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연필을 씁니다 - 젊은 창작자들의 연필 예찬
태재 외 지음 / 자그마치북스 / 2019년 12월
평점 :
절판


내 나이쯤 되면 대부분 펜이나 샤프를 쓰지 연필을 쓰는 사람은 흔치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종이 위에 연필을 쓸 때의 사각사각함, 연필을 깎을 때의 서걱서걱함, 손에 묻어나는 나무 냄새, 지울 수 있다는 유연함 등 연필의 매력에 빠져 여전히 펜과 샤프를 쓰는 것만큼 연필을 쓰고 있다.

이 책 <여전히 연필을 씁니다>는 제목처럼 여전히 연필을 쓰고 있으며 연필이 삶의 일부분이 된 9명의 젊은 창작자들이 쓴 글을 담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연필을 좋아하지만 연필을 주제로 한 아무개의 책이었다면 다 읽을 때까지 손에 들고 있었을 거라고 장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연필과 창작자라는 조합은 서로의 매력을 수십 배쯤은 커지게 했고, 그래서 내가 관심을 가지게 하고, 글을 읽는 것을 더 즐겁게 만들었다.



저자들은 연필로 인해 생긴 굳은살을 이야기하고, 그림을 그리기에 완벽한 연필을 찾는 여정을, 엄마가 연필로 쓴 편지를, 수집에 대한 사유를 이야기한다.

각자 연필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교정을 보며 필담을 하기도 하고, 책에 밑줄을 긋고, 필사를 하고, 연필을 모아 가게를 열기도 했다.


전 카피라이터이자 시인이자 에세이스트, 만화가, 매거진 에디터, 공간 디렉터, 편집자, 에세이스트, 유튜브 크리에이터, 손글씨 크리에이터, 문구 편집숍 운영자(두 명이지만 여기에서는 하나로 묶는다) 총 9명의 창작자의 글에는 각자의 직업이 반영되었지만 글에 드러나는 연필이 가지는 특징과 연필에 대한 생각은 신기하게도 비슷한 부분이 많았는데, 그것은 나의 생각과도 같아서 공감을 수없이 불러일으켰다.

어쩌면 우리 대부분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는 연필을 사용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사프를 사용하기 시작하고, 펜을 사용하는 게 더 익숙해지는, 같은 길을 걸어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서관 책 귀퉁이를 접는 일은 저자에게는 이렇게 글로 써 책으로 출판할 수 있는 기억일지몰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책 읽는 즐거움을 반감시킨다는 걸 기억해주길. 나 같은 사람에게 말이다)


저자들의 연필과 관련된 기억들은 나의 기억과 닮아 향수를 불러일으켰는데, 어렸을 적 학교 가기 전날 밤에 연필을 깍아 필통에 넣는 일과나 연필을 우르르 들고 가면 아버지가 칼로 하나하나 깍아 주시던 희미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만화가 재수 씨가 입시 미술을 하며 4B연필을 깎은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내가 연필깍이가 아닌 칼로 연필을 하나하나 깎는 재미를 제대로 느끼게 된 계기였던 미술 시간이 떠올랐다.

미술 연필은 연필깎이가 아닌 칼을 사용해서 깎아야만 했는데, 나는 그게 귀찮지 않고 재미있었다.


<여전히 연필을 씁니다>에는 연필에 대한 애정 어린 사색과 경험담뿐만이 아니라 연필을 소재로 쓴 짧은 소설도 수록되었고, 연필에 대해 더 알아갈 수 있는 정보성 글도 있다.

9명의 글 중 내가 특히 재미있게 읽은 글은 가장 먼저 등장하는 작가 태재 씨의 글이다.

