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천재성 - 역사에서 간과되었지만 세상을 변화시킨 힘
제니스 캐플런 지음, 김은경 옮김 / 위너스북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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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앞부분에 누가 가장 천재인 것 같냐는 질문에 미국인의 90%는 남자라고 대답했으며, 여성 천재를 말해보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마리 퀴리가 유일했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는데, 사실 나도 이 조사 결과와 크게 다른 대답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천재를 떠올리면 여성보다는 남성이 훨씬 많이 떠오르고, 그 숫자를 대략이나마 비교해보면 열 배는 차이날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그만큼 우리는 천재인 여성보다 천재인 남성을 훨씬 많이 접했고, 그 때문에 천재 여성에 목이 말랐다는 것이 내가 이 책을 읽고 싶어했던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여성의 천재성>은 천재 여성들과의 만남을 주선한 것에서 더 나아가 바랐던 것 그 이상의 역할을 하는 책이었다.

먼저 여성의 천재성을 말하고자 한다면 천재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제니스 캐플런은 점심 식사 자리에서천재의 핵심 조건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고, 천재란 양성되어야 하며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천재라” 그가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전 그게 비상한 능력과 명성이 만나는 지점에 존재하는 것 같아요.”
놀란 마음으로 그를 쳐다보며, 내 포크는 공중에 그대로 멈추었다. 명성이 있어야 한다고?
(...)
그 여성들은 비상한 재능을 지녔지만 자신의 곡을 연주할 관현악단 —과거 당시 모두 남자였다—을 구성할 수 없었다. 물론 그래서 그녀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베토벤이 자신의 협주곡을 집에서만 연주했다면 천재로 여겨졌을까?
(...)
“만일 그게 맞는다면 천재 여성들은 왜 그렇게 적다고 생각하세요?” 나는 질문하며 대답을 짐작했다.
찰스는 한숨을 쉬더니 내 짐작과 맞는 대답을 했다. “역사적으로 여성들은 그 등식의 절반만 충족했어요. 그러니까 능력은 있고 명성은 없었던 거죠. 자신의 능력에 대해 주목받지 못했던 거예요.”

p.35-36


책에서 저자가 언급하는 사례를 하나 살펴보자.
이 사례의 주인공은 다섯 살 때 왕족을 위한 공연을 했다는 신동이었던 천재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아닌 그의 누나 마리아 안나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위와 같은 이력을 보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재능 덕분에 천재로 불릴 수 있었던 것만 같지만, 거기에 더해 작곡가이자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아버지를 둔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음악 교육을 받으며 수많은 시간 연습을 하고 아버지를 따라 유럽 순회공연에 가는 등, 전문적으로 양성된 부분도 간과할 수 없다고 본다.

자, 이러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에게는 마리아 안나라는 누나가 있다고 했다.
의아하게도 마리아 안나도 같은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웬만큼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을 것이다.
마리아 안나는 음악에 대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일까?

저자가 본 기록에서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마리아 안나를 존경했으며 누나에게 음악을 배웠을 정도로 마리아 안나의 재능은 뛰어났다고 했으니 마리아 안나가 타고난 재능이 없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음악적 재능이 있었던 마리아 안나는 천재로서 세상에 이름을 알리지 못했을까?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마리아 안나가 10대가 되자 딸이 연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마리아 안나는 빈과 파리에서 칭송받는 재능을 가졌음에도 결혼을 목표로 집으로 돌려보내진다.
그 이후에 마리아 안나는 홀아비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고, 그러한 삶에 마리아 안나가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꼈는지는 모르겠다만 마리아 안나의 음악적 재능이 묻혀버렸다는 것은 알 수 있지 않은가.


나는 마리아 안나가 아버지와 전체 사회에 맞서고 자신의 곡을 계속 연주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게 진정한 천재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뛰어난 재능을 지닌 여성에게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려면 반항자의 냉정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심한 것 같다. 사람들은 모차르트에게 세상의 도전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한 적이 없다. 그저 그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도록 내버려뒀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누나에게는 그러한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p.54


이제 그동안 천재로서의 여성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던 이유가 짐작이 갈 텐데, 저자는 이렇게 천재는 그가 가지고 있는 재능만으로, 혼자의 힘으로 될 수 없으므로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이 있다고 말하며 저자 개인의 경험,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천재 여성에 대한 조사와 천재 여성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쓴 이 책에서 그 방향을 제시한다.

그리고 내가 책을 읽기 전부터 기대했던 것처럼, <여성의 천재성>을 읽으면서 수학, 과학, 문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천재성을 가진 여성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장애물을 뛰어넘거나 애둘러서라도 자신의 천재성을 세상에 내보인 이들은 여성들의 롤모델이 되어 삶에 자극을 주고 희망이 되기도 하며, 앞으로, 더 높은 곳으로,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도록 격려한다.


