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연필을 씁니다 - 젊은 창작자들의 연필 예찬
태재 외 지음 / 자그마치북스 / 2019년 12월
평점 :
절판


내 나이쯤 되면 대부분 펜이나 샤프를 쓰지 연필을 쓰는 사람은 흔치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종이 위에 연필을 쓸 때의 사각사각함, 연필을 깎을 때의 서걱서걱함, 손에 묻어나는 나무 냄새, 지울 수 있다는 유연함 등 연필의 매력에 빠져 여전히 펜과 샤프를 쓰는 것만큼 연필을 쓰고 있다.

이 책 <여전히 연필을 씁니다>는 제목처럼 여전히 연필을 쓰고 있으며 연필이 삶의 일부분이 된 9명의 젊은 창작자들이 쓴 글을 담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연필을 좋아하지만 연필을 주제로 한 아무개의 책이었다면 다 읽을 때까지 손에 들고 있었을 거라고 장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연필과 창작자라는 조합은 서로의 매력을 수십 배쯤은 커지게 했고, 그래서 내가 관심을 가지게 하고, 글을 읽는 것을 더 즐겁게 만들었다.



저자들은 연필로 인해 생긴 굳은살을 이야기하고, 그림을 그리기에 완벽한 연필을 찾는 여정을, 엄마가 연필로 쓴 편지를, 수집에 대한 사유를 이야기한다.

각자 연필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교정을 보며 필담을 하기도 하고, 책에 밑줄을 긋고, 필사를 하고, 연필을 모아 가게를 열기도 했다.


전 카피라이터이자 시인이자 에세이스트, 만화가, 매거진 에디터, 공간 디렉터, 편집자, 에세이스트, 유튜브 크리에이터, 손글씨 크리에이터, 문구 편집숍 운영자(두 명이지만 여기에서는 하나로 묶는다) 총 9명의 창작자의 글에는 각자의 직업이 반영되었지만 글에 드러나는 연필이 가지는 특징과 연필에 대한 생각은 신기하게도 비슷한 부분이 많았는데, 그것은 나의 생각과도 같아서 공감을 수없이 불러일으켰다.

어쩌면 우리 대부분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는 연필을 사용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사프를 사용하기 시작하고, 펜을 사용하는 게 더 익숙해지는, 같은 길을 걸어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서관 책 귀퉁이를 접는 일은 저자에게는 이렇게 글로 써 책으로 출판할 수 있는 기억일지몰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책 읽는 즐거움을 반감시킨다는 걸 기억해주길. 나 같은 사람에게 말이다)


저자들의 연필과 관련된 기억들은 나의 기억과 닮아 향수를 불러일으켰는데, 어렸을 적 학교 가기 전날 밤에 연필을 깍아 필통에 넣는 일과나 연필을 우르르 들고 가면 아버지가 칼로 하나하나 깍아 주시던 희미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만화가 재수 씨가 입시 미술을 하며 4B연필을 깎은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내가 연필깍이가 아닌 칼로 연필을 하나하나 깎는 재미를 제대로 느끼게 된 계기였던 미술 시간이 떠올랐다.

미술 연필은 연필깎이가 아닌 칼을 사용해서 깎아야만 했는데, 나는 그게 귀찮지 않고 재미있었다.


<여전히 연필을 씁니다>에는 연필에 대한 애정 어린 사색과 경험담뿐만이 아니라 연필을 소재로 쓴 짧은 소설도 수록되었고, 연필에 대해 더 알아갈 수 있는 정보성 글도 있다.

9명의 글 중 내가 특히 재미있게 읽은 글은 가장 먼저 등장하는 작가 태재 씨의 글이다.

카피깨나 썼던 이력을 가져서인지 재치 있는 문장들에 연필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이렇게 계속 연필 깎는 일을 핑계로 쉬고 오는 나 녀석, 이래 봬도 엄연한 작가로서 이 지면을 받았다. 누군가 내 핑계에 인상을 쓰며 "너 이 녀석, 여러 자루를 미리 깎아 놓으면 안 되는 거야?" 하고 묻는다고 해도 나는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내가 설마 그 짓을 안 해 봤겠어요? 그치만 그러면 쉬지 않고 일해야 한다고요!"


p.17


꿈은 '저런 애도 글로 밥 벌어서 먹고 사는데...'에서 '저런애'를 맡아 모두에게 힘이 되는 것이라는 재미있는 문장으로 소개되는 매거진 에디터 김혜원 씨의, 연필 때문에 잘 보이고 싶은 사람에게 발끈했던 일화나 일기가 아닌 자신의 모든 글에는 약간의 거짓이 섞여 있다고 솔직하게 쓴 글도 귀여웠지만, 다른 저자의 글과는 달리 글에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틀린 부분이 몇 군데 보이는 게 아쉬웠다.

(의도한 건 아닌데 저자의 글을 그대로 옮겨 온 아래 발췌문만 봐도 알 수 있다)

 혹시나 정말로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봐 짧게 설명하자면.... 내가 일기를 꾸준히 쓸 수 있었던 비결은, '일기장에 연필로 쓰는 이야기'만이 진짜이기 때문이다. 그 외는 다 가짜다. 회사에서 쓰는 기사, (나의 본업은 잡지 에디터다) 업무상 작성한 메일, 연애 편지,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혼잣말, 친구에게 보내는 카카오톡 메시지까지. 내가 쓰는 모든 글에는 약간의 거짓이 섞여 있다. 일기를 쓰지 않는다면 나는 완전히 거짓말쟁이가 되 버릴 것이다.


p.64

9년간 편집자로 일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김은경 씨의 글을 읽다 보니 편집자의 고충을 알게 되어서 이걸 서평에 언급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도 했지만, 아쉬웠던 부분은 솔직하게 적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역시 언급한다.

저자의 말처럼 다른 사람의 오류를 지적하는 일은 미안한 일이기도 하다.

 옮음만이 존재해야 하는 사각 교정지 내에서 연필은 의외의 숨 쉴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 무언가를 적어 놓았더라도 언제든 철회하면 그만이었고 지우개로 박박 지우면 흔적이 남지 않았다. 틀릴 자유, 이 얇고 흐린 연필에는 실수를 넉넉하게 품어 주는 여유가 있었다.


p.95

그리고 작가 태재 씨의 글을 이 책의 가장 앞에 배치한 것이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처럼, 편집숍 흑심의 글을 가장 마지막에 배치한 것 또한 탁월한 선택이었다.

흑심은 연필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꽤 알려졌다고 생각하는 연필 가게인데, 수록된 사진들과 함께 글을 읽으면 책을 덮자마자 당장 가게로 달려가 연필을 사고 싶어진다.




연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예쁜 노란 빛깔로 겉과 속 모두 물든 <여전히 연필을 씁니다>는 연필에 애정이 있는 사람들은 공감하며 읽고, 연필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도 추억을 회상하고 연필과 사랑에 빠질게 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리뷰는 서평단으로 지원하여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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