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여행사 히라이스
고호 지음 / 델피노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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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잠깐이라도 좋으니 과거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든, 돌이키고 싶은 과거를 바로잡기 위해서든, 인생의 치트키 로또 당첨 번호를 알려주고 싶어서든, 아니면 단순한 호기심과 흥미 때문이든 말이다.
참고로 나는 이 모든 이유로 과거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에, 돈을 지불하면 고객이 과거 여행을 할 수 있게 해준다는 과거여행사를 통해 과거로 간 인물들의 이야기가 재미있어 보였다.

책 속에서 과거로의 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과거여행사 이름은 히라이스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 이라는 뜻을 가진 웨일스어라고 하니 과거여행사 사명으로 이렇게 모순적이면서도 잘 어울리는 이름은 없을 것이다.
런던에 본부를 둔 히라이스는 전 세계에 단 다섯 지점이 있는데, 이 책에서는 히라이스 서울지점 사무실을 통해서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과거여행사 히라이스의 명함을 우연히 손에 넣게 된 사람들은 호기심 반 의심 반으로 히라이스 서울지점 사무실에 찾아간다.
히라이스 사무실에는 캡틴이라고 불리며 돈을 좋아하는 지점장과 세일러라고 불리는 사원들이 일하고 있고, 가성비 좋은 도깨비 여행 상품부터 테마 상품과 비싼 프리미엄 상품까지 준비되어 상담을 통해서 상품을 선택하고 금액을 지불하면 세일러가 설정해주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해서 원하는 과거로 갈 수가 있다.
과거로 떠나기 전에 가고자 하는 시대에 사용되는 화폐로 환전을 하고 옷을 대여받아 시대에 맞는 복장을 갖추는 과정도 필요하다.
만약 혼자 과거로 가는 것이 걱정된다면 인솔자 동반 옵션을 이용할 수도 있으니, 실제로 과거여행사가 있다면 이런 느낌이겠지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탄탄해보이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읽으면서 구멍으로 생각되는 부분 또한 있었다.
가령 과거로의 여행은 국내 한정이 아니라 전세계 어디든 갈 수 있기 때문에 서양으로 떠나기도 하는데, 아무리 시대에 맞는 옷을 걸치고 외국어를 하더라도 한국인과 서양인의 외형적 차이가 분명히 날 것이고 하물며 과거로 갔으니 서양인들 사이의 동양인으로서 시선을 한몸에 받을 듯한데 자연스럽게 외국인들과 섞이는 것은 이질적으로 보였다.
또 과거로 가는 이동수단인 엘리베이터 조작에 있어서도 탑승 후 이동하고자 하는 연도를 설정하는 정도만 나오지 세세한 날짜와 시간 설정 그리고 장소를 설정하는 방법은 나오지 않아서 세세한 설정을 좋아한다면 이런 부분에서 아쉬움이 남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미래의 딸이라니....”
“선보지 마. 결혼하지 말라고.”
“왜?”
“결혼하면 불행해지니까.”
“어떻게... 불행한데?”
“엄마 속으로 낳은 자식이 과거로 와서 그 결혼을 말릴 만큼.”
(...)
“엄마는? 그러니까... 내가 네 미래의 엄마라며?”
“응.”
“나는 어떤데?”
“무슨 말이야?”
“내 딸로 태어나서 사는 게 너도 불행하니?”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나는 아까보다 더욱 할 말을 잃었다.

p.121-122


그러나 소설 속 인물들은 복수를 위해서,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던 가족을 만나기 위해서, 또는 반대로 엄마와 아빠의 만남을 막기 위해서, 지적 호기심 때문에, 후회되는 과거를 바꾸기 위해 등등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가지각색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지만 모두 우리가 한 번쯤 생각했을 만한, 공감할 수 있는 이유이기 때문에 이야기에 이입이 잘 되었다.

책에 수록된 단편 중 <시한부 소녀의 모험>에서는 나만큼이나 영화 <타이타닉>을 인상깊게 본 것 같은 시한부 소녀가 과거로 가서 침몰 직전의 타이타닉호에 올라타는데, 그곳에서 잭을 만나고 둘이 함께 타이타닉을 누비며 대화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영화 속 장면이 떠올라 영화를 본 독자로서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어떻게 주인공이 잭을 만날 수 있다는 건지 의아할 텐데 그 의문은 소설을 직접 읽으며 확인해보시라!)

과거여행사 히라이스를 통해서 어느 시대 어느 장소든 갈 수 있지만 ‘시간법’은 꼭 지켜야 하는데, 죽은 자를 살려내거나 과거인을 죽이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비롯한 몇 가지가 있다.
온라인에서 과거로 갈 수 있다면 아기 히틀러(이토 히로부미나 이완용이 이 자리를 대신하기도 한다)를 죽일 거나는 질문을 봤었는데 시간법에 따르면 이런 일은 해서는 안 된다니 아쉬워 할 사람들이 많을 듯하다.

하지만 규칙을 잘 지키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기 마련, <과거여행사 히라이스>에도 자신이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역사 속 인물들, 빵 대신 케이크를 먹으라느니 하는 유언비어로 죽음 이후에도 오랫동안 억울한 시간을 보낸 마리 앙투아네트와 4월 1일 만우절에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난 영화배우 장국영의 죽음을 막겠다며 영웅 심리로 무장한 채 과거로 떠난 이도 있다.

<과거여행사 히라이스>는 여러 단편과 에필로그 두 개로 구성되어 있어서 속도감 있게 읽혔고,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마무리와 한 단편에서 등장했던 인물의 흔적을 다른 단편에서 만나게 되는 것도 소설을 읽는 재미를 더해주었다.

다만 이 소설은 <평양에서 걸려온 전화>와 <악플러 수용소>에 이은 고호 작가의 세 번째 소설인데도 간혹 매끄럽지 않은, 아래처럼 어색한 문장을 읽게 될 때가 있었다.


(...) 점원은 요즘 유행이 뭐가 좋고 옷 재질이 이러쿵저러쿵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내 눈에는 빨간 에나멜 구두와 레이스 달린 망사양말을 신고 있는 마네킹이었다.

p.170


사실 얼마 전에 읽었던 책도 그렇고, 같은 단어의 반복된 사용이나 어색한 조사나 수식어 사용, 그리고 주어 서술어의 불일치 때문에 매끄럽지 않은 문장을 읽게 될 때가 있어 (이에 대해서는 모든 서평에 언급하지는 않았다) 책 내용이 좋으니 조금만 잘 다듬었다면 책의 완성도가 많이 높아졌을 텐데 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었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다.
(내가 기억을 못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지금 떠올려보려고 하니 의외로 번역서에서는 이런 문장을 본 기억이 없다)

이런 문제는 글을 쓰는 작가와 작가의 글을 받아 읽고 교정교열하는 일을 담당하는 출판사 편집자의 노력이 더해진다면 충분히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앞으로 더 나은 책을 기대해본다.


“후회란 놈은 꼭 이렇게 뒤통수를 친단게. 앞에서 오믄 을매나 좋아. 사람이 살믄서 후회를 어찌 안 하고 살겠느냐마는 자네는 그래도 후회를 돌이키기에 너무 멀리 가는 인생을 살진 말어. 그것만 명심해두 자알 산 거시여.”

p.221



<이 리뷰는 서평단으로 지원하여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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