마이클 벌랜드가 천재에 대한 조사에서 던졌던 질문의 답을 보면 이 문제가 왜 사라지지 않았는지 알 수 있다. 남성들에게 혹시 자신이 천재라고 생각하는지 물었을 때 15%의 남성들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여성들은 단 한 명도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 조사에 응답한 남성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의 능력에 망상을 품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 이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어떤지 보여준다. 뭔가가 실현 가능하다고 믿어야만 그것을 실현할 수 있다.

p.16


그렇다면 이 책은 여성들에게만 유익한가 묻는다면 나는 남성들에게도 필요한 책이라고 대답하겠다.
여성의 천재성이 묻힌다는 것은 여성 개인의 비극일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손해이기 때문이다.

만약 앞서 말한 마리아 안나가 음악적 재능을 계속해서 발휘할 수 있었다면 우리가 지금 듣는 음악은 한층 더 풍성해지지 않았을까, 핵분열을 발견하여 물리학계를 뒤집어 놓았던 리제 마이트너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노벨상을 빼앗기기 이전에 핵분열을 발견할 기회조차 없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하면, 그동안 편견 속에서 간과되고, 무시되고, 묻히고, 빼앗기고, 죽임을 당했을 여성들의 잠재력을 생각하면 안타깝고 화가날 뿐만 아니라 현시대를 사는 인류로서 아쉬운 일이 아닌가.
그러니 자극과 격려가 될 뿐만 아니라 여성의 천재성을 살펴보고 존중하고 장려하는 방법까지 알려주는 이 책은 여성은 물론이고 인류 전체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또 <여성의 천재성>을 읽으면서 서평에는 1/10도 인용하지 못할 정도로 밑줄을 그은 부분이 많은데, 내 손가락이 부르트더라도 밑줄 그은 부분을 많은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올리고 싶은 마음이지만 저작권은 중요하기 때문에 그러지 못한다는 것을 알리며, 그냥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우리가 간과한 천재는 당신의 주변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일 수도 있고, 당신이 가르치고 있는 학생일 수도 있고, 당신의 딸이나 손녀일 수도 있다.


나는 젊은 작가 쉴라 헤티 Sheila Heti의 책을 우연히 발견했다. 한 영향력 있는 평론가는 “문학을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라며 그녀를 극찬했다. 그녀의 소설 <사람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How should a Person Be?>의 초반부에서는 천재 여성이라는 주제를 묘하게 비틀어서 말한다.

“여성이 되는 것의 한 가지 좋은 점은 천재 여성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예시가 아직 많지 않다는 점이다. 그 천재가 바로 나일 수도 있다.”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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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의 땅 1부 4 : 어둠의 그림자 용기의 땅 1부 4
에린 헌터 지음, 윤영 옮김 / 가람어린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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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개코원숭이 스팅어를 해치우고 위대한 전투가 끝났지만 위대한 부모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생존을 위해서만 다른 동물을 죽일 수 있다는 자연의 법칙을 어겨 동물을 살해한 뒤 가슴을 갈라 심장만을 가져간 흔적이 남은 사체가 용기의 땅 곳곳에서 발견되는 의문스러운 일이 일어난다.
<용기의 땅 4 어둠의 그림자>는 위대한 전투 이후 시간이 흐르고 새로운 위기를 맞은 용기의 땅과 또다시 각자 갈등을 마주한 주인공 삼총사 이야기의 서막을 열었다.

<용기의 땅> 시리즈는 사자 피어리스, 코끼리 스카이, 개코원숭이 쏜, 이렇게 삼총사가 주인공이지만, 또다른 국면을 맞이하는 4권에서는 책표지를 장식한 개코원숭이 쏜의 이야기가 돋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용기의 땅의 정신적 지주인 위대한 영혼이 개코원숭이 쏜에게 깃들게 되면서 쏜이 위대한 아버지가 되었으니 말이다.
쏜이 위대한 아버지가 된 일은 쏜 자신에게 가장 놀라웠겠지만, 전 위대한 어머니의 손녀인데다 위대한 영혼이 잠시 머물기도 했으며 선한 마음과 지혜로운 코끼리가 될 싹이 보였던 스카이가 위대한 어머니가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도 놀랐다.

하지만 이전에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위대한 부모를 사칭한 동물들과는 달리, 위대한 부모는 용기의 땅 동물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는 만큼 그 어깨에 짊어지게 되는 책임감의 무게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아는 쏜은 자신이 위대한 아버지가 될 만한 재목이 아니라며 위대한 아버지가 되기를 거부한다.