카피깨나 썼던 이력을 가져서인지 재치 있는 문장들에 연필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이렇게 계속 연필 깎는 일을 핑계로 쉬고 오는 나 녀석, 이래 봬도 엄연한 작가로서 이 지면을 받았다. 누군가 내 핑계에 인상을 쓰며 "너 이 녀석, 여러 자루를 미리 깎아 놓으면 안 되는 거야?" 하고 묻는다고 해도 나는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내가 설마 그 짓을 안 해 봤겠어요? 그치만 그러면 쉬지 않고 일해야 한다고요!"


p.17


꿈은 '저런 애도 글로 밥 벌어서 먹고 사는데...'에서 '저런애'를 맡아 모두에게 힘이 되는 것이라는 재미있는 문장으로 소개되는 매거진 에디터 김혜원 씨의, 연필 때문에 잘 보이고 싶은 사람에게 발끈했던 일화나 일기가 아닌 자신의 모든 글에는 약간의 거짓이 섞여 있다고 솔직하게 쓴 글도 귀여웠지만, 다른 저자의 글과는 달리 글에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틀린 부분이 몇 군데 보이는 게 아쉬웠다.

(의도한 건 아닌데 저자의 글을 그대로 옮겨 온 아래 발췌문만 봐도 알 수 있다)

 혹시나 정말로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봐 짧게 설명하자면.... 내가 일기를 꾸준히 쓸 수 있었던 비결은, '일기장에 연필로 쓰는 이야기'만이 진짜이기 때문이다. 그 외는 다 가짜다. 회사에서 쓰는 기사, (나의 본업은 잡지 에디터다) 업무상 작성한 메일, 연애 편지,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혼잣말, 친구에게 보내는 카카오톡 메시지까지. 내가 쓰는 모든 글에는 약간의 거짓이 섞여 있다. 일기를 쓰지 않는다면 나는 완전히 거짓말쟁이가 되 버릴 것이다.


p.64

9년간 편집자로 일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김은경 씨의 글을 읽다 보니 편집자의 고충을 알게 되어서 이걸 서평에 언급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도 했지만, 아쉬웠던 부분은 솔직하게 적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역시 언급한다.

저자의 말처럼 다른 사람의 오류를 지적하는 일은 미안한 일이기도 하다.

 옮음만이 존재해야 하는 사각 교정지 내에서 연필은 의외의 숨 쉴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 무언가를 적어 놓았더라도 언제든 철회하면 그만이었고 지우개로 박박 지우면 흔적이 남지 않았다. 틀릴 자유, 이 얇고 흐린 연필에는 실수를 넉넉하게 품어 주는 여유가 있었다.


p.95

그리고 작가 태재 씨의 글을 이 책의 가장 앞에 배치한 것이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처럼, 편집숍 흑심의 글을 가장 마지막에 배치한 것 또한 탁월한 선택이었다.

흑심은 연필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꽤 알려졌다고 생각하는 연필 가게인데, 수록된 사진들과 함께 글을 읽으면 책을 덮자마자 당장 가게로 달려가 연필을 사고 싶어진다.




연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예쁜 노란 빛깔로 겉과 속 모두 물든 <여전히 연필을 씁니다>는 연필에 애정이 있는 사람들은 공감하며 읽고, 연필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도 추억을 회상하고 연필과 사랑에 빠질게 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리뷰는 서평단으로 지원하여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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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왕국, 또 하나의 이야기 디즈니 오리지널 노블
젠 캘로니타 지음, 성세희 옮김 / 라곰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대한민국에 겨울이 찾아오고 많은 사람들이 기다려온 영화 <겨울왕국2>가 개봉하면서 다시 한번 겨울왕국 열풍이 불고 있다.

이때 우리에게 함께 찾아온 책들도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 책 <겨울왕국, 또 하나의 이야기>이다.



이 책이 다른 책들과 다른 점은 영화 <겨울왕국>과는 다른 이야기라는 것에 있다.

우리는 서사가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즉 영화나 소설 같은 것을 보거나 읽으며 만약 이랬다면 (What if...)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보곤 한다.

그런 생각은 팬픽션(팬픽)으로 탄생하기도 하는데, 이 소설은 영화 <겨울왕국>에서 엘사와 안나가 어렸을 때 트롤 파비 할아범이 안나에게서 엘사의 마법과 같은 능력에 대한 기억을 지웠던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둘 모두에게 엘사의 능력에 대한 기억은 물론이고 둘이 자매라는 기억도 사라져 버린다면 하고 상상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이 소설은 팬픽이 아니라 엄연한 디즈니 오리지널 노블로, 디즈니에서 공인한 겨울왕국의 또 다른 이야기이니 팬들에게는 의미가 남다르다!



