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한 마음에 이름 붙이기 - 현대인을 위한 정신분석사전
노은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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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되지 않는 감정들


요즘 보기 시작한 JTBC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줄여서 <모자무싸>를 넷플릭스에서 정주행 중이다.

인생드라마라는 평이 많아서 아끼고 아끼다 이제 시작했다.

드라마에는 쉽게 정의되지 않는 감정들이 나온다.


잘되고 싶으면서 잘된 친구를 견디기 힘들고, 사랑받고 싶으면서 누가 안으로 들어오면 먼저 밀어낸다.

인물들은 못났고 이기적이다가도 뜬금없이 다정하다.

보고 있으면 '저 사람 왜 저래'와 '나도 저런데'라는 마음이 동시에 올라온다.


아직 드라마가 채 끝나기 전인데 이 책 <모호한 마음에 이름 붙이기>라는 제목을 보았다.

사실 그래서 더 관심이 갔다.


이 책은 드라마 속 인물들의 마음뿐 아니라 그들을 보며 흔들리는 내 감정에도 이름을 붙여줄 수 있을까.

그리고 한참을 읽었다.

다 읽고 한참을 책을 덮고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답을 얻어서가 아니었다.

내가 별뜻 없이 지나친 마음들이 이미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감정은 언제나 단순하지 않다. 그리고 단순하지 않아도 괜찮다.'(p.91~92)


모순되는 감정이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한쪽이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미울 수 있고, 떠나고 싶으면서 붙잡히고 싶을 수 있다.


나는 그 복잡함을 성격의 문제로 넘겼지만, 실은 제대로 분류하지 못했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애쓰지 않은 척 애쓰기


애쓰지 않게 보이기 위해 애쓰는 모습.


책은 이를 EP문화라는 개념을 설명한다.

일은 빈틈없이 해내되 힘들어 보이면 안 되고, 자기 관리는 철저히 하되 무엇도 포기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여야 한다.


성취만 요구하는 것도 벅찬데 이제는 성취하는 표정까지 관리해야 한다.

최선을 다한 흔적을 들키면 세련되지 못한 사람이 되고, 실패하면 재능이 없다는 판결을 받을까 봐 우리는 '별로 노력하지 않았다'는 문장을 보험처럼 꺼낸다.


책은 또 비정상적일 만큼 정상적이려는 마음도 우리에 보여준다.

노모패시는 사회가 정한 정상성에 자신을 맞추느라 내면의 감정과 욕구를 밀어내는 상태를 가리킨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아 보여야 하고, 화가 나도 적절한 방식으로만 화를 내야 한다.

아픔에도, 아니 어떤 감정에도 사회가 허락한 모양이 있는 셈이다.


이러니 아무 일도 하지 않은 날보다 아무렇지 않은 척한 날에 더 지칠 수밖에 없다.



사랑과 부재 사이


금사빠.


누군가에게 금세 빠지는 사람을 우리는 이렇게 부른다.

반은 농담이고 반은 핀잔이다.

책은 강렬한 사랑의 환상을 만드는 마음을 '리머런스'라는 말로 더 세밀하게 본다.


이것은 사랑이 빠른 성격만을 뜻하지 않는다.

상대가 실제 어떤 사람인지보다 내가 바라는 모습과 반응을 그 사람 위에 겹쳐 놓고, 사소한 신호 하나에 천국과 바닥을 오가는 마음까지 포함한다.


반대의 모습으로 대상항상성이라는 개념이 있다.

상대가 눈앞에 없거나 연락이 잠시 끊겨도 관계 전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느낄 수 있는 힘이다.


부재를 견디는 마음은 사랑하지 않는 마음이 아니다.

눈앞의 공백을 곧바로 버림받았다는 증거로 해석하지 않는 마음이다.


사람의 마음을 한 단어로 규정하는 일은 위험하지만, 단어 하나가 관계의 장면을 다시 보게 만들 때가 있다.

금사빠라가 대상항상성을 지닌 이로 변해간다면 사랑이라는 같은 이름의 감정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잘되는 것이 두려운 이유


요나 증후군이라는 게 있는지 처음 알았다.

뭐랄까. 내 얘기 같아서 좀 마음이 그랬다.


실패가 무섭다는 말은 누구나 하는 말인데 성공이 두렵다는 말은 선뜻 생각하기 어려웠다.

잘되고 싶은데, 진짜 기회가 오면 한발 물러선다.

강요받은 겸손인지 뭔지는 모르겠으나 잘되면 더 잘해야 하고, 기대를 받으면 다음에도 증명해야 하며, 지금의 관계와 생활이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성공은 환호만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변화와 책임도 함께 데려오는 법인지라..


그래서 충분히 준비하고도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할 수 있는 일도 우연히 잘된 것처럼 축소한다.

원하는 것이 눈앞에 왔는데도 그것을 원하지 않았던 척할 때도 있다.


요나 증후군이라는 이름을 읽으며 나는 내가 피한 것이 실패뿐이었는지 생각했다.

혹시 달라질 나를 감당하기 싫어서 아예 시작을 미룬 적은 없었을까.


자꾸 도망가려는 이유를 알아야 다음에는 도망치는 대신 선택할 수 있다.

잘되고 싶은 마음과 잘되는 것이 두려운 마음. 둘은 내 안에서 화해할 수 있을까.



이름표가 정답은 아니다


책은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지금 자신에게 걸리는 장을 골라 펼칠 수 있고, EP문화나 요나 증후군처럼 처음 듣는 개념이 익숙한 일상을 새롭게 설명해준다.

반면 낯선 용어가 연이어 등장하다 보니 읽는 흐름이 사전처럼 끊길 때도 있다.

하나의 사례가 나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자신이나 타인을 특정 개념에 넣고 싶어질 위험도 있다.


책의 제목은 모호한 마음에 이름 붙이기다.

그렇게 이름표를 붙여보려는 찰나, 이름표가 그렇게 중요한가라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요나 증후군이야'라고 결론 내리기보다 '내게도 이런 마음이 있구나'에서 잠시 멈추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이름을 알게 된 뒤에 필요한 것은 진단이 아니라, 그 마음이 언제 시작됐고 무엇을 지키기 위해 생겼는지 살피는 일일 것이다.


오랜만에 쳅터 하나하나를 꼼꼼히 새겨가며 읽었다.

책은 이해할 수 없던 마음을 이상함이나 결함으로 몰아붙이지 않고, 그 안에도 사연과 기능이 있다고 말해준다.


<모자무싸>의 인물들이 한 단어로 설명되지 않듯 우리도 그렇다.

사랑과 미움, 욕망과 두려움, 애씀과 포기가 한꺼번에 들어 있다.

복잡한 것과 틀린 것은 다른 개념이다.


오늘 대답하지 못한 감정이 있다면 그 감정에 이름을 한번 지어주는 건 어떨까.

딱 떨어지는 답을 찾지 못해도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판결은 미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 때문에 스스로를 몰아붙였던 사람에게,

그냥 지금 내 마음을 모르겠다는 사람에게 추천. 아니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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