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말
최강민 지음 / 작가와비평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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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이란 것이 얼마나 외롭고 고독한 일이었으면 책의 제목을 '고독한 말'이라고 붙였을까?

 

문학평론집이란 그 한 단어에 꽂혀 반갑고도 반가운 마음에 오랫만하고도 오랫만(한 십 년은 되지 않았을까?)에 펼쳐든 책이건만 내 마음이 깊숙하고도 아득한 저 아래로 툭하고 떨어진다.

 

프랑스 유학을 거치시고 서구 이론으로 무장한 채, 문학 평론이란 것은 자로고 엘리트들을 위한 언어로 써야 제맛인듯이 우리 문학을 평가해주시던  천재라 칭송받던 문학평론계의 거인 김현을 감히 비평하고, 그의 거룩한 계보를 잇고자하는 죽은 김현을 불러내에 평론계의 좌편향을 정리해주고자 고군분투 하시는 정과리를 감히 디스하는 젊은 평론가가 아직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 문학비평계가 죽지 않았다 기뻐해야 마땅하다.

 

내가 <마이너리그>를 읽고 나서 완전 반해버렸던 은희경은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에서는 어느덧 '뭔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의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새로운 옷을 입었다'고 추천사를 쓴 어느 작가의 말을 보면서 출판계의 상부상조를 강요하는 권력의 쓴맛의 원인이 이 책의 저자 최강민의 용어, '주례사 비평'이었던 모양이다.

 

공지영의 첫 르뽀작인 평택 쌍용자동차 사태를 다룬 <의자놀이>에 대한 비평은 이 책을 좀 더 많은 이들이 읽어주길 바라는 미끼 정도로 봐주는 센스는 갖자.

 

평론계의 거두 백낙청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김현에 대한 글이나 반체제 저항 시인으로 추앙받던 김지하가 노망난 우상으로 추락의 원인에 대한 그의 분석은 문학가의 삶이란 대체 어떠해야 하는가를 꼽씹게 된다.

 

고정일의 '불굴혼 박정희'는 굳이 이책에서 언급할 만큼의 가치도 없거늘 왜 굳이.....

(딱 인터넷 언론에 스쳐 지나가는 글 혹은 팟케스트 책 코너에서 언급 정도로 그치기에도 시간 낭비적인 가치의 정도? 그 작가와 그책이 그렇게 유명해?)

 

 

 

아직도 철저한 약자들의 삶을 담은 빈곤문학이 '체제 저항의 강도가 약하다고 빈곤의 절박함이 강렬하지 않다'고 쓴소리를 날릴 수 있고 그 원인이 작가들이 중산층의 계급적, 계층적 기반에 있음을 지적할 수 있을 정도의 관심과 애정을 가진 비평가가 있을까?

 

오늘의 문학평론가는 생계와 문학적 열정과 윤리 사이에서 끊임없이 번뇌할 수밖에 없는 불안정한 존재이다.

--81~82쪽--

 

 

생계를 택했다면 그 역시 주례사 비평을 생산하고 있거나 김현의 후예로 줄을 섰을 것이나 윤리와 문학적 열정을 버리지 못하고 외로움과 배고픔 속에서도 고독한 말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문학평론가 최강민의 네번째, 다섯번째 평론집을 기다려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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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 (양장)
배병삼 지음 / 사계절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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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도서관 초청강연회에 온 도서관 관장 님의 말씀에 의하면 요즘 인문학 열풍이라고 해야할지 고전 열풍이라고 해야할지 어린 초등학생들이 논어나 고전 문학 책를 빌리러 온다고, 너무 어렵지 않느냐고, 초등학생이 읽으면 좋을 재미난 책들도 아주 많다고 해도, 굳이 빌려 간다고 한다.

 

요즘 신동을 넘어, 영재라 불리는 아이들이 많다더니 너무 영특해서 이미 논어를 꽤뚫어 읽을 경지에 이른 것인지, 아니면 독서이력 시스템에 일찍부터 고전을 읽으면서 오래 전부터 준비된 인재로 자랐음을 증명하기 위한 증거로 남기려고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썩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대한민국의 평균적인 교육 과정을 거친 사람치고 논어와 공자를 모르는 이가 있을까?

그럼 과연 논어 속 공자의 말씀 중에 알고 있다 말할 수있고, 알고 있는 것이 있어 이를 실천한다 말할 수있는 것은 과연 얼마나 될까?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하랴!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즐겁지 아니하랴!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나지 않는다면 군자가 아니랴!"

 

 

'누구나 잘 알고 있지만, 누구도 잘 읽지 않는 책'이라고 비아냥대지 않았던가.

