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평등사회 프로젝트 - 노동과 여성·청년이 만나면 세상이 바뀐다
조돈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7월
평점 :
당신은 삼전닉스를 가지고 있나요?
2026년 5월, 역대급 주가의 고공행진을 펼친 삼성전자 성과급 협상이 파업 직전 극적으로 타결됐다.
청와대는 "국가와 국민 모두를 위한 노사의 대승적 결단"이라며 반겼다. 그런데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협상 과정에서 불거진 노조 내 갈등과 차별 처우, 그걸 지켜본 시민들이 느낀 상대적 박탈감과 소득 양극화에 대한 불만은 어디로 갔나.
조돈문 교수는 이 장면을 두고 초기업노조의 극단적 집단 이기주의와 그런 노조를 키워낸 삼성 재벌, 시장의 '모범 사육'이 빚어낸 최악의 담합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 합의 소식을 들으며 비슷한 찜찜함을 느꼈던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두 달이 지난 지금도 그 불씨는 꺼지지 않은 것 같다.
반도체 부문(DS)은 1인당 최대 6억 원, 디바이스 부문(DX)은 600만 원 수준의 자사주. 같은 회사 안에서 이 정도 격차가 벌어진다면, 그 격차는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정당화되는 걸까.
자회사 안에서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 반도체 초호황이 만든 초과이윤은 결국 누구의 몫이었나.
AI와 코스피 9000 시대, 겉으로는 모두가 잘사는 것처럼 보이는 이 시기에 이 책은 하필 그 이면을 파고든다.
우리는 왜 불평등을 참으면서 미국을 좋아하는가
전작 <불평등 이데올로기>에서 저자가 던진 질문은 이거였다.
시민들은 불평등에 불만을 토로하면서, 왜 세상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 중 하나인 미국은 계속 선망하는가.
책은 모든 나라의 시민이 사실 피라미드형 소득분배보다 다이아몬드형을 선호한다는 걸 데이터로 짚는다.
스웨덴이 그 다이아몬드형에 가장 가깝고, 미국은 정반대편의 전형적 피라미드형이라는 것.(p.46)
그런데도 "한국의 시장경제가 미국식 자유시장경제 모델에 가깝고 자본과 보수정당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 세력은 미국식 모델을 집행하는 동시에 이데올로기적으로 방어하고 적극적으로 홍보한다."(p.71)
안타까운 사실은 그 반대편에서 북유럽 모델을 대변할 세력은 마땅히 없다는거다.
책은 그 정보 비대칭이 불평등체제를 지탱해 온 힘이라고 진단한다.
<평등사회 프로젝트>는 그다음 질문으로 넘어간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저자가 고른 벤치마킹 대상은 역시 스웨덴이다.
스웨덴 모델과 비개혁주의적 개혁이라는 말
스웨덴이 세계 최고 수준의 성평등 복지국가라는 건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다만 이 책이 흥미로운 지점은 스웨덴 모델을 낭만화하지 않고, 노동계급이 그 모델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만들어왔는지 과정 자체를 짚는다는 것이다.
저자가 제안하는 전략의 이름은 '비개혁주의적 개혁'.
작은 개혁으로 신뢰를 쌓고, 그 신뢰를 발판으로 점차 개혁의 수위를 높여 더 큰 변화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그러려면 불평등체제의 피해자들이 권리 의식을 발전시키고 스스로 주체가 되어, 집합적 요구를 중심으로 위력을 행사하며 변화를 압박하는 동원 과정이 필요하다고 책은 말한다.(p.165)
사실 말은 쉬운데, 그 동원이 실제로 누구에 의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이야기하자면, 이야기는 조금 복잡해진다.
노동조합은 동맹의 중심이 될 수 있는까
저자는 노동계급을 사회 통합과 변혁의 구심점으로 놓고, 노동, 여성, 청년 동맹을 해법으로 제안한다.
그런데 이 책도 인정한다.
겉으로는 사회 전체의 불평등을 줄이는 역할을 한다고 말하는 이들조차 정작 자기 조직 안의 불평등에는 소극적라고.
사실 그렇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내 이익이 걸린 불평등에는 목소리를 높이면서, 그 불평등 개선의 주체가 자신이 될 가능성이 있다면 이내 목소리를 낮춘다.
이는 노동조합도 마찬가지다. 비정규직처럼 취약한 사람들까지 포함한 노동자 전체의 이익보다는, 이미 자리를 잡은 정규직의 이익을 먼저 챙기는 집단이 되어버린 곳도 비일비재하다. 삼성전자 성과급 사태에서 저자가 초기업노조를 집단 이기주의라고 비판했던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최근 시행된 노란봉투법을 둘러싼 논쟁도 비슷하다.
하청 노동자를 직접 고용하겠다면서 정작 노조와의 협의는 건너뛰는 원청이 늘고 있다는 소식은,
이 책이 말하는 노동계급 내부의 대표성 문제를 다른 자리에서 다시 확인시켜준다.
그렇다면 노동조합을 평등사회의 구심점으로 세우자는 제안과, 노동조합의 이기주의를 비판하는 진단은 어떻게 양립하는가.
책은 이 긴장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한 채 가능성과 한계라는 두 단어 사이를 오간다.
비개혁주의적 개혁이 우아한 절충안처럼 들리지만, 정작 그 개혁을 밀고 나갈 주체의 대표성 문제는 다소 낙관적으로 남겨둔 건 아닌지 묻고 싶어진다.
당신의 자리의 불평등
그렇다고 이 책이 덜 중요한 건 아니다.
오히려 그 긴장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데이터와 논리로 밀어붙인다는 점에서 이 책은 반드시 읽어볼 법한 책이다.
저자 스스로도 이 책은 가볍고 편안하게 술술 읽히지는 않을 거라 경고했다는 점은 미리 말해둔다.
그런데 그런 불편함이야말로 어쩌면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작은 개혁부터 신뢰를 쌓아가자는 제안이 순진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 순진함을 감수하고서라도 뭔가는 시작해야 한다는 절박함이다.
생각해보라. 크고 작은 불평등의 자리에 서 있을텐데,
당신은 지금의 불평등을 언젠가 나아질 거라 믿으며 견디고 있는가 혹 그 불평등의 이데올로기를 이미 받아들인 것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