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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 ㅣ 박완서 산문집 10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월
평점 :
여행이 아니라 시선에 관한 이야기
여행에 관한 책을 좋아한다.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사람이 가장 쉽게 떠날 수 있는 곳이 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통해 참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저자와 그 시선에 따라 내가 걷고 볼 수 있는 곳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더 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조금만 더 보았다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그런데 박완서 선생님이 쓴 여행기라니.
안 읽을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 책은 세계 곳곳을 다닌 선생님이 어디를 다녀왔는지 보다 그곳에서 어떤 것을 바라보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 시선. 대가의 시선을 따라 하는 여행은 생각보다 더 즐겁다.
낯선 곳에서 다시 만나는 나
이 책의 여행은 낯선 풍경을 설명하는데 많은 글자를 할애하지 않는다.
대신 그 풍경 앞에선 선생님의 마음을 들려준다.
선생님은 그 낯선 땅 앞에서 남의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경험이라고 우리게 말한다.
천생이 뚜벅이 스타일인 나는 여행을 가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뭐든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경험하려 애쓴다.
그렇다 보니 그 긴 하루에서 무언가를 판단하고 비교하는 일 또한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그런데 이 책은 우리 삶의 그 모든 습관을 잠시 내려놓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덜 판단하고, 덜 비교하고, 그저 바라보는 것.
이때 여행은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태도가 된다.
그리고 그 태도는 결국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다.
부드러운 문장, 그러나 묵직한 질문
여느 선생님의 책이 그렇듯 선생님의 문장은 어렵지 않다.
마치 누군가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그리고 그 부드러운 문장 사이로,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질문들이 숨어든다.
유니세프의 친선대사였던 선생님은 빈곤과 재난의 현장에도 자주 나가셨던 것 같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주한 인간의 존엄을 생각하게 만드는 장면들.
작가는 묻는다.
"왜 인간인가"
인류의 비극을 마주하며 시작된 질문은 대답을 거듭하다 결국 아주 사적인 자리로 내려온다.
결국 이러한 세상에서 나는,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책을 읽으며 괜스레 조금씩 넓어지는 느낌이 들었던 이유도 아마 이 질문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호강의 재정의
우리는 보통 호강을 남의 기준으로 이해한다.
더 좋은 것, 더 비싼 것, 더 특별한 경험.
선생님은 말한다.
호강을 남의 기준이 아니라 내 나름으로 생각하는 순간, 그때 비로소 호강이 시작된다고.
우리는 꽤 많은 것을 타인의 기준으로 평가한다.
그 비교 속에서 살아가며 우리는 많은 것을 놓치고야 만다.
생각해 보라.
어쩌면 우리 삶의 많은 순간들은 이미 충분히 괜찮은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을 내 기준으로 바라보지 못했을 뿐.
우리는 이미 호강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것을 모른 채 거부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떠나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
책에는 선생님이 떠나고 난 뒤에 미처 출간되지 못한 미출간 원고들이 함께 실려 있다.
출간을 위해서는 한 번쯤 다듬어졌겠지만
책의 문장들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다듬어진 문장이 아니라, 살아가며 남겨둔 기록들 같기도 했다.
그곳에서만 보이는 솔직함이 뭐랄까 난 좋았다.
길지 않은 책은 금방 읽힌다.
그리고 책을 덮고 나니 어디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보다 이런 질문이 남았다.
나는 지금 여행자로 살고 있는가.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는지, 나의 삶을 내 기준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어쩌면 여행은 장소가 아니라 우리가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이런 태도가 아닐까.
지금 떠나지 못해도 괜찮다.
다만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 우리의 일상은 이미 충분히 다른 풍경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