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이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9
장강명 지음 / 현대문학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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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

생각도 하기 싫은 일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건 어떤 것일까.
나는 그 슬픔에서 과연 헤어 나올 수 있을까.
만약 헤어나오게 된다면 그 이후에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서성이다>를 읽는 내내 이 생각을 피할 수 없었다.
소설은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난 뒤를
 보다 더 무서운 시간, 아직 아무것도 확정되지 않았는데 이미 이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순간을 다룬다.
안시찬은 아내 이지수의 곁을 지키면서도 계속 최악을 상상한다.
사랑하는 이를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현재의 고통으로 끌어온다.

이 소설에서 사랑은 병원 복도를 서성이는 발걸음, 알아들을 수 없는 의학 용어를 붙잡는 일, 의식이 흐릿한 아내 대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시간으로 드러난다.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다는 예감 앞에서 더 선명해지는 사랑.
그 사랑을 그린다.


그럼에도 도착하는 청구서


아내가 중환자실에 있는데 이사 잔금일은 다가온다.
계약과 통장은 아내 명의이고 남편은 비밀번호를 모른다.
가족에게 상황을 알려야 하고, 의료진의 말을 이해해야 하며, 취소하기 어려운 방송 일정도 결정해야 한다.
세상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현실은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시찬은 그런 일을 처리하는 자신을 보며 소시오패스가 아닐까 의심한다.
아내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돈과 일정부터 계산하는 자신이 끔찍하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사람이 슬픔을 견디는 방식을 보았다.
누군가는 서류를 챙기고, 전화를 걸고, 잔금을 마련해야 한다.

해야 할 일을 한다는 사실이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는 아니다.
때로 그것은 지금 할 수 있는 거의 전부이기도 하다.

장강명은 비극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덮지 않는다.
응급실과 중환자실 사이에 은행 계좌와 부동산 계약을 끼워 넣는다.
삶은 가장 큰 슬픔과 가장 치사한 실무를 같은 날 내민다. 
우리는 울면서도 다음 통화를 건다.


고통은 그저 고통일 뿐


시찬은 아내가 아픈 이유를 자기 안에서 찾는다.
자신이 일을 부추겼기 때문인지, 더 몰아붙였기 때문인지, 아내의 힘듦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인지 지난 기억을 하나씩 꺼내 유죄의 증거로 만든다.
의사는 뇌종양의 원인을 알 수 없으며 ‘그냥 생긴다’고 말하지만, 그는 우연을 견디지 못한다.
원인이 없다면 탓할 사람도, 되돌릴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고통을 통해 성장한다니, 그 얼마나 대단한 나르시시즘이냐.’(p.215)

이 문장은 <서성이다>가 쉽게 위로를 건네지 않는 이유를 보여준다.
누군가의 병을 다른 사람의 깨달음으로 바꾸는 순간, 아픈 사람의 고통은 서사의 재료가 된다.

시찬은 이 일을 통해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아내의 뇌종양에 감사하지 않겠다고,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을 그럴듯한 의미로 포장하지 않겠다고 버틴다.

나는 이 완강함이 좋았다.
모든 시련에 교훈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설명되지 않는 불행 앞에서는 해답을 찾기보다 아프다고 말하는 일이 먼저일 수 있다.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그것도 고통을 통과하는 한 방법이다.


자전적 소설의 힘

이 작품의 힘은 실제 경험과 허구가 맞닿은 자리에서 나온다.
작가가 겪은 감정이 안시찬에게 스며 있고, 독자는 소설 밖 현실을 알고 읽는다.
병원에서의 공포와 느닷없이 터지는 울음은 꾸며낸 비극이 아니다.

시찬의 자기혐오와 죄책감이 거듭 이어지는 중반부에서는 숨을 돌릴 틈도 없다.
이는 현재 장강명 작가의 사정과도 맞물려 있기도 하다.
그래서인가. 감정의 밀도가 높고 읽다보면 책이 버겁게 느껴질 때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시찬은 계산하고, 의심하고, 자기 잘못을 찾는다.

소설은 끝내 이 모순을 정리해 주지 않는다.
답을 찾지 못한 이들은 계석 그 자리를 맴돈다.
제목이 왜 <서성이다>인지 이해하게 된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될까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간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지 모르는 슬픔에서 나는 헤어 나올 수 있을까.
이 책을 읽고도 답은 얻지 못했다.

아마 <서성이다> 역시 답을 주려는 소설은 아닐 것이다. 
대신 사랑은 우리가 믿어온 이성과 질서를 얼마나 쉽게 무너뜨리는지, 그 폐허에서 사람이 무엇을 붙잡는지를 보여준다.

무신론자였던 시찬은 설명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기도의 언어를 떠올린다.
믿음이 생겨서라기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더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믿지 않던 존재의 문 앞에서도 서성일 수 있다.
그 절박함을 누가 어리석다고 말할 수 있을까.

큰 슬픔을 지나게 된다면 나는 이전과 같은 사람일 수 없을 것이다.

꼭 성장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사랑했던 시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닐 테다.
사랑과 상실에 쉬운 위로를 붙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서성이다>를 읽어보길 권한다.

그리고 책장을 덮은 뒤, 지금 곁에 있는 사람에게 미뤄둔 말을 건네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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