나는 영화 <겨울왕국2>는 보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겨울왕국>은 보고 이 소설을 읽기를 추천한다.

<겨울왕국> 영화 속 장면이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영화를 봐야 더 수월하게 그리고 재미있게 소설을 읽을 수 있다.

이 말은 <겨울왕국> 영화 스틸 사진이 곳곳에 쓰였다는 것뿐만 아니라 영화와는 다른 이야기임에도 작가가 영화 속 장면을 잘 활용해서 독자가 소설을 읽으면 저절로 머릿속에 영상이 재생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엘사는 아렌델의 왕국에서 왕과 왕비와 함께 외동딸로 자라고 안나는 아렌델이 내려다보이는 마을 하몽에서 빵집을 운영하는 부부 토말리와 요한의 양녀로 자라는데, 왕 아그나르와 왕비 이두나 그리고 왕비 이두나의 오랜 친구 토말리와 토말리의 남편 요한은 엘사와 안나에게 자매가 있다는 사실, 더불어 안나에게는 안나가 공주라는 사실을 비밀로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왕과 왕비는 배를 타고 2주간 외교 여행을 떠나게 되어 엘사 혼자 궁에 남게 되는데, 엘사가 "꼭 가셔야 해요?" 하고 묻는 장면은 영화 속 장면을 그대로 빼다 박은 듯했다.

그리고 영화를 본 나는 그렇게 떠난 왕과 왕비가 실종되어 돌어오지 못할 것을 아니 더욱 슬픔에 목이 멨다.


엘사에게는 이제 영화에서보다 더한 상황이 됐다.

안나에 대한 기억이 없으니 엘사에게는 가족이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고 완전히 혼자가 된 것이나 다름 없으니까.

게다가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마법 능력까지 발동되어 더욱 당황스러운 상황에 처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안나 대신 올라프가 엘사 곁에 있게 된다.


아니, 네가 왜 거기에서 나와? 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이에 대해 설명하자면, 책 띠지의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다시 만나!"라는 말은 엘사와 안나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겨울왕국>의 등장인물들, 엘사, 안나, 올라프, 크리스토프, 스벤 그리고 (별로 반갑지 않은 둘인) 한스와 위즐튼 공작까지, 다른 방식으로, 약간을 달라진 관계이긴 하지만 모두 만나게 되니까.

여기에서는 왕과 왕비의 추도식을 앞두었을 때, 엘사가 부모를 잃은 슬픔과 마법 능력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희미한 기억에 남은 사랑의 느낌, 안나와 눈사람을 만들던 것을 떠올리며 올라프를 만들게 되었고, 올라프는 이후 엘사의 비밀스러운 친구가 되어 함께 지내게 된 것이다.

엘사와 올라프는 희미한 기억과 흔적을 바탕으로 안나를 찾지만 몇 년 동안 진전이 없었다.

그러다 엘사의 대관식을 바로 앞두고 엘사와 올라프는 아버지인 왕 아그나르가 엘사에게 남겼던 상자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는데...



원작을 바탕으로 해서 쓴 다른 이야기는 등장인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이야기 전개에 억지로 맞추려고 하거나, 작가의 입맛에 맞추려는 경향 때문에 원작 캐릭터가 붕괴되어 괴리감이 느껴지거나 이야기 전개가 급작스럽고 어색할 떄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영화와 다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모습이 영화 속에서 보여준 것을 뺴다 박았으며 설득력 있는 전개와 영화 속 장면을 제대로 살린 짜임새에, 어색함을 느끼기는커녕 정신 차리고 보면 페이지가 훌쩍 넘어가 있는 그런 소설이다.

역자 이름도 익숙해서 보니<겨울왕국2 아트북>을 비롯하여 디즈니 아트북을 몇 권 번역한 번역가였기에 번역가 선정에도 신경을 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때문에 (크리스마스 이브에 말하기에는 조금 늦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이 책은 <겨울왕국>을 좋아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할 크리스마스 선물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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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를 알면 역사가 보인다 - 그림으로 보는 세계 신화 보물전
최희성 엮음 / 아이템비즈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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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신화를 알면 역사가 보인다고? 신화는 허구적인 옛날이야기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신화를 아는 사람들은 살면서 그 허구적 이야기인 신화가 과거에도 현재에도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몇 번이나 느껴보았을 것이다.

