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얼 의과학사 - 그림으로 읽는 의과학 혁명의 순간들
유임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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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뒤에 사람이 있다


아이가 아프면 가장 먼저 찾는게 체온계다.

사실 체온이 정상이면 약간의 이상증상이 보여도 나름 안심이 된다.

반대로 아무리 멀쩡해도 체온이 37.5도를 넘어가는 순간 머리가 하얘진다.


그런데 체온이 몸의 상태를 말해 준다는 사실도, 심장이 밀어낸 피가 다시 돌아온다는 사실도 한때는 증명해야 할 가설이었다는 걸 아는가?


누군가는 거대한 저울 위에 앉아 몸무게의 미세한 변화를 기록했고, 누군가는 살아 있는 동물의 혈관을 묶었으며, 누군가는 심장이 한 시간에 내보내는 피의 양을 계산했다.

지금의 상식이 그 언젠가의 사람들에게는 꽤 이상한 집착으로 보였을 것이다.


유임주의 <비주얼 의과학사>는 바로 그 낯선 시절로 독자를 데려간다.

40개의 혁명적인 순간과 150여 점의 그림을 따라가다 보면 의학은 완성된 지식의 목록이 아니라 몸을 더 정확히 읽기 위해 계속 질문을 고쳐 온 과정이다.



당연한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책에는 꽤 많은 그림이 등장하는데 처음에는 그저 예전에는 그랬지를 보여주는 장식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읽다보니 그 시대의 사람이 어디까지 볼 수 있었는지를 증명하는 어떤 기록같은 것임을 알게됐다.


베살리우스의 근육 해부도는 책 속 권위보다 눈앞의 몸을 믿겠다는 선언이었고, 하비의 혈액순환 도해는 장기를 따로 보던 시선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바꾸는 기록이었다.

레이우엔훅의 스케치는 맨눈으로 볼 수 없던 생명을 지식의 자리로 불러냈다.


존 스노의 콜레라 지도도 그렇다.

그는 병원체를 직접 보지 못했지만 환자가 발생한 장소를 지도 위에 표시해 오염된 식수 펌프를 찾아냈다.

원인을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해도 패턴을 정직하게 기록하면 사람을 살릴 수 있었다.


이후 X선은 몸을 열지 않고 안을 보게 했고, MRI는 수소 원자핵의 신호로 인체 내부를 영상으로 바꾸었다.

의학의 발전은 이미 있는 것을 더 잘 암기한 이들이 만든 결과가 아니라, 같은 몸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본 사람들이 만든 결과였다.


책장을 넘기며 내가 알고 있는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언젠가 본 내 몸의 엑스레이, 빼곡한 숫자로 가득찬 감진표들.

우리는 이것을 사실이라 생각하지만(사실 뭐 사실 맞긴하다), 그런데 이것을 어떤 의사가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의미는 달라진다.

<비주얼 의과학사>는 이렇게 같은 숫자를 보고도 해석이 다르다는 사실을 꽤 설득력 있게 보여 준다.



찾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


새로운 사실을 찾는 것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이 더 어려울 때가 있다.

제멜바이스는 의사의 손에 묻은 오염물질이 산욕열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은 지극히도 당연한 시술 전 손 씻기를 제안했고 그것만으로 사망률을 크게 낮췄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의료진에 의해 사망률이 높아진다는 주장은 팩트와 별개로 의사들의 자존심을 크게 긁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진실이 곧 상식이 되지 않는다.


책은 의학사를 승리한 천재들의 행진으로 만들지 않는다.


파스퇴르와 코흐의 경쟁, 인슐린 특허를 공익을 위해 넘긴 선택, DNA 구조 규명 과정에서 충분한 공을 인정받지 못한 로절린드 프랭클린의 사례가 함께 등장한다.

발견에는 야망도 있고 우연도 있으며, 협력과 배제도 있다

사실 좋은 목적을 가진 의사, 과학자라고 해서 언제나 좋은 선택만 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의학의 품격은 무엇을 알아냈는가가 아닌 그 지식을 누구와 나누었고, 환자의 고통을 실제로 줄였는지,

나아가 그 일을 함꼐한 다른 사람의 기여를 제대로 기록했는지까지 물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는 기술이 빠르게 앞서가는 지금, 우리에게 더 필요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두껍지만 얇은 책


책은 충분히 두껍지만 그래도 고대의 해부 기록부터 줄기세포와 암 유전자까지 40개의 큰 사건을 담다 보니, 개인적으로는 한 인물과 논쟁이 막 흥미로워질 때 다음 주제로 넘어가는 경우가 있었다.

150여 점의 도판은 이해를 돕지만 본문과 설명을 오가며 읽어야 하므로 호흡을 길게두고 읽기를 권한다.


특히 과학적 발견의 사회적 비용이나 연구윤리의 갈등을 더 깊게 읽고 싶은 이들은 이 책의 에피소드들을 접하고 조금 더 깊게 다른 책을 선택해도 좋을 것 같다.

그만큼 에피소드들은 흥미롭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은 정말 그런가


돌이켜보면 오늘의 일상은 누군가 자기 시대의 상식에 ‘정말 그런가?’라고 물었던 결과다.

틀린 답도 다음 질문의 발판이 되었고, 실패한 실험도 다른 사람의 시간을 줄였다.


그러고 보면 과학은 정답을 많이 가진 상태라기보다 틀릴 가능성을 열어 둔 사람들에 의해 발전해왔다.

권위보다 몸을 보고, 추측보다 기록하며, 성취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태도.

의학이 생명을 다루는 학문이라면 새로운 기술만큼 그 기술을 사용할 사람의 겸손도 함께 발전해야 한다.


<비주얼 의과학사>는 의학에 대해 막연히 어렵고 차가운 지식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특히 권하고 싶다.

그림을 따라가다 보면 그 안에서 보이는 것은 장기와 세포가 아니라 아픈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던 질문, 자기 오류를 고친 사람, 다음 세대가 다시 확인할 수 있도록 기록한 사람이다.


당신이 당연하다고 믿는 건강 상식은 누구의 질문에서 시작됐을까.

꽤 흥미로운 책을 또 한 권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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