<논어>도 이런 정의에 딱 맞는 고전이다. 잘못된 관습, 누추한 전통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을 뿐, 누구도 그 속내를 알려고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다.

--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 2005년 서문에서--

 

나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심지어 공자를 죽이면 나라를 살릴 수 있다며 자극적인 언어를 쏟아내던 학계의 새로운 빛인지 새로운 오른쪽인지 교수가 펴낸 책을 읽으면서 그가 죽이면 나라를 살릴 수 있는 것이 공자인지, 유교인지, 주자학인지에 대해 긴가민가 하던 부끄러운 옛일이 있었음도 더불어 고백한다.   

 

이쯤이면 공자 님이 "니들이 공자를 알아?" 라며 한 큐를 날릴 만하다.

아니나 다를까,

 

"사이비 지식인 (鄕原)은 덕을 해치는 강도(賊)이다."

공자의 말씀이 어찌이리 딱 맞는지.

 

 

20대엔 공자 님 말씀은 유행 지난 쾌쾌묵은 옛것으로 폐기되어 마땅한 유물이라 생각했다.

30대엔 공자 님 말씀보다 내가 하는 말이 더 옳다 여기며 혹세무민하며 살았다.

40대가 되니 공자 님이 무겁고도 무섭다. (쪽 팔린다.)

 

 

춘추 시대는 사람이 눈앞의 사람을 창칼로 죽였다.

오늘날 자본주의 시대는, 사람은 뒤로 숨고 돈이 나서서 사람을 해친다. 도구가 달라지고 방법은 교묘해졌을지언정, 사람이 사람을 살상하는 짓은 다를 바 없다.

나는 오늘 ,논어를 읽는 까닭이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 2014년 서문에서--

 

 

공자의 길은 '그럼에도' 몸을 일으켜 비관적인 인간 세상으로 몸을 던지는 길이다. 문제를 사회 구조의 탓으로 돌리며 뒤로 물러나 조소하는 은둔의 길도 아니요. 고작 제 한 몸의 안락을 위해 이념과 지식을 파는 참여 일변도의 길도 아닌 그 사잇길, "안 될 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뚜벅뚜벅 (정의를) 걸어가는 길". 이것이 공자의 길이다. 여기서 공자의 눈물이 또 후두둑 떨어진다.

--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 266쪽--

 

나 역시 눈물이 후두둑 떨어진다.

부끄러움의 눈물이다.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니다.

 

사람의 길을 알고자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논어를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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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 멸치와 일기장의 비밀 - 남해 죽방렴 이야기 한국의 재발견 2
최은영 지음, 양상용 그림 / 개암나무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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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출판되었던 자연관찰이나 전통문화를 소재로하는 책, 어떠셨나요?

전 저학년 아이들이 보기엔 '너무 어렵고, 딱딱하고,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정작 읽어야 할 독자인 어린이들은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잘 읽으려고 하지 않는 문제가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요즘 이 분야의 책들이 참 많이 진화했습니다.

단순히 지식 전달만을 목적으로 책을 만들지 않고, 또래 친구들을 주인공으로 등장 시키는 창작동화 방식으로, 아이들이 좀더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어, 지식 전달과 감동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책들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어 참 반갑습니다.

 

저희 아이들은 국시꼬랭이 시리즈를 무척 좋아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전주 한지를 소재로 한 '한지에 피어난 꿈'에 이은 남해 죽방렴 이야기를 다룬 '미운 멸치와 일기장의 비밀'과 꿀벌을 소재로 한다는 '날아라, 꿀벌'로 이어질 개암나무의 한국의 재발견 시리즈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그나저나 멸치 계의 명품, 죽방 멸치를 미운 멸치라고 한 이유가 뭘까 궁금증이 마구마구 생깁니다.

책장을 넘겨 봅니다.

 

 

 

 

 

 

 

 

 

 

대도시 대전에서 살던 5학년 소녀 은수는 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할머니의 고향 마을 남해 지족리로 이사를 옵니다.

친구들과도 헤어져야하고, 돌아가신 엄마의 추억을 등 뒤로 하고 시골로 이사를 간다는 것이 은수는 못마땅합니다.

 

 

 

 

 

 

 

 

 

아빠는 앞으로 이곳에서 멸치잡이를 하는 어부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은수는 그것고 불만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아름다운 지족리도 정이 들지 않습니다.

 

 

 

 

 

 

 

 

 

할머니가 은수처럼 어린이였던 시절에 쓰던 어장막에서 의문의 일기 뭉치를 발견합니다.