신화에는 옛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이 담겨있으며, 옛날부터 지금까지 종교, 문화, 예술 분야는 물론이고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생각에도 영향을 주었다.



폴로네시아 문명의 신화이자 폴리네시아 신화에 기반을 두고 있는, 영웅이자 악동인 마우이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마우이는 태어났을 때 어머니에게 버림받아 바다의 신 랑기에게서 키워졌다.

하지만 성인이 된 이후에 가장 먼저 자신의 가족을 찾았다고 하는데, 마오리족은 신원이 불분명하면 재능이 뛰어나도 성공하지 못한다는 불문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원이 분명하지 않으면 재능이 있어도 성공하지 못한다'는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이 책은 한국인에게 한국 신화보다 더 친숙할 그리스 로마 신화부터 내가 흥미로워 하는 이집트 신화와 수많은 신들이 있는 것으로 유명한 인도 신화, 마블 영화 시리즈 이후 자주 보이는 북유럽 신화뿐만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문명, 페르시아 문명, 중국 문명, 헤브리아 문명, 동유럽 / 슬라브 문명, 아메리카 문명, 아시아 문명, 아프리카 문명, 켈트 문명, 그리고 내가 디즈니 영화 <모아나>를 보고 관심을 갖게 된 폴로네시아 문명의 신화까지, 5대양 6대주 전 세계 곳곳의 신화를 담았다.


이렇게 수많은 신화를 575여 페이지에 담았기 때문에 각 신화의 분량이 많지는 않지만 (인도 문명 신화의 분량이 40페이지 정도다) 다양한 신화의 주요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나는 신화를 좋아하기 때문에 메이저 신화부터 마이너한 신화까지 재미있게 읽어볼 수 있어서 좋았는데, 특히 앞서 말했듯 디즈니 영화 <모아나>를 인상 깊게 보았기 때문에 17페이지 분량인 폴로네시아 문명의 신화가 특히 반가웠다!



이 책으로 <모아나>에서 노래를 부르며 간략히 요약해서 보여준 마우이의 활약들을 읽을 수 있었고, 화와이 신화 속 화산의 여신 펠레는 영화 속 테 카와 테 피티를 떠올리게 했다.

폴로네시아 문명의 신화를 알게 되니 태평양 군도의 폴리네시아 신화와 문화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기 위해 견학을 하고 자문단을 만드는 제작진의 노력이 빛을 발했다는 걸 알 수 있었고, 영화의 모태가 된 신화에 대해 더 알아가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리고 신화와 관련된 여러 사진과 그림이 수록되어 있어 보는 재미를 더해줬다.

다양한 문명의 신화들은 저마다의 개성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유사점을 통해 인류 공통의 생각을 발견하는 것도 신화를 읽는 즐거움 중 하나다.

대표적으로 홍수 신화가 있는데, 홍수 신화들은 상당히 유사해서 말을 안 하면 같은 문명의 신화로 알았을지도 모른다.

알려지기로는 노아의 방주가 더 알려졌지만 메소포타미아의 홍수 신화가 가장 오래되었다는 흥미를 끌 만하다.



다양한 신화를 읽으며 재미는 물론이고 세계가 확장되는 것을 느꼈다.

신화를 읽었을 뿐인데 그동안 보고 들었던 예술과 문화,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신화를 알면 역사만 보이는 게 아니라 모든 걸 더 깊고 넓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에는 아쉬운 점이 있는데, 위처럼 상태가 좋지 않은 그림이나 사진 또한 수록되었다는 것이다.

책의 부제가 '그림으로 보는 세계 신화 보물전'인 만큼 그림과 사진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도 마치 이미지 파일이 깨져서 픽셀이 두드러지는 듯하거나 흐릿한 그림과 사진이 일부 있었다.

