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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무늬
백희성 지음 / 북로망스 / 2026년 8월
평점 :
우리는 무엇을 무엇으로 기억할까
사람을 기억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거의 얼굴부터 떠올린다.
눈매와 표정, 웃을 때 생기는 주름 같은 것들.
그래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은 언듯 그 사람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뜻처럼 들린다.
백희성의 <기억의 무늬>는 바로 이 익숙한 믿음을 뒤집으며 시작한다.
주인공 카미는 얼굴을 구별할 수 없다.
대신 사람마다 다른 옷의 결, 자주 걷어 올린 소매의 주름, 목소리와 걸음걸이를 조합해 상대를 알아본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정보가 카미에게는 한 사람의 이름이 된다.
그 설정 덕분에 이 소설에서 ‘본다’는 행위는 눈의 기능만을 뜻하지 않는다.
많이 바라본다고 그 사람을 잘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얼굴을 기억하면서도 마음을 놓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카미의 세계를 따라가면 우리가 사람을 알아보는 방식이 생각보다 대충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표정 하나로 기분을 짐작하고, 옷차림 하나로 성격을 판단한다.
카미는 얼굴을 볼 수 없기에 오히려 한 사람에게 축적된 흔적을 더 세심하게 읽는다.
이제 결핍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다른 종류의 이해로 바뀐다.
손끝으로 추적한 19년
카미가 기억하는 것은 세 살 때 부모가 숨진 날 만졌던 검은 옷감의 촉감이다.
경찰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는 부모 외에 세 번째 실루엣이 있었다고 확신한다.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목격자가 단지 촉감으로 범인을 찾는다.
이 불가능해 보이는 조건은 미제 사건을 다시 구성한다.
옷은 입는 사람의 땀과 체취를 품고, 반복되는 움직임에 따라 닳고 주름진다.
낡은 가구 역시 손이 자주 닿은 자리와 고치지 못한 상처를 간직한다.
카미는 지문이나 몽타주 대신 직물의 박음질과 나뭇결 같은 걸 증거로 삼는다.
범인을 쫓는 과정은 이제 어딘가에 기록된 삶을 판독하는 일이 된다.
작가는 건축디자이너로의 이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는 작은 소품도 허투로 대하지 않는다.
누가 만들었고, 누가 사용했으며, 왜 특정한 흠집을 고치지 않았는지는 한 가족의 시간을 추측하는 증거가 된다.
셜록이 주로 이런 일을 했던 것 같은데 뭔가 좀 흥미로웠다.
사물이 기억하는 것들
소설의 출발점은 살인 사건이지만 결국에는 이야기는 기억을 되짚어 가는 과정이다.
기억은 영상이나 사진처럼 보관되지 않는다.
기록한 이에 따라서 어떤 날은 냄새로 돌아오고, 어떤 사람은 낡은 셔츠의 촉감이 된다.
머리는 잊었는데 몸이 먼저 반응하는 순간도 있다.
카미는 바로 그런 기억의 조각을 이어 붙여 자신의 과거로 돌아간다.
제목은 ‘기억의 무늬’다.
무늬는 실 한 가닥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서로 다른 색과 굵기의 실이 교차하고, 때로는 매듭이 생기며 하나의 형상이 된다.
카미의 기억도 그렇다.
상처와 오해, 사랑과 결핍이 겹쳐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때론 지우고 싶은 부분까지 포함해야 비로소 그림은 완성된다.
여기서 소설은 범인을 맞히는 재미에서 한 사람을 무엇으로 기억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간다.
이사를 하며 버려야 할 물건들을 왕창 꺼냈다.
누군가는 그것들을 버려야 한다고, 남겨야 하면 사진을 찍어두라고 했지만 무언가를 함부로 버리지 못하는 나는 정말이지 한참을 어려워 했다.
그 대부분의 물건에는 대단한 경제적 가치가 없었다.
닳은 머그잔, 늘어난 스웨터, 모서리가 깨진 가구. 남이 보면 낡은 물건인데 내게는 특정한 사람과 시간이 들어 있다.
그들은 이미 내 곁에 없지만 이것들을 만질때 그들에 대한 기억이 되 살아난다. 사물은 그런 것이다.
사랑이 새겨진 자리
카미는 범인을 찾기 위해 과거로 향하지만, 그 끝에서 확인하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사랑받았는가에 관한 기록이다.
자신을 괴롭혀 온 기억이 전부 불행의 증거라고 믿었는데, 같은 자리에는 자신을 지키려 했던 누군가의 마음도 함께 새겨져 있었다.
상처와 사랑이 서로 다른 곳에 보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무늬 안에 함께 들어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이 소설의 가장 큰 반전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사람의 얼굴부터 기억하려 한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얼굴의 세부보다 그 사람이 건넨 말, 손의 온도, 함께 쓰던 물건이 더 또렷해지기도 한다.
무언가를 제대로 기억한다는 것은 모든 장면을 정확하게 복원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그 사람이 내 삶에 만든 흔적을 알아보는 일, 그 흔적으로 인해 지금의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확인하는 일일 수 있다.
<기억의 무늬>는 속도감 강한 추리소설을 원하는 독자보다 사물과 공간에 스민 사람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에게 더 잘 맞는다.
책을 덮은 뒤 주변을 한번 살펴보자.
버리지 못하고 곁에 둔 물건 하나가 있다면, 그 안에는 누구의 시간이 새겨져 있는지도 떠올려보자.
그 안에도 분명 사랑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