나도 지금보다 더 나이든 다음에 다시 노인과 바다를 읽게 되겠지.

그때는 또 어떤 느낌일까?

 

-- 헤밍웨이 사후 50년이 되는 해라 저작권에서 풀린다고 해서 많은 출판사에서 그의 작품이 해로이 출판되고 있다.

나는 출판사마다 다 비교해 볼 수는 없으니 그에 대해서는 뭐라 표현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 기회에 많은 이들이 좋은 책을 만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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