그 일기장 속에는 은수처럼 외로웠던 일본인 소녀 미야코의 가슴아픈 사연을 만나게 됩니다.

죽방 멸치를 만든 조선인들에게 그 맛있는 죽방 멸치를 먹을 수 있도록 나누어 주다가 아버지에게 맞아 죽은 미야코와 지족리의 의리파 친구들을 통해 죽방렴 멸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된 은수.

 

 

 

 

 

 

 

 

 

 

 

상처 없이 싱싱한 멸치를 자연환경을 파괴 없이 안전한 먹거리로  만들어내는 죽방렴이 얼마나 멋진지.

 

은수도 이제 대전에 있는 친구들에게 죽방렴을 자랑하고 싶어집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욕심을 부려보고 싶습니다.

죽방렴을 표현하기에 동양화 기법의 그림은 참 잘 어울립니다.

그런데 전체적인 색감이 너무 어둡고 거칠다는 느낌이 듭니다.

 

전학과 시골 어촌으로 이사를 온 것에 대한 불만 가득한 은수의 감정이 드러나는 앞부분의 어두운 색감은 나름 설득력이 있지만 죽방렴에 대한 은수의 마음이 달라지는 결말 부분에서는 밝은 색을 사용했더라면 책을 덮는 독자들의 마음도 은수의 마음처럼 밝아질 수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____개암나무 출판사의 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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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수 아저씨 - 걸어다니는 이야기 보따리
김선아 글, 정문주 그림, 안대회 바탕글.해설 / 장영(황제펭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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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귀하던 옛시절, 사람들은 어떻게 홍길동이며, 심청 이야기며, 춘향의 이야기를 듣고 전했을까요?

물론 이 중에는 판소리를 통해 전해진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즉 구전되던 이야기들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직업인이 있었는데 바로 그들이 전기수입니다.

 

그들이 어찌나 맛깔나게 이야기를 읽어주는지, 그들의 한마디한마디에 청중들은 웃고, 울었다고 하니, 어쩌면 일인극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우리의 전래동화를 새롭게 그려 출판하고 있는 장영출판사에서 조선시대 걸어다니는 이야기 보따리 전기수 아저씨를 아이들 눈높이에 맞춘 그림책으로 펴냈습니다.


 

 

 

장날을 맞아 장터 구경을 나선 영복은 전기수 아저씨가 풀어놓은 이야기 보따리에 넋이 빼앗깁니다.

어찌나 심청의 이야기를  맛깔나게 풀어놓던지.


 

 

 

아이고 이를 어째, 치마를 뒤집어쓰고 임당수 바다로 풍덩하고 심청이 뛰어드는데, 심청은 보이지 않고 사라지고 까지 들었는데.

전기수 아저씨는 심청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고 싶으면 다음 날 종로에 있는 종루로 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버립니다.

 

동네로 돌아온 영복은 전기수 아저씨로 부터 들은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들려주지요.

그런데, 아이들이 심청이 임당수에서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가르쳐 달라는데, 영복인들 더는 아는게 없으니 이일을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요?  결국 영복도 전기수 아저씨가 장터 사람들에게 했던 고대로 말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심청이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거든 내일 이 자리로 다시 와!"

영복이 친구 춘삼이는 심청이 살았는지 죽었는지가 너무 궁금해 잠을 잘 수가 없다며 춘삼이를 따라 다니며 조릅니다.

아, 답답한지고. 영복이도 그게 제일 궁금하다니까요.

 

과연 영복이는 심청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전기수 아저씨로 부터 이야기 듣게 될까요?

 

저는 뒷이야기가 궁금해 휘엉청 밝은 달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기어이 영복에게 자기한테만 이야기해  달라고 돌담 너머로 조르는 춘삼을 보고 박장대소 했습니다.

그래요. 이야기란 것은 이런 매력이 있습니다.

특히나 누군가가 감칠맛 나게 읊어줄 때는 말입니다.

저희 막둥이도 마찬가지 입니다.

자기가 읽으면 정말 시시하고 재미가 없는데, 엄마가 읽어주면 '어떻게나 재미가 있는지' 라며 자꾸자꾸 읽어 달라고 조릅니다.

 

조선 시대 실제했던 직업인 전기수에 대한 이야기 이기도 하지만 저는 '이야기가 가진 매력 또는 힘'을 그린 책으로 읽었습니다.

장영 출판사 특유의 시각적으로 편안한 색체와 등장 인물들의 익살스런 표정의 그림이 참 유쾌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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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니피와 스내피의 모험 지양어린이의 세계 명작 그림책 35
완다 가그 글.그림, 정경임 옮김 / 지양어린이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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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생쥐가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1963년 일본 작가 나카가와 리에코의 구리와 구라 보다 먼저 나온 생쥐들 이야기가 있었네요.