앞으로 그림과 사진을 수록한 책을 만들 때 출판사 측에서 인쇄 상태를 꼼꼼하게 확인한다면 완성도 높은 책이 만들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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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 주기율표 - 교과서 개념에 밝아지는 배경지식 이야기
제임스 M. 러셀 지음, 고은주 옮김 / 키출판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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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올해로 150주년을 맞이한, 알록달록한 칸에 원소 이름과 번호가 적혀서 나열된 원소 주기율표는 지적인 매력이 있다.

그래서 평소에 굿즈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던 나도 온라인 서점에서 원서 주기율표를 사용해서 흔히 굿즈라고 부르는 MD를 이것저것 만든 것을 봤을 때는 눈이 절로 갔다.

하지만 학창시절에는 외워야 할 거리를 늘리는 원소가 싫었는데, 지금은 원소들에 대해 외워야 할 필요가 없으니 마음 편하게 원소의 세계를 즐길 수 있었다.

제목만 보면 큼직하고 두꺼울 것 같지만, 실제로 손에 쥐어보면 세로 길이가 한 뼘도 되지 않아 가방에 넣고 다니며 틈틈이 읽기에도 괜찮은 책이다.



서문에서는 원소 주기율표를 처음 만든 러시아 화학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가 어떻게 원소 주기율표를 만들게 되었는지, 원소 나열은 어떤 기준으로 했는지, 원소 주기율표가 어떻게 보완되었는지 등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원소 주기율표 이미지만 좋아했지 누가 만들었는지, 왜 이름이 원소 '주기율'표인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1869년 처음 원소 주기율표를 만든 드미트리 멘델레예프가 원소를 재배열하고 원소 주기율표를 보완했고, 1913년에는 헨리 모즐리의 연구 결과로 원소가 재배열 되었는데, 드미트리 멘델레예프가 첫 번째 주기율표를 만들었을 때 비슷한 성질을 한 원소가 '주기(period)'를 갖고 배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표가 원서 주기율표라고 이름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드미트리 멘델레예프가 재배열한 원소 주기율표나 헨리 모즐리의 연구 결과 때문에 재배열된 원소 주기율표나 중간에 빈칸들이 있었는데, 그게 당시에는 이상해 보였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고 새로운 원소가 발견되면서 빈칸이 알맞게 채워졌다는 것이다.

원소 주기율표는 발견되지 않은 원소를 예측하고 원자에 대해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본문은 원자번호 1번 수소부터 94번 플루토늄까지는 각 원자를 소개하는 페이지 앞부분에 한눈에 보기 좋게 원자 번호, 계열, 색, 녹는점과 끓는점, 발견된 해가 표로 정리되어 있으며, 각 2-3페이지를 할애해서 해당 원소가 어떻게 발견되었는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어디에 사용되는지, 간헐적으로는 원소와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를 간결하게 알려준다.

예외적으로 원자 번호 57번부터 71번까지인 란타넘족 원소와 95번 이후의 원소는 훨씬 간소화되어 수록되었다.

1번부터 118번까지의 원소가 모두 수록된 만큼, 수소, 헬륨, 질소, 산소, 마그네슘, 칼슘, 철 등 그동안 여러 번 듣고 보았던 원소부터 포타슘, 이트륨, 가돌리늄, 탄탈럼, 비스무트처럼, 처음 보는 원소까지 모두 만나볼 수 있었다.

쿵쿵따를 할 때 뭔지도 모르면서 타음 타자를 보내버리는 끝내기 단어로 자주 쓰였던 이리듐이나 카드뮴이 무엇인지도 이번에서야 알게 됐다.

이리듐과 카드뮴 외에도 슘, 늄, 륨, 븀, 듐, 뮴으로 끝나는 이름의 원소가 많아서 쿵쿵따 할 때 유용하겠다는 웃긴 생각도 했다.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원소는 마리 퀴리가 발견한 라듐이었다.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라듐은 20세기 초 시계 눈금판의 야광 페인트에 사용되었고, 라듐 공장에서 일하던 여성들이 암에 걸려서 소송을 하기도 했다.

이 산업재해 이야기는 <라듐 걸스>라는 책소개를 통해 알게 되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다시 만났다.

마리 퀴리도 라듐 때문에 사망했을 거라는 얘기가 있다.

