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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말 - 나를 향해 쓴 글이 당신을 움직이기를 ㅣ 이어령의 말 1
이어령 지음 / 세계사 / 2025년 2월
평점 :
한 권으로 만나는 사유의 지도
<이어령의 말>은 어록집의 형태를 빌리고 있지만, 실제로는 거의 처음 보는 것 같은 책이다. 사전 같기도 하고, 인생의 명언을 모아둔 책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설명 보다 한 사람이 평생 붙들고 씨름해온 질문과 언어의 궤적을 따라가게 만드는 사유의 지도라는 설명이 더 적확해 보인다. 책은 이어령 선생의 저작물을 망라하여 선생이 우리 생에 던져진 평범한 그 단어를 어떻게 자기만의 언어로 사유했는지를 집대성했다. 이 방대한 단어와 사유의 물결 앞에 ‘우리 시대의 지성’이라는 수식어가 왜 이어령 선생에게 과하지 않은 표현인지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나라에 이 정도로 많은 개념과 단어에 자기의 정의를 부여한 사람이 있었나 싶다. 문명, 인간, 언어, 예술, 종교 같은 거대한 개념부터 마음, 사물, 창조처럼 일상과 사유의 경계에 놓인 단어들까지, 그는 소소한 것들에도 "이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이 책 <이어령의 말>은 그가 그렇게 평생을 쌓아온 작업 속에서 건져 올린 결정체다.
단어를 따라 걷는 독서
처음에는 앞에서부터 순서대로 읽다가 자연스럽게 어떤 단어를 찾아 그것부터 읽게 된다. 물론 순서대로 읽는 것도 좋다. 하지만 이 책의 진짜 매력은 필요할 때 필요한 곳을 펼쳐볼 수 있다는 데 있다. 어떤 단어 앞에서 멈춰 서게 될 때, 어떤 개념이 막연해질 때 이어령 선생이라면 이 단어를 어떻게 설명했을까 이 책을 찾게 된다.
나도 이 책을 그렇게 읽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다 문득 이어령 선생의 생각이 궁금해 책장을 펼쳤고, 그렇게 그의 단어 속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가 쓴 책 중 '다음에 읽어야 할 책' 리스트를 얻게 되었다. 좋은 책은 그 책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또 다른 독서로 이어지는 출발점이 되어주는 책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분명 좋은 책임에 틀림없다.
짧은 말에 눌러 담은 깊고 넓은 사유
이어령의 글은 짧을수록 강하다. 그의 탁월함은 특히 짧은 글에서 잘 드러나는데 한두 문장 안에 담긴 사유의 밀도는 일반인이 쉽게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깊고 강력하다. 짧은 글이 사람의 내면을 흔들기 위해서는 깊이와 넓이가 동시에 필요하다는 말처럼, 이 책에 실린 문장들은 단정하지만 얕지 않다.
좋았던 점은 그는 우리말을 깊이 사랑해서 안팎의 세계를 외래 개념에 기대기보다 가능한 우리말이 지닌 소박함과 경이로움으로 설명하려 했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익숙하고 투명하다. 분명 쉬운 단어들임에도 그것들에 기대 나오는 사유의 깊이, 선생의 내공에는 여러 번 경탄하게 된다. 이 사람 진짜다. 대가를 만나는 일은 언제나 좀 즐겁다.
이어령의 결정판
편집자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이어령 선생은 1970년대부터 자신의 사유를 사전화하자는 제안을 여러 차례 받았지만 늘 때가 아니라며 고사해왔다고 한다. 그러다 생의 말미에 이르러서야 수백 권의 저작 중 '이어령 말의 정수'를 한 권으로 엮는 작업을 시작했고 그 책이 선생이 작고한지 3년이 지난 지금에야 완성되었다고 했다.
그렇게 이 책을 완성하기까지 수년의 회의와 선정 작업이 필요했다고 하는데 AI의 도움을 받아 너무도 가볍게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던져지는 요즘 이렇게 정성 들인 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삶에서 나의 삶으로
이어령 선생이 떠난 지 어느덧 3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그의 말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시대가 변해도, 질문의 형태가 달라져도 그의 문장은 여전히 우리를 붙잡고 있을 것 같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종종 무엇을 기준으로 생각해야 할지 잃어버린다.
<이어령의 말>은 그런 순간에 잠시 멈춰 서서 우리의 생각의 중심을 되찾게 해준다.
이 글을 쓰며 느끼는 감정은 묘하게도 위로에 가깝다. 단호할 때는 단호하고, 부드러울 때는 조용히 어깨를 토닥이는 말들.
우리 생을 먼저 살아간 이가 남겨둔 말들은 우리 삶의 방향에 대해 자꾸만 생각하게 한다.
아마도 이것이 이 책을 기획한 이어령 선생이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건네고 싶었던 선물이 아닐까.
말은 사라지지 않는다. 특히 이렇게 오래 다듬어진 말은 읽는 사람의 숨결을 만나 다시 살아난다.
<이어령의 말>은 그런 책이다.
삶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대가나 멘토의 이야기가 절실할 때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