거기에다 쏜이 속해있는 개코원숭이 빛나는 숲 무리의 우두머리 자리도 비어 있는데 그 자리에 앉을 개코원숭이로도 쏜이 유력하니, 이쪽이든 저쪽이든 쏜에게는 부담되는 일뿐이었다.
백 번 양보해서 개코원숭이 무리의 우두머리까지는 할 수 있어도 용기의 땅의 위대한 아버지 역할은 할 수 없다는 것이 쏜의 입장이다.

한편 사자 피어리스는 아직 풍성한 갈기를 갖지는 못했지만 잘 성장하고 있는 중이며, 누나 베일러를 포함한 사자 몇 마리로 이루어진 사자 피어리스 무리의 우두머리로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뛰어난 사냥꾼인 베일러에게 존중 받지 못하는 것 같고 무리의 다른 사자들도 자신을 우두머리로 존경하지 않는 것 같아 자신의 역량에 아쉬움을 느끼던 중에 베일러의 짝 마이티가 무리에 들어오게 되면서 갈등이 깊어진다.
마이티는 갈기가 풍성한 수컷 사자로 사냥 능력이 뛰어나면서도 겸손해서 무리의 다른 사자들은 현재우두머리인 피어리스보다 마이티에게 더 의지하는 듯한 데다, 피어리스는 신체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않아 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위험에 빠진 친구를 바로 구하지도 못했다는 죄책감에 빠지기도 한다.

코끼리 스카이가 속한 코끼리 스트라이더 가족은 위대한 어머니와 레인이 죽은 뒤 코멧이 우두머리가 되었지만, 코멧은 아직 코끼리 가족을 이끌기에는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스카이와 스트라이더 무리는 위대한 영혼의 부재에 슬퍼했다.
그리고 자신이 스팅어를 죽이며 자연의 법칙을 어겼다는 생각이 스카이를 괴롭혔고, 수컷은 스트라이더 가족 무리에 속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위기를 함께 헤쳤왔던 친구 록과 만나지 못한다는 것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결국 스카이는 스트라이더 무리가 떠날 때 함께 가지 않고 남기를 선택했고, 무리와 떨어진 이후 친구 치타 러쉬가 의문을 죽음을 당하면서 남긴 새끼 치타도 두 마리도 챙기게 되었다.
다행인 것은 그토록 찾아다녔던 친구 록을 다시 만났고, 이들이 스카이의 새로운 여행 동료가 되어 여행길이 외롭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전에 위대한 전투가 끝나면 용기의 땅 삼총사는 어떻게 지낼지 궁금했기 때문에 이번에 위대한 전투 이후로 시간이 흐른 뒤의 용기의 땅 삼총사를 만나게 되어 더욱 반가웠다.

그리고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개코원숭이 쏜이 위대한 아버지가 된 것, 그리고 쏜이 위대한 아버지가 되기를 거부하며 필사적으로 친구들에게 자신에게 위대한 영혼이 깃들었다는 사실을 숨기는 것, 위대한 아버지의 능력으로써 쏜에게 발현되어 마치 빙의가 된 것처럼 다른 동물이 처한 상황뿐만 아니라 감각과 감정까지 느끼게 되는 환영, 그 능력으로 인해 오히려 위기에 처하는 쏜, 그리고 생존을 위해서만 다른 동물을 죽일 수 있다는 자연의 법칙을 어기고 동물을 사냥하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이렇게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가 가득하니 책장이 휘리릭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개코원숭이 무리 빛나는 숲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용기의 땅의 정신적 지주인 위대한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 운명에 처한 쏜의 심정도 이해가 가고, 안 그래도 무리의 우두머리로서 제대로 인정 받지 못하는 것 같아 불안하던 차에 사자 무리의 우두머리로 제격인 마이티가 등장하여 심경이 복잡해진 피어리스의 입장에도 이입이 되어서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또 스카이와 귀여운 새끼 치타 두 마리의 관계성도 좋았고, 삼총사가 이전보다 성장한 만큼 4권에서는 로맨스적인 요소도 돋보였는데, 아니, 코끼리의 로맨스가 이렇게 간질거릴 일이냐고요.


“스카이, 난 네가 해야 할 일을 모두 잘 해냈어. 용감하게 해내면서도 따뜻한 친절을 잃지 않았어. 항상 정의로웠지. 그래서 내가......, 너에게......, 마음이 끌린 거야. 그래서 이 감정을......, 꼭 표현하고 싶었어. 아, 미안해.”

