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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예쁜 것 - 그리운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
박완서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9월
평점 :
말기 암으로 죽어가는 환자에게 조차 웃음이 번지게 만들 만큼 예쁜 것은 무엇이었을까?
포대기 끝에 살짜기 삐져 나온 발그레한 아가의 발가락.
삶이 끝나가는 자락 끝에 새롭게 움트는 생명력이란 게 그런 것인가 보다.(83쪽)
우리 엄마한테도 이런 예쁜 게 있었더라면 그렇게 허망하게 삶을 버리지 않았을까?
피를 나눈 형제를 잃는 슬픔에 이어, 남편의 사업 실패, 어머니의 비극적인 죽음까지.
내가 그 혼란과 고통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올 수 있었던 힘은 내 뱃속에서 꼬물거리던 아이의 태동이었고 내 눈물을 닦아주던 아이의 조막만한 손이었다.
생명이란 것이 그런 것인가 보다.
6.25 전란의 와중에 빨갱이로 몰렸다가 반동으로 몰렸다가 하면서 도저히 인간 같지 않은 자들로부터 온갖 수모와 박해를 당하면서 언젠가는 저자들을 등장시켜 이 상황을 소설로 쓸것이란 예감만으로도 버티어 낼 수 있었다는 (21쪽) 노작가의 담담한 고백은 얼마나 솔직한지.
흐르는 강가에서 바람을 쐬면서 어린 손자가 뛰노는 모습과 젊은 아들과 사위가 강물에 물수제비를 뜨는 걸 구경했다. 그때는 보이는 모든 것이 왜 그리도 아름다웠던지. 젊은 내 새끼들의 옷깃과 검은 머리칼을 나부끼게 하는 바람조차도 어디 멀고 신비한 곳으로부터 그 애들이 특별히 아름답게 보이라고 불어온 특별한 바람처럼 느꼈으니까. 아마도 나는 그때 곧 세상을 하직할 남편의 눈으로 그 모든 것을 보았을 것이다.(79쪽)
남편과의 사별로 인한 그녀의 상처는
'시간이 나를 치유해준 것이다.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깨달은 소중한 체험이 있다면 그건 시간이 해결 못할 악운도 재앙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이야말로 신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라는 고백을 읽으면서 내게도 시간이 흐르면 어느 날엔가는 담담히 지금의 상처도 추억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위로해 본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얻은 위로이다.
박완서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늘 이분의 겸손함에 감탄하곤 했다.
자전적 소설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와 '그 산이 거기 있었네' 그 어디에도 잘 난척 거만떠는 대목을 찾을 수 없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80세 가까운 노작가쯤되면 어깨에 힘 좀 넣어도 될만하건만 초등학생의 편지에 조차 이렇게 진지하게 답변해주는 모습은 감동이다. (이런 노작가에게 그토록 도발적인 질문을 할 수 있었던 넌 누구냐, 부럽다.)
나의 세속적인 호기심 중의 하나가 박완서 작가와 박경리 작가, 공지영 씨와 신경숙 씨는 서로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작가가 80년대 부터 서로를 아낀 추억을 읽으면서 대작가로 존경 받는 이유를 알것 같다.
서로를 이렇게 존경해주다니.
이 책의 대부분의 글들이 작가가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에 쓴 것이다.
노년에도 태어나서 살았던 고향과 가족에 대한 애정은 식지 않는 모양이다.
작가의 글 곳곳에서 인용되었던 그리움이 이 작품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지갑 잊고 외출했다 겪은 혼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렇게 유명한 사람도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구나 싶은게, 마치 이웃집 할머니를 만난듯한 반가움에 활칵 생긴다. 거기에 더해 참 귀엽기까지 하니.
이젠 이걸로 끝이겠거니 했던 박완서 님의 책을 또 이렇게 시간이 흘러 만날 수 있는 기쁨이라니....
세상에 예쁜 책 한 권.
___ 한우리북까페의 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