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도서관
안토니오 G. 이투르베 지음, 장여정 옮김 / 북레시피 / 2020년 10월
평점 :
품절
작은 도서관 하면 나는 옆 아파트 단지 관리소에서 운영하고 있는 작은 도서관이나 지하철 역사 안에 있는 작은 도서관에 떠오른다.
하지만 이 책 제목의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도서관’은 그보다도 훨씬 작은, 책 여덟 권 그리고 사람들에게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를 해주어 살아있는 책이라고 불리는 여섯 사람이 전부인,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그 어떤 도서관보다 거대하게 느껴졌을, 그런 도서관이었다.
그리고 그 도서관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 안에 실재했으며, 디타라고 불리는 소녀가 그곳의 사서였다.
소설이 시작되기 앞서 위치한 발췌문을 보면 알겠지만, 독서가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싶은 알베르토 망겔도 저서 <밤의 도서관>에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안에 있었던 아주 작은 비밀 도서관에 대해서 언급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도서관>은 저자 안토니오 이투르베가 관련 자료를 조사하고 실존 인물인 디타 크라우스와 이야기를 나눈 뒤 상상력을 더해 써내려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 디타 아들러는 부족함 없는 가정에서 자라던 소녀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만행의 피해자가 된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유대인 게토를 거쳐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런 말을 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아우슈비츠는 죽음의 수용소라고 불릴 정도로 악명 높은 수용소였음에도 불구하고 (디타 크라우스의 말을 빌리자면) 엄청난 행운 덕분에 가족캠프라는 곳에 들어가게 되었던 디타는 아우슈비츠 내 다른 구역의 사람들보다는 그나마 나은 형편이었다.
역사상 모든 독재자며 폭군이며 압제자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이념과 상관없이, 아리아인이든 아프리카인이든 아시아인이든 아랍인이든 슬라브인이든 다른 어떤 인종이든, 대중혁명을 지지하든 상류층의 특권을 옹호하든 신의 뜻을 믿든 계엄령을 믿든, 그들은 책을 가혹하게 핍박했다. 책은 아주 위험하다. 책은 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p.18
아우슈비츠의 가족캠프 안에는 알프레드(프레디) 허쉬라는 유대인이 아이들을 모아서 돌보면 부모들의 노동력을 동원하기 쉬울 거라며 독일 관리당국을 설득해서 만든 막사가 있었는데, 31구역이라 불리는 그곳에서 프레디 허쉬와 몇 어른들이 비밀리에 아이들을 가르쳤다.
나치 독일은 강제수용소 내 아이들의 학습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들키면 절대 안 되는 비밀 학교였던 셈이다.
열네 살 소녀 디타 아들러는 그곳에서 여덟 권의 책을 관리하는 사서를 맡아 목숨을 걸고 책을 지킨다.
책은 단 여덟 권이지만 책이 허용되지 않는 강제수용소 안에서 책을 단 한 권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게 발각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이기에 수십 수백 권의 책보다도 크고 무겁게 느껴졌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검열로 나치 친위대가 막사에 들이닥쳤을 때 책을 미처 다른 장소에 숨기지 못해서 디타가 책을 옷 안에 넣고 정렬해야만 했던 상황이나, 끔찍한 생체 실험을 해서 죽음의 박사라고 불리며 악명이 자자한 멩겔레가 디타를 불러 세웠을 때는 아찔했다.
“이 책은 상태가 아주 안 좋아. 심각해.”
“제가 손볼게요.”
“그리고 어쨌든...... 아이들, 특히 여자아이들이 읽을 책은 아니야.”
디타는 기분 나쁘다는 듯 실눈을 떴다.
“진짜 죄송한데, 프레디, 저 열네 살이에요. 캠프 중앙로 저 끝에 가스실이 있고 매일같이 수천 명이 그곳으로 보내지는 걸 목격했는데, 그런데도 진짜 제가 아직도 소설을 읽으면서 충격받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허쉬는 놀라서 디타를 쳐다보았다.
(...)
디타는 받은 책을 전부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망가지거나 찢어지고 낡은, 적갈색 곰팡이가 잔뜩 핀, 훼손되기까지 한 책들이었다. 그러나 이 책들이 없으면 수세기 문명을 거쳐 전해진 지혜가 그대로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지리학, 문학, 수학, 역사, 언어...... 전부 소중한 것들이었다.