p.196


“그런데 왜? 왜 나와 함께하고 싶은 거야? 너도 알겠지만, 나의 짝이 되면 힘들 거야. 난 다른 코끼리들과는 달라. 난 무리와 함께 지내지 않아. 다 같이 떠나야 하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난 우두머리의 말을 어겼어. 그리고 위대한 영혼이 내 안에 깃들어 있었잖아? 언젠가 또 내가 필요한 순간이 올 테고, 그땐 또 그 일을 해야만 해. 거부할 수 없는 일이야.”
스카이는 눈을 내리깔고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록......, 다른 그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이 또 하나 있어. 난 자연의 법칙을 깼어. 살해를 저질렀잖아.”
영원처럼 길게만 느껴지던 그 순간, 록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떨리는 코로 스카이의 뺨을 어루만졌다.
“스카이, 내가 그걸 다 모르는 줄 알아? 너의 그런 점 때문에 네가 특별한 거야. 그리고 너를 특별하게 만드는 그 모든 것 때문에 내가 널 사랑하는 거야, 스카이 스트라이더.”

p.198


<용기의 땅 4 어둠의 그림자>는 이전의 세 권보다 더 재미있게 읽어서 5권을 더욱 기다리게 된다.
<용기의 땅(Brave Lands)> 시리즈의 작가 에린 헌터는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전사들(Warriors)>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Survivors)>, <모험을 찾아 떠나는 자들(Seekers)> 시리즈에서 모두 동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는데, 그렇게 기나긴 집필 경험에서 나오는 바이브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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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은 어떻게 죽었을까 - 태조에서 순종까지, 왕의 사망 일기
정승호.김수진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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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조선 팔도를 통틀어 왕보다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곳에서 지낸 사람이 있었을까?
거기에다 조선의 왕은 매화, 즉 대변까지 확인 받으며 사생활이 없다시피 할 정도로 철저하게 건강 관리가 되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보니 생각외로 각종 질병을 앓지 않은 왕이 없다.

본문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조선의 왕은 어떻게 죽었을까>는 책의 저자 이력이 특이했는데, 공동저자 두 명 중 한 명은 관광학/법학/심리학 박사이며 많은 저서와 연구 논문을 썼지만 책날개에 소개된 저서는 또 모두 부동산 관련 책이었고, 다른 한 명은 호텔관광경영학 박사이자 과 교수로 관광/호텔/외식 관련하여 활동하며 잡지에 커피에 대한 글을 연재하고 있었다.
저자 둘 다 수상 이력이 많고 관광과 관련된 활동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책의 주제와 밀접한 역사나 의학과 관련된 이력은 보이지 않아서 어쩌다가 조선 왕의 질병에 대한 책을 쓰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아무래도 해당 분야 전문가가 쓴 글이 더 전문성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처음에는 걱정을 조금 했지만, 한국연구재단 학술/인문사회사업의 지원을 받아 조선에 대한 책을 여럿 출판한 인물과사상사에서 출판된 책이고, 한의학과 의학 분야 박사들의 도움을 받아 완성했으며 (추천사를 쓴 네 명 중 세 명도 의학 분야 종사자다), 공동저자 중 한 명이 외식산업분야 전문가로서 조선 왕들의 식습관, 음식과 술에 대한 부분에서 전문성을 발휘했다고 하니 이 책 내용과 관련이 없어 보이던 이력이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되어 처음에 했던 걱정은 떨치고 책을 읽었다.

그렇게 본문을 직접 읽어보니 (의학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는) 마치 의학 전문가가 쓴 것처럼 의학적 지식과 그에 따른 추론 과정이 타당해보였고, 책을 쓸 때 참고한 논문과 단행본 그리고 고문헌도 말미에 잘 정리되어 있었다.

<조선의 왕은 어떻게 죽었을까>에서 저자는 조선의 1대 왕 태조 이성계부터 조선의 마지막 왕인 고종에 한 명을 더 더해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까지, 총 스물일곱 명의 왕들이 앓았던 질병과 죽음의 원인을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문서에 적힌 증상과 왕의 삶을 바탕으로 하여 추리한다.


사망 하루 전인 6월 29일은 가장 긴박한 하루였다. 나인들이 말하기를, “상에서 한참 잠드신 뒤에 갑자기 열에 괴로워하시는데 이따금 헛소리를 할 뿐 아니라 기운이 많이 지친 상태였습니다”라고 한다.
이러한 증상은 뇌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뇌졸중의 전조 증상으로 갑자기 한쪽 팔다리에 힘이 없거나 저리고 감각이 없거나, 말을 못하거나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다. 게다가 심한 두통이 있으면서 토하는 증상이 있는데, 이러한 증상은 인종의 증상에서도 나타났다. 특히 뇌졸중이나 뇌종양도 심한 고열을 발생하기도 한다.

p.158-159


조선의 왕들 중에는 재위 기간은 6년 2개월로 짧지만 전쟁터를 누빈 무사로서 가진 강인한 체질과 정신 덕분인지 74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영조 다음으로 장수한 태조 이성계 같은 왕도 있었지만 (물론 그도 질병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다), 조선 최고의 건강 관리 하에 놓인 왕임에도 불구하고 온갖 질병을 앓고 또 단명한 왕들이 많았다.