마리 퀴리가 남긴 노트와 논문은 납 상자 안에 보관되어 방사선 방호를 한 상태에서만 볼 수 있다고, 심지어 주방에 있던 요리책도 여전히 방사선을 방출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잘 알지 못하는 물질이 가지는 위험성을 알려주는 동시에 흥미를 가지게 한다.



이런 책이니 마지막에 있는 색인은 특히 더 도움이 되었다.

궁금한 원소가 있을 때는 물론이고 원소에 대한 이야기 일부만 기억이 나는데 그 원소가 무엇인지 잘 모를 때도 색인을 사용하면 됐다.

예를 들어 마리 퀴리와 관련된 원소가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을 때는 색인에서 '마리 퀴리'를 찾으면 222, 229, 231, 233페이지를 보면 된다고 알려준다.

이전에는 원소 주기율표의 이미지만 좋아했는데 이 책을 읽으며 원소 주기율표에 대해 알게 되고 원소 주기율표 속 원소들을 모두 만나면서 원소 주기율표가 더 좋아졌다.


저번에 "너는 베릴륨(Be), 금(Au), 타이타늄(Ti)으로 가득 차(Full) 있을 거야. 왜냐하면 Beautiful 하니까!"라는 신박한 주접 댓글을 본 적이 있는데, 나도 그런 문장을 써보고 싶었다.

나의 주접력이 미약하여 주접을 떨 수 있는 단어는 아니지만, 인간(Ingan)은 인듐(In), 갈륨(Ga), 질소(N)로 만들어진 거 아니냐는 이상한 개그를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이번에 원소에 대해 너무 많이 읽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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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삶
마르타 바탈랴 지음, 김정아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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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미국에서 살고 있지만 브라질에서 태어나고 자란 작가가 쓴 소설이어서인지 이야기의 배경은 수십 년 전의 브라질, 작가의 할머니 세대 시절의 브라질이다.

이 책에는 여러 여자들의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작가는 이 책을 '무언가가 됐을 수도 있는 여성, 에우리지시 구스망에 대한 이야기 (p.51)'라고 했으니 거기에 집중하도록 하겠다.



소설은 에우리지시가 안테노르와 결혼하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시작부터 난관이다.

첫날밤, 침대보에 얼룩이 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에우리지시는 남편이 된 안테노르로부터 '걸레 같은 년'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 일로 결혼이 깨지지는 않았지만 오해라는 에우리지시의 말을 안테노르는 믿지 않았고, 이후 결혼생활을 하면서 에우리지시는 가끔 위스키에 취한 안테노르로부터 그날의 일을 상기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에우리지시가 생각하기에 남편 안테노르는 좋은 남편이었다.

까다롭기는 했지만 중앙은행에 다니며 돈도 잘 벌어오고, 유흥을 즐기거나 손찌검을 하지도 낳으며, 슬하에 있는 자녀들에게도 잘 해줬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나 현실에서나, 유흥을 하지 않고, 손찌검을 하지 않고, 자녀들에게 잘해주는 것은 배우자로서, 부모로서 당연한 일인데도 이게 다른 단점을 덮을 만큼 장점이 되는 세상이라니 씁쓸해졌다.


에우리지시는 요리에 소질이 있었다.

이모의 요리책을 보고 요리를 하던 에우리지시는 요리법을 연구해서 문구점에서 신중하게 고른 노트를 채워 요리책을 출간할 꿈을 꾸게 되었다.

하지만 남편 안테노르는 주부가 출간한 책을 누가 보겠느냐며 비웃었고, 에우리지시는 자신의 요리법으로 가득한 노트를 쓰레기통에 버려버렸다.

그리고 새벽에 다시 쓰레기통을 뒤져 더러워진 노트를 닦아 책장 뒤에 숨겨놓는다.


에우리지시는 또 다른 프로젝트를 찾았다.

미용실에서 잡지를 보며 옷 만드는 것에 대해 읽었고, 그 뒤로 재봉틀을 사서 옷 만드는 일에 열중하게 된 것이다.

