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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열 번을 나고 죽을 때 (리커버) ㅣ 위픽
성해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3월
평점 :
서서 집어 든 책, 오래 머문 이야기
나는 아직 그 힙한 <혼모노>를 보지 못했다. 아니, 보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힙한건 본능적으로 손이가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서점을 지나가다 우연히 이 책이 눈에 들어왔고 그 아래가 요즘 가장 많이 언급되는 작가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정도 단편이면 30분이면 충분하겠다는 계산도 섰다.
그런데 늘 그렇듯, 이런 계산은 자주 빗나간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나는 이미 서점이 아니라 경주 어딘가에 서 있었다.
그렇게 나는 <두고 온 여름> 이후, <혼모노>가 아닌 성해나의 다른 계 안으로 들어갔다.
너무 잘 아는 도시, 처음 보는 풍경
이 소설의 무대는 경주다. 대구 출신인 내게 경주는 지나치게 익숙한 도시다. 수학여행으로, 가족 나들이로, 짧은 여행으로 여러 번 다녀온 곳.
눈을 감아도 동선이 그려질 만큼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도시다. 그런데 소설 속 경주는 내가 알고 있던 경주가 맞나 싶을 정도로 달랐다.
관광지로서의 경주가 아니라, 누군가의 삶이 오래 머물러온 경주. 잠깐 들렀다 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 자리에 남아 살아온 사람들의 시간으로 이루어진 경주. 그래서 읽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이들이 서 있는 자리가 어디쯤일지 가늠하게 되었다. 기억과 시간의 층위로 쌓인 경주. 맞다. 원래 경주는 그런 도시였다.
재건하려는 사람들과, 남겨두려는 마음
건축학과 4학년 재서와 이본은 같은 과제를 받고 같은 장소로 향하지만,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는 극명하게 다르다. 재서는 늘 의심하며 한 걸음씩 내딛는 사람이고, 이본은 무엇이든 똑 부러지게 해내는 사람이다. 이 대비는 곧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세계의 균열로 이어진다.
경주 산내면의 오래된 고택. 두 번의 지진을 견뎌낸 집은 이미 여러 곳이 무너져 있고, 구조적으로도 비효율적이다. 재서와 이본의 첫 판단은 명확하다. 주요 구조부를 철근으로 재시공하자. 재건하자. 더 안전하게, 더 단단하게.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배워온 정답에 가깝다.
하지만 소설은 그 ‘정답’이 얼마나 쉽게 내려진 것인지, 그리고 그 판단이 무엇을 지워버리는 선택인지를 조용히 드러낸다. 재건은 늘 미래를 이야기하지만, 그 과정에서 과거를 너무 쉽게 정리해버린다.
연필로 그리는 시간, 속도를 늦추는 일
문 교수는 캐드와 스케치업이 당연한 시대에 연필을 고집한다. 직접 재고, 손으로 그리고, 시간을 들여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재서가 한 학기 내내 그린 것은 등고선뿐이었다. 그런데 그 등고선으로 A플러스를 받는다. 최고점을 받고도 재서는 성적 이의서를 낸다. 스스로를 믿지 못해서다.
보통의 우리는 결과 앞에서만 안도하면서도 그 결과가 정말 온전한지에 대해서는 쉽게 의심하지 않는다.
이러한 세계에 대한 재서의 의의 속도와 효율로 만들어진 성취만을 경험한 이의 불안 같았다.
어쩌면 정신없이 내달리기만 하며 이렇게 느린 시간을 겪은게 우리 삶에 있기나 했던가.
집을 짓는 일과, 마음을 짓는 일
이 소설은 한 채의 집을 통해 ‘짓는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집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누군가의 시간을 품고 살아온 존재다. 그래서 소설이 끝내 도달하는 지점은 재건과 보존의 이분법이 아니라, '짓는 마음'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빌려주고 속으로 "잘 살거라"라고 비는 마음.
우리가 잠깐 손님으로 왔다 가는 풍경에, 누군가는 평생을 머문다.
열 번을 나고 죽는 동안에도 이어지는 것들은 그렇게 남는다. 약해 보이지만, 쉽게 무너지지 않는 것들.
잠깐 읽기에는 아까운 소설
처음에는 서서 읽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곧 자리를 구해 앉았다.
중간에 딴생각하다 읽은 부분은 이내 돌아가 다시 읽었고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재건을 선택하는지, 얼마나 쉽게 오래된 것들을 정리해버리는지에 대한 생각이 꽤 많아졌다.
그리고 경주가 다시 떠올랐다. 그저 여행지로의 경주가 아니라 누군가의 삶이 켜켜이 쌓인 자리로서의 경주가.
이 소설은 묻는다. 정말로 무너진 것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끝내 남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