조선의 스물일곱 왕 중에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또 의외라고 생각할 왕은 성군 중의 성군으로 유명한 세종대왕이 아닐까 싶은데, 고기를 좋아하는 것으로도 잘 알려진 세종은 이번에 보니 너무나도 인간적인 왕이었다.

세종은 태종이 살아서 대리청정을 하던 1422년 상반기까지는 건강했지만 그 이후에는 잔병이 많아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할 정도였으며, 29세 때인 1425년부터는 생명이 위태로울 지경이었다고 한다.
본디 운동을 싫어하고 육식을 좋아하는 대식가였던세종은 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 못해 아버지 태종의 3년상 중에도 고기를 먹는 등 음식 조절에 있어서는 의지력이 약한 왕이었다.

그 때문인지 세종은 소갈증, 그러니까 당뇨병과 안질을 비롯한 당뇨병 합병증으로 평생 고생했고, 척추에 염증이 생겨 움직임이 둔해지는 병인 강직성 척추염으로 자리에 누웠으며, 성인성 질환(성병)인 임질도 앓으면서 <세종실록>에는 세종의 질병에 대한 기록만 100회에 걸쳐 나왔을 정도였으니, 저자는 책에서 세종을 질병 종합선물세트나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또한 원래 자신이나 가족이 아프면 안 찾던 종교를 찾게 될 정도로 무엇에든 의지를 하고 싶어지곤 하는데, 세종도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어머니 원경왕후 민씨가 고열과 오한이 반복되는 학질에 걸리자 세종은 성리학의 나라 조선의 왕임에도 궁궐까지 비우고 어머니를 모시고 절과 산을 다니며 기도와 주술 같은 무속 치료를 했다니 말이다.

이렇게 안질로 인해 침침한 눈과 아픈 몸으로도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눈부신 업적을 이루다니 세종대왕이 더욱 대단해보이는 한편, 운동을 싫어하며 음식 앞에서는 약해지고 질병 때문에 기도나 주술에 의지하기도 한 모습은 우리네와 다르지 않아 인간적으로 보였다.

<조선의 왕은 어떻게 죽었을까>에서 저자가 조선의 왕 스물일곱 명이 앓았던 질병을 추리하는 과정을 읽으면서 조선 왕의 생활 습관과 의학적 지식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의 의술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데, 종기(조선에는 종기로 고생한 왕이 많다)와 치통 그리고 하복부의 통증 때문에 대소변을 잘 보지 못하며 생식기가 붓고 아픈 산증을 앓은 중종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의관들이 내린 처방이 인상적이다.

심열과 갈증을 호소하는 중종에게 의관들이 처방한 특별한 약물은 야인건수... 그냥 똥물이다!
야인건수는 <동의보감>에도 나오는 처방이고, 중종도 효험을 인정하여 8회에 걸쳐 야인건수를 복용하기도 했으며 죽기 전날에도 청심환과 함께 먹었다고 한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라는 속담이 있는데, 개똥은 몰라도 인간의 똥이 약으로 쓰이긴 한 것이다.


결국 11월 4일 의관들은 아주 특별한 약물을 처방한다. 야인건수, 즉 바로 똥물이다. <동의보감>은 이 처방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성질이 차서 심한 열로 미쳐 날뛰는 것을 치료한다. 잘 마른 것을 가루로 만들어 끓는 물에 거품을 내어 먹는다. 남자 똥이 좋다.”
야인건수는 곧바로 효험을 발휘한 것 같다. 8일에는 의원 박세거가 들어가서 진찰하고 이렇게 말했다.
“갈증도 덜하고, 열은 이미 줄었습니다.”
중종도 효험을 인정했다.
“전일 열이 올랐을 때 야인건수를 써서 열을 물리쳤다. 혹시 밤중에 열이 심하면 쓰려고 하니 미리 준비해서 들여오라.”

p.143-144


서평에는 조선의 서너 왕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지만 이 책으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신체적 그리고 정신적 질환을 앓은 조선 왕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흥미롭고, 건강 관리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는 점에서도 유익하며, 나 또한 만성질환으로 고생하고 있어서인지 (나뿐만 아니라 아마 현대인들 대부분이 질병으로 고생했던 적이 있거나 만성질환을 겪고 있을 것이다) 조선 왕들과의 거리감이 한결 줄어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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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 오브 더 시 에프 그래픽 컬렉션
딜런 메코니스 지음, 전하림 옮김 / F(에프) / 2021년 6월
평점 :
절판


