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들판 - 침묵은 어떻게 역사를 드러내는가
마거릿 주혜 리 지음, 장상미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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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도 상속된다


술만 마시면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레파토리 몇 개가 있다.

지겹고 질리도록 들은 이야기는 언젠가부터 나의 이야기가 된다.

나의 아버지가 고민하고 결정했던 지점에는 나도 같이 서있고, 그의 고민을 나도 함께 한다.


그러고보면 가족에게서 물려받는 것은 얼굴이나 성격만이 아니다.

반복해서 듣는 이야기도, 그리고 집안의 누구도 말하지 않는 어떤 것도 물려받는다.

집안에서 자란 아이는 그 빈 공기, 누구도 설명하지 않은 집안의 공허도 함께 배운다.


마거릿 주혜 리의 <비밀의 들판>은 바로 그 공허에서 시작한다.

저자는 휴스턴에서 자라지만 미국에서도 이방인, 한국에서는 미국인으로 여겨진다.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그녀가 느끼는 공허의 끝에 모든 가족이 입을 다문 할아버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알고 있는 할아버지에 관한 정보.

전과자, 공산주의자, 집안의 수치.


어른의 침묵은 그 가족을 지키기도 하고 한 사람의 이름을 지우기도 한다.

하지만 그 침묵은 손녀가 자신을 이해하는 길까지 막아선다.

그녀는 이제 그토록 꺼려왔던 그 이름을 불러 내려고 한다.



할아버지를 찾아서


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를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할아버지 이철하는 스물일곱에 세상을 떠났고, 가족이 아는 그의 생애에는 수감과 수치라는 낙인만 붙어 있다.

아버지도 할아버지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지만 병으로 멈추고 그 과업은 딸이 이어받는다.


다른 것보다 사실 이게 좀 궁금했다.

왜 우리는 늘 자신의 뿌리를 찾고 싶어할까.

그 끝에 마주할 수 없는 어떤게 있을지도 모르는데 우리는 왜 굳이 그 일을 알고 싶어하는 걸까.


마거릿은 할머니를 세 차례 인터뷰하고 한국의 기록 보관소와 사람들을 찾아다닌다.

흩어진 문서를 맞추자 전과자라던 남자는 일제강점기 공주에서 항일 동맹휴학을 이끌고 비밀결사에 참여한 학생 운동가 이철하로 돌아온다.


일본 제국이 범죄자로 만든 청년을 해방된 나라가 독립유공자로 다시 부르기까지 약 6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할아버지는 그 기간 동안 국가 뿐 아니라 가족에게도 철저히 외면당했다.



영웅과 영웅의 부재를 견뎌낸 사람


이제까지의 이야기는 잃어버린 영웅,

그것도 나의 자랑스런 할아버지를 찾는 이야기다.

그런데 <비밀의 들판>이 더 복잡해지는 지점에는 할머니가 있다.


어린 나이에 이철하와 결혼한 할머니는 남편의 투옥과 죽음 뒤에 두 아들을 혼자 키워내야 했다.

식민 지배와 해방, 전쟁과 반공의 시대에 독립운동가와 공산주의자의 아내라는 이름은 결코 내세울 수 있는 이름이 아니다.


결국 할머니는 남편의 기록을 없애고 남편에 관한 모든 것에 입을 닫는다.

이 침묵이 온 가족이 지닌 상처와 공허의 원인이지만 그 시절을 살아내야 했던 할머니에게는 가족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같은 행동이지만 어떤 세대에는 방패가 되고 어떤 세대에는 상처가 되는 일.

저자는 이 간극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다.

그 침묵의 좋고 나쁨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


마거릿의 취재는 할아버지 뿐 아니라 할머니에게도 시대를 살아낸 이야기가 있었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된다.

영웅과 그 영웅의 부재를 평생을 감당해온 사람의 생애는 같은 무게로 존중 받아야 한다.



당신의 역사도 새롭게 쓰이길


책은 세 차례의 할머니 인터뷰를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 한국과 미국, 가족사와 저자의 성장기를 오간다.

같은 기억을 여러 각도에서 되짚고 자료를 구하는 과정은 느리고 길고 꼼꼼하다.


그리고 이 더딤은 가족의 기억이 복원되는 모습과도 닮아있다.

한 번의 증언으로 모든 것이 명확해지지 않고, 기록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 밑바닥의 사정까지 설명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보면 역사는 객관적 팩트라기 보단 서로 다른 기억과 문서를 대조해 누군가에 의해 그냥 쓰이는 것이다.


<비밀의 들판>을 읽으며 우리가 역사라고 배운 이것들을 교과서는 식민 지배와 해방, 전쟁과 분단으로 설명하지만,

한 가족에게 역사는 불태운 문서 한 장이고, 부르지 않는 이름이며, 아이에게 끝내 들려주지 못한 아버지의 이야기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거릿은 할아버지를 찾으려다 아버지를 이해하고, 할머니를 새로 바라보며, 자신의 아이들에게 건넬 가족의 기록을 만든다.

한 사람이 자신의 가족을 기록하기 시작하자 집안의 수치로 불리던 이름은 한국 현대사의 한 자리로 돌아온다.


나는 나의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부끄럽지만 거의 아는게 없다.


쑥쓰러운 일이지만 나의 가족에게도 그 시절의 평범한 하루 하나를 물어보면 어떨까.

대단한 간증보다 무엇을 먹고, 어디로 걸었으며, 무엇을 두려워했는지부터.


우리의 역사, 그 뿌리는 이 대답에서 다시 시작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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