그 주인공은 바로 현대적 그림책의 시작으로 꼽히는 <백만 마리의 고양이>의 작가 완다 가그의 <스니피와 스내피의 모험> 속 주인공 '스니피와 스내피' 오누이 입니다.

 

 

 

 

 

이 책의 소개에 앞서 이 책을 만든 작가 완다 가그에 대해 조금 적어보겠습니다.

 

 

 

 

 

 

 

 

 

<완다 가그, 1893~1945년, 미국, 사진은 알라딘에서 퍼왔습니다>

 

 

그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그림책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유럽을 중심으로 먼저 발전해왔습니다.

주로 종교적인 내용 전달을 위한 도구로 이용되어 오다가 차츰 아이들의 학습을 위한 도구로 발전해왔다고 합니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아동 문학이라는 개념으로서의 그림책은 1900년대가 되면서 본격적인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러던 것이 1,2차 세계대전이라는 극심한 혼란기를 겪으면서 그 무대를 유럽 사회 중심에서 미국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유럽의 정치적 혼란과는 반대로 정치적 안정과, 경제 부흥을 맞은 미국의 경제적인 상황, 유럽의 예술인과 사상가들의 미국으로의 이주로 인한 인적 요소가 맞아 떨어지면서 그림책에 있어 아메리카 시대가 열립니다.

 

바로 그때 나타난 작가가 완다 가그로 그녀의 <백만마리 고양이>를 현대적 그림책의 시작으로 봅니다.

그 이유로 우선, 이 책에 이르러 본격적인 스토리 전달을 위한 일러스트레이션이 전개 된 점, 일부의 특정 계층을 대상으로 한 책이 아니라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대량 판매된 점, 그리고 무엇보다 문학적 완성도와 예술적인 면에서 인정을 받은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림책의 세계, 신명호, 주니어김영사, 215~217쪽 참조>

 

 

1928년 <백만 마리 고양이>에 이어 1931년 만들어진 <스니피와 스내피의 모험(Snippy and Snappy)>과 같은 완다 가그의 작품에서는 그녀 부모님의 고향인 보헤미안의 향수가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칼라를 쓰지 않고 흑백만을 사용한 간결한 선과 면 중심의 그림(스니피와 스내피의 모험은 백만 마리의 고양이와 마찬가지로 원래는 흑백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출판 된 책은 칼라를 입혔습니다. 저는 그 의도를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완다 가그가 굳이 칼라가 아니라 흑백의 그림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있는데, 그 느낌이 아주 많이 반감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완다 가그는 이 검은 색을 표현하기 위해 아주 많은 노력을 했다고 전하거든요.), 이때의  검은 색은 차갑지 않고 오히려 따뜻하며 부드럽습니다. 선은 거칠거나 날카롭지 않고 둥글둥글하면서도 책속의 스니피와 스내피가 털실을 쫓아 가는 길을 따라가보면 길과 언덕이 구불구불한 것이 오히려 투박하다고 까지 느껴집니다. 흔히 고향의 느낌 혹은 할머니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또하나 특이 한 점은 이책의 글씨체는 기계화된 활자체를 택했지만 원래의 완다 가그의 책은 그녀의 동생 하워드의 손글씨를 그대로 사용해서 만들 정도로 완다 가그가 신경을 썼다고 합니다.

아쉽게도 우리나라에서 출판 된 책에서는 볼 수가 없네요.

 

 

저희 세 아이들이 <백만 마리 고양이>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사실 저는 그게 의아했어요.

그림이나 색이 화려하지 않고 낡은듯하고, 이야기의 구조가 변화무쌍하거나, 등장인물이 흥미로운 것도 아니며, 글씨체는 직접 손으로 쓴 듯이 성의가 없고 유행이 지난듯하고, 그런데 아이들은 바로 그것 때문에 좋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완다 가그의 그림책에서 어쩌면 할머니, 할아버지로 부터 옛날 이야기를 듣는듯한 느낌을 받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지양어린이에서 출판된 <스니피와 스내피의 모험>은 전반부에선 우리말로, 후반부에선 영어 원본으로 된 한 권이 두 권인 책으로 만날 수 있어 독자로선 큰 행운입니다.

아쉬운 점이라면 저는 영어를 잘 모르지만 원작에서의 시적인 글을 살리지 못한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스니피와 스내피의 모험>을 통해 완다 가그의 또하나의 작품을 만나다는 의미 하나 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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