영국 국교를 가톨릭에서 성공회로 바꾸기까지 하고 결혼을 여섯 번이나 한 헨리 8세의 여성 편력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며 소설로도 출간되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런 헨리 8세 기행의 희생자로 그와 결혼한 왕비뿐만 아니라 그들 사이의 자녀도 빼놓을 수 없는데, 그가 결혼을 취소하고 다시 결혼하고 또 이혼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왕위 계승 서열을 꼬아놓은 덕에 엘리자베스 1세는 자신의 이복 언니 메리 1세에 의해 런던탑에 유폐되기까지 했다.
나 또한 헨리 8세와 그의 여섯 왕비들, 그리고 메리 1세와 엘리자베스 1세 이야기에 흥미를 가지고 책을 찾아 읽었던 적이 있기에, 저자가 메리 1세가 미래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유폐한 역사적 사실에서 영감을 받아 그렸다는 그래픽노블 <퀸 오브 더 시>에도 관심이 갔다.

책은 실물을 보니 생각보다 큼직하고 무게감 있어서 더 좋았고, 대장정을 떠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래픽노블의 주인공 마거릿(애칭 매기)은 갓난아기 때 부모도 없이 배를 타고 알비온 왕국의 작은 섬에 있는 엘리시아회 수녀원에 와서 자란다.
마거릿이 살고 있는 섬은 생각보다 훨씬 작은 규모로, 엘리시아회 수녀 여섯 명, 수녀원에서 일을 하는 모녀 세 명, 신부 한 명, 여기에 마거릿까지 총 열한 명만이 거주하고 있었다.
거기에다 섬에 찾아오는 외부인이라고는 (사고를 제외하고) 일 년에 두 번 레지나 마리스호를 타고 와서 수녀원에 보급품을 전달하고 수녀원으로부터 편지나 자수를 가져가 전달해주는 선장과 선원들뿐이어서 마거릿은 섬에 아이를 데려다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자 마거릿의 기도를 하늘이 들어준 것인지, 윌리엄이라는 또래 남자 아이가 섬에 온다.
다만 윌리엄은 마거릿처럼 부모 없이 홀로 섬에 온 게 아니라 엄마인 캐머런 부인과 함께 왔는데, 윌리엄은 캐머런 영주의 아들이지만 아버지가 알비온 왕국의 에드먼드 왕에게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 영지를 빼앗기고 살던 캐머런 성을 떠나 엄마와 단 둘이 변방의 섬에 있는 수녀원에 오게 된 것이다.
마거릿과 윌리엄은 서로 섬에서 유일한 또래 친구로서 사이좋게 잘 지냈고, 예전의 생활을 잊지 못한 캐머런 부인은 섬의 생활에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지만 결국에는 마음을 열고 함께 생활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윌리엄은 섬 밖으로 나가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 마거릿은 어렸을 때부터 남매처럼 함께 자란 윌리엄을 떠나 보내야만 했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고, 이별 뒤에는 또다른 만남이 있다는 말대로 윌리엄이 떠난 뒤에 섬에 큰 변화를 몰고 올 인물이 찾아오는데, 바로 알비온 왕국의 전 여왕 엘리노어다.

사실 엘리노어는 책을 펼치면 마거릿보다 앞서 만나게 되는 인물로, 여왕의 자리를 위협 받으며 도망가야 하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충신이 왕궁에 남아 첩자로 활동할 수 있게 할 증거로 스스로의 머리칼을 뜯어내며 담대한 모습을 보여주어 눈도장을 쾅 찍었기에 그 등장을 줄곧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섬에 도착한 엘리노어는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 달리 감옥 생활에 이골이 났으며 한편으로는 조건 없는 애정을 원하는 인간적인 면을 보여준다.

이쯤되면 엘리노어가 왜 ‘전 여왕’이 되어버렸을지 궁금할 텐데, 간략하게 말하자면 에드먼드 왕의 장녀이자 엘리노어의 이복 언니인 캐서린(케이트)이 엘리노어를 쫓아내고 왕좌에 올랐기 때문이다.
캐서린은 에드먼드 왕와 첫 번째 왕비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에드먼드 왕이 첫 번째 왕비와의 결혼을 무효화하는 바람에 수치스럽게 쫓겨나야 했다.
그 뒤에 에드먼드 왕은 두 번째 왕비와 결혼했고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엘리노어가 에드먼드 왕의 뒤를 이어 여왕이 되었지만, 캐서린과 그가 전통성 있는 후계자라고 주장하는 세력이 엘리노어를 여왕 자리에서 몰아내고 감옥에까지 가두었다가 섬에 있는 수녀원에 보낸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캐서린으로서는 빼앗겼던 자기 자리를 되찾은 셈이지만 이 이야기는 캐서린이 아닌 엘리노어(정확히는 엘리노어와 함께 있는 마거릿)의 입장에서 전개되므로 캐서린이 악인으로 그려진다.