얼마나 열심히였는지, 살이 다 빠지고 나중에는 잡지에 나온 옷이면 다 만들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은 다 만들어 더 이상 만들 것이 없게 되자, 에우리지시는 동네 여자들에게 옷을 주문받아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이것도 남편 안테노르가 알게되자 반대해서 그만두게 되었는데, 이후 에우리지시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반송장이 되어 지낸다.

남편 안테노르는 좋은 아내는 남편이 편안하나 마음으로 일할 수 있게 기운을 북돋아주고 아이를 돌봐야 하며, 남편과 자식들 외에는 쳐다도 보지 말아야 한다고 소리쳤다.

요리책 출간에 이어 옷 만드는 일까지 그만두게 되었으니 얼마나 힘이 빠지고 무기력해졌겠는가?


이쯤되면 왜 에우리지시는 남편 안테노르의 말에 제대로 반박하지도 않고 따르는 걸까 답답할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옛날에 언니 기다가 가출한 뒤로 에우리지시는 착한 딸이 되기로, 반항하지 않기로 다짐했던 게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우리는 에우리지시가 능력이 많다는 걸, 에우리지시의 인생이 바뀌었을 기회가 많았다는 걸 알 수 있다.

모두에게 인정받은 자신만의 레시피가 있는 요리책을 출간하는 일이나, 재단사를 고용해야 했을 정도로 주문이 쇄도했던 옷 만드는 일뿐만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 플루트를 배웠던 에우리지시는 브라질 유명 음악가로부터 음악학교 입학을 제안받았었는데, 음악을 목적이 아닌 시집을 잘 보내기 위한 수단으로 본 에우리지시의 부모는 끝까지 반대했다.


소설은 가부장제와 남녀차별적은 부분을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위 글에 적은 것들 외에도 여자가 일자리를 찾는 것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가정주부를 무시하는 발언, 에우리지시의 딸 세실리아는 식사 후 설거지를 돕고 재봉틀로는 앞치마를 만들어줄까 생각하고, 아들 아폰수는 식사 후 아빠 안테르노와 함께 라디오를 듣고 재봉틀로는 청바지를 만들어줄까 하는 모습 등이 그렇다.


안테노르는 에우리지시의 부모 세대의 생각에서 더 나아간 것 같지만, 여전히 공부하는 것을, 대학을 좋은 곳에 시집가기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는 것을 보여줬다.


 (...) 그는 세실리아가 공부를 계속 하길 바랐다. 누가 알겠는가, 대학도 갈 수 있을지. 그러면 좋은 집에도 시집갈 수 있겠지.


p.58


만약 에우리지시가 음악학교에 진학했다면 어땠을까? 요리책을 출판했다면? 옷 만드는 일을 계속했다면?

그 기회 중 하나라도 잡았다면, 그랬다면 에우리지시의 삶은 어땠을까?

작가의 말대로 '무언가가 됐을 수도' 있지 않을까?

 자, 독자 여러분도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사실 에우리지시는 똑 부러지는 여자다. 잘 계산된 수치 몇 개만 가져다준다면 교량 하나 정도는 혼자서도 뚝딱 설계해낼 수 있을 것이다. 실험실에 자리 하나만 내준다면 백신이라도 발명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에우리지시의 두 손에 주어진 것은 더러운 팬티뿐이었다. 그녀는 그걸 눈 깜빡할 사이에 깨끗하게 빨아낼 수 있었고, 그러고 나서는 소파에 앉아 손톱을 바라보며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를 생각하곤 했다.


p.17

에우리지시는 또 다른 프로젝트를 위해 타자기를 사서 글을 쓰는 일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소설을 읽는 나는 에우리지시를 응원하게 된다.


이런 에우리지시의 이야기는 소설 주인공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어떤 여자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작가의 할머니 세대 브라질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지구 정반대편에 있는 우리나라의 할머니 세대, 어머니 세대 이야기 같은 것은 물론이고, 어떤 부분에서는 내 세대에 남겨진 잔재들을 볼 수 있었다..

배경이 되는 시대도 현재가 아니고 장소도 멀지만 이야기는 결코 멀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에우리지시처럼 재능과 기회가 있는데도 지나쳐버렸을, 지나쳐야 했을 수많은 여자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더이상 이런 이야기가 누군가의 이야기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리뷰는 서평단으로 지원하여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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