디타는 목숨을 걸고 이 책들을 지켜낼 것이다.
p.46-47
여덟 권의 책들은 도대체 어떤 책이기에 열네 살 소녀가 이렇게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했는지 나는 책을 읽기 전부터 무척 궁금했는데, 여덟 권의 책이 어떤 책인지 알고나서는 기대했던 책과 거리가 있어서 김이 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책을 계속 읽으며 너덜거리다못해 책장이 떨어져 나가고, 재미를 떠나 심지어 외국어로 쓰여 읽지도 못할 책들이 강제수용소 안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큰 의미였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강제수용소 안에 있었지만 지도책을 읽으며 전 세계를 비행했던 디타처럼 다른 사람들도 책을 접하고 배움을 이어가면서 강제수용소 바깥 세상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을 것이고, 책과 배움은 삶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 이토록 암울한 수용소이건만, 그래도 책을 보니 이보다는 덜 우울했던, 기관총 소리보다 사람들 말소리가 더 크게 울려 퍼지던 그런 시절이 떠올랐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를 다루듯 디타는 책을 한 권 한 권 조심히 만져보았다. 첫 번째 책은 철도 안 돼 있고 중간에 몇 장씩 없어진 데가 있는 지도책이었다. 책에는 과거의 유럽,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제국들이 담겨 있었다. 다홍색, 밝은 녹색, 주황색, 남색의 모자이크로 이뤄진 이 정치적인 지도들은 짙은 갈색 진흙, 빛바랜 누런 막사, 구름 낀 잿빛의 하늘까지 디타를 둘러싼 이 칙칙한 주변환경과 선명한 대조를 이뤘다. 책장을 손으로 빠르게 넘기자 마치 전 세계를 비행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바다와 산을 건너고 손가락으로 다뉴브강, 볼가강, 나일강을 따라 여행했다. 바다며 숲이며 전 지구의 산맥이며 강, 도시들, 세계 여러 나라까지 그 수백만 평방미터를 이렇게 작은 공간 안에 다 집어넣다니 책만이 성취할 수 있는 기적이었다.
p.45
나는 실존 인물 디타 크라우스와 소설 속 인물 디타 아들러를 보면서 <안네의 일기>로 알려진 안네 프랑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치 친위대의 앞에서도 품 안의 책을 놓지 않았으며 막사에서는 언변으로 좋은 자리인 위층 침대 자리를 얻어냈을 정도로 용감하고 재치있는 디타는 안네 프랑크의 또래였고,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와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에서 지냈다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네 프랑크는 슬프게도 강제 수용소에서 세상을 떠났지만 디타는 살아남아 강제 수용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디타가 살아서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디타 크라우스의 말대로 타고난 건강 체질과 엄청난 행운 덕분이라는 데에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그 이유들의 한편에, 조그마하게라도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안에서 만난 책들 또한 자리하고 있지 않을까?
제대로 먹을 수도 없어 굶주리는 나날이 이어질 뿐만 아니라 살아 나갈 가능성도 희박한 때에 책이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생각해보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도서관’은 나치의 악랄한 행위에 대적할 수 없었고, 가스실에세 학살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도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시커먼 구덩이 같은 그곳에서, 도서관이 들려주던 이야기의 힘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해냈습니다. 아이들이 아이들로 남을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결코 패한 게 아닙니다.
(...)
바르셀로나에서,
안토니오 이투르베
p.8
책이 쏟아지듯 출간되며 어디서든 어렵지 않게 책을 찾을 수 있는 곳에 나는 살고 있고, 이 책을 읽는 독자 대부분도 그러할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있을 때에도 내 옆에 있는 책상에는 책장이 받아들이지 못한 책이 쌓여 있었고, 책을 좋아하면서도 이사 때면 그렇게 쌓인 책을 무거운 짐으로 취급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도서관>을 읽고 책상 위의 책들을 바라보며 내가 책의 의미와 소중함을 잊어버린 건 아닌지 되돌아보는 시간도 가졌다.
<이 리뷰는 서평단으로 지원하여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