아무튼 앞서 말한 것과 같이 <퀸 오브 더 시>는 16세기 영국 메리 1세가 미래에 여왕이 될 이복 동생 엘리자베스 1세를 유폐한 일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만큼, 그 유명한 영국의 헨리 8세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라면 캐서린은 메리 1세를 바탕으로, 엘리노어는 엘리자베스 1세를 바탕으로, 그리고 이 둘의 아버지 에드먼드 왕은 헨리 8세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인물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야기 속 인물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그려진 복식과 외형 묘사에서도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헨리 8세 또는 메리 1세와 엘리자베스 1세의 이야기를 알고 이 그래픽노블을 읽는다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역사적 사실을 모르고 그래픽노블을 읽더라도 즐기는 데에 문제가 없지만, 헨리 8세의 막장 드라마 같은 이야기는 역사에 별 관심이 없더라도 흥미로울 테니 한번 찾아보는 것을 권한다.

이렇게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졌기 때문일까, 섬과 마거릿에 대한 진실과 그들에게 찾아온 위기가 재미를 주면서도 은근히 현실적이었고, 지극히 인간적인 등장인물들은 이야기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을 것만 같았다.
엘리노어에 대해서는 앞서 말했으니 마거릿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면, 마거릿은 선하고 순수하면서도 그 나이대에 어울리는 상상력과 철 없는 면 또한 가지고 있어서 실제로 한 여자아이가 수녀들과 함께 수녀원에서 자란다면 이런 아이가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현실적인 면이 있으면서도, 평소에는 물개 가죽을 입고 동족과 살다가 인간 어부와 사랑에 빠지면 상대가 물개 가죽을 잘 숨겨놓는 한 행복하게 함께 살지만 (이 부분이 꼭 <선녀와 나무꾼> 같았다) 결국 자신을 부르는 바다로 돌아간다는 신비로운 하얀 물개 셀키 이야기와 같이, 책 곳곳에 녹아든 동화적인 면이 또 잘 어우러진다.
그리고 마거릿이 엘리노어로부터 체스를 두는 방법을 배우면서 등장하는 체스를 소재로 사용하는 부분과 이 한 권의 그래픽노블을 마무리하는 방식까지 마음에 들었다.





<이 리뷰는 서평단으로 지원하여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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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여행사 히라이스
고호 지음 / 델피노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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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잠깐이라도 좋으니 과거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든, 돌이키고 싶은 과거를 바로잡기 위해서든, 인생의 치트키 로또 당첨 번호를 알려주고 싶어서든, 아니면 단순한 호기심과 흥미 때문이든 말이다.
참고로 나는 이 모든 이유로 과거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에, 돈을 지불하면 고객이 과거 여행을 할 수 있게 해준다는 과거여행사를 통해 과거로 간 인물들의 이야기가 재미있어 보였다.

책 속에서 과거로의 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과거여행사 이름은 히라이스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 이라는 뜻을 가진 웨일스어라고 하니 과거여행사 사명으로 이렇게 모순적이면서도 잘 어울리는 이름은 없을 것이다.
런던에 본부를 둔 히라이스는 전 세계에 단 다섯 지점이 있는데, 이 책에서는 히라이스 서울지점 사무실을 통해서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과거여행사 히라이스의 명함을 우연히 손에 넣게 된 사람들은 호기심 반 의심 반으로 히라이스 서울지점 사무실에 찾아간다.
히라이스 사무실에는 캡틴이라고 불리며 돈을 좋아하는 지점장과 세일러라고 불리는 사원들이 일하고 있고, 가성비 좋은 도깨비 여행 상품부터 테마 상품과 비싼 프리미엄 상품까지 준비되어 상담을 통해서 상품을 선택하고 금액을 지불하면 세일러가 설정해주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해서 원하는 과거로 갈 수가 있다.
과거로 떠나기 전에 가고자 하는 시대에 사용되는 화폐로 환전을 하고 옷을 대여받아 시대에 맞는 복장을 갖추는 과정도 필요하다.
만약 혼자 과거로 가는 것이 걱정된다면 인솔자 동반 옵션을 이용할 수도 있으니, 실제로 과거여행사가 있다면 이런 느낌이겠지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탄탄해보이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읽으면서 구멍으로 생각되는 부분 또한 있었다.
가령 과거로의 여행은 국내 한정이 아니라 전세계 어디든 갈 수 있기 때문에 서양으로 떠나기도 하는데, 아무리 시대에 맞는 옷을 걸치고 외국어를 하더라도 한국인과 서양인의 외형적 차이가 분명히 날 것이고 하물며 과거로 갔으니 서양인들 사이의 동양인으로서 시선을 한몸에 받을 듯한데 자연스럽게 외국인들과 섞이는 것은 이질적으로 보였다.
또 과거로 가는 이동수단인 엘리베이터 조작에 있어서도 탑승 후 이동하고자 하는 연도를 설정하는 정도만 나오지 세세한 날짜와 시간 설정 그리고 장소를 설정하는 방법은 나오지 않아서 세세한 설정을 좋아한다면 이런 부분에서 아쉬움이 남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미래의 딸이라니....”
“선보지 마. 결혼하지 말라고.”
“왜?”
“결혼하면 불행해지니까.”
“어떻게... 불행한데?”
“엄마 속으로 낳은 자식이 과거로 와서 그 결혼을 말릴 만큼.”
(...)
“엄마는? 그러니까... 내가 네 미래의 엄마라며?”
“응.”
“나는 어떤데?”
“무슨 말이야?”
“내 딸로 태어나서 사는 게 너도 불행하니?”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나는 아까보다 더욱 할 말을 잃었다.

p.121-122


그러나 소설 속 인물들은 복수를 위해서,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던 가족을 만나기 위해서, 또는 반대로 엄마와 아빠의 만남을 막기 위해서, 지적 호기심 때문에, 후회되는 과거를 바꾸기 위해 등등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가지각색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지만 모두 우리가 한 번쯤 생각했을 만한, 공감할 수 있는 이유이기 때문에 이야기에 이입이 잘 되었다.

책에 수록된 단편 중 <시한부 소녀의 모험>에서는 나만큼이나 영화 <타이타닉>을 인상깊게 본 것 같은 시한부 소녀가 과거로 가서 침몰 직전의 타이타닉호에 올라타는데, 그곳에서 잭을 만나고 둘이 함께 타이타닉을 누비며 대화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영화 속 장면이 떠올라 영화를 본 독자로서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어떻게 주인공이 잭을 만날 수 있다는 건지 의아할 텐데 그 의문은 소설을 직접 읽으며 확인해보시라!)

과거여행사 히라이스를 통해서 어느 시대 어느 장소든 갈 수 있지만 ‘시간법’은 꼭 지켜야 하는데, 죽은 자를 살려내거나 과거인을 죽이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비롯한 몇 가지가 있다.
온라인에서 과거로 갈 수 있다면 아기 히틀러(이토 히로부미나 이완용이 이 자리를 대신하기도 한다)를 죽일 거나는 질문을 봤었는데 시간법에 따르면 이런 일은 해서는 안 된다니 아쉬워 할 사람들이 많을 듯하다.

하지만 규칙을 잘 지키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기 마련, <과거여행사 히라이스>에도 자신이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역사 속 인물들, 빵 대신 케이크를 먹으라느니 하는 유언비어로 죽음 이후에도 오랫동안 억울한 시간을 보낸 마리 앙투아네트와 4월 1일 만우절에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난 영화배우 장국영의 죽음을 막겠다며 영웅 심리로 무장한 채 과거로 떠난 이도 있다.

<과거여행사 히라이스>는 여러 단편과 에필로그 두 개로 구성되어 있어서 속도감 있게 읽혔고,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마무리와 한 단편에서 등장했던 인물의 흔적을 다른 단편에서 만나게 되는 것도 소설을 읽는 재미를 더해주었다.

다만 이 소설은 <평양에서 걸려온 전화>와 <악플러 수용소>에 이은 고호 작가의 세 번째 소설인데도 간혹 매끄럽지 않은, 아래처럼 어색한 문장을 읽게 될 때가 있었다.


(...) 점원은 요즘 유행이 뭐가 좋고 옷 재질이 이러쿵저러쿵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내 눈에는 빨간 에나멜 구두와 레이스 달린 망사양말을 신고 있는 마네킹이었다.

p.170


사실 얼마 전에 읽었던 책도 그렇고, 같은 단어의 반복된 사용이나 어색한 조사나 수식어 사용, 그리고 주어 서술어의 불일치 때문에 매끄럽지 않은 문장을 읽게 될 때가 있어 (이에 대해서는 모든 서평에 언급하지는 않았다) 책 내용이 좋으니 조금만 잘 다듬었다면 책의 완성도가 많이 높아졌을 텐데 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었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다.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지금 떠올려보려고 하니 의외로 번역서에서는 이런 문장을 본 기억이 없다)

이런 문제는 글을 쓰는 작가와 작가의 글을 받아 읽고 교정교열하는 일을 담당하는 출판사 편집자의 노력이 더해진다면 충분히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앞으로 더 나은 책을 기대해본다.


“후회란 놈은 꼭 이렇게 뒤통수를 친단게. 앞에서 오믄 을매나 좋아. 사람이 살믄서 후회를 어찌 안 하고 살겠느냐마는 자네는 그래도 후회를 돌이키기에 너무 멀리 가는 인생을 살진 말어. 그것만 명심해두 자알 산 거시여.”

p.221



<이 리뷰는 서평단으로 지원하여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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