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눈물에는 온기가 있다 - 인권의 길, 박래군의 45년
박래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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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하고 싶었던 이야기 앞에서


어릴 적 운동권을 동경하던 시절이 있었다.

2002년 효순이·미순이 사건이 계기였다. 세상이 마냥 상식적일 거라고 생각했던 내게 착각하기 마라는 듯 그 일은 다가왔다. 월드컵에, 삼성라이온즈 우승에,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에 모든 거리가 기쁨으로 술렁일 때도 나는 분노했다. 거리로 나갔고 동지들을 만났다. 나는 이후 민주노동당에서 진보신당, 녹색당 등의 당적을 거쳤다. 물론 당비 월 얼마 내는 게 전부였지만 나에게도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뜨거움이 있었다.

이 모든 일들이 과거형인 것은 한때는 이 이야기들이 나의 정체성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되려 이런 책을 만나면 한발 물러서는 쪽에 가까워졌다.


너무 많은 슬픔을 이미 알고 있다는 이유로 혹은 더 이상 감당할 자신이 없다는 핑계로 나는 여전히 어딘가에서 서성이고 있다.

이 바닥에서는 모를 수 없는 이름 박래군. 그래서 <모든 눈물에는 온기가 있다>를 집어 들기까지 조금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 책은 단순한 회고록도, 투쟁의 연대기도 아니다. 한 사람이 감당해 온 슬픔의 밀도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드는 기록이다. 그리고 그 슬픔이 어떻게 개인의 몫을 넘어 사회의 언어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문학청년에서 활동가로


소설가를 꿈꾸던 문학청년 박래군이 1980년대라는 시대와 맞닥뜨리는 장면에서 이야기는 출발한다. 연세 문학회, 기형도와 성석제, 공지영의 이름이 스쳐 지나가는데 그럼에도, 그가 기억하는 것은 문학적 낭만이 아니라 최루탄 연기로 뒤덮인 교정이다.

"편하게 글만 쓰고 있을 수는 없다"는 문장은 선택이 아니라 그의 양심의 강요에 가까웠을 것이다.


체포, 강제징집, 구속. 그는 비교적 담담하게 이 시기를 회고하지만, 그 문장 사이사이에는 국가 폭력이 한 인간의 내면을 어떻게 부수는지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혀를 깨물어서라도 저항하려 했던 순간, 그리고 끝내 굴복해야 했던 기억. 이 책에서 가장 아픈 대목은 그 폭력 자체보다, 살아남은 자의 남겨진 자괴감이다.



내 슬픔이 세상의 눈물과 만났을 때


생 박래전의 분신 이후, 박래군의 삶은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설명하기 어렵다. 거리에서 형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환청, 운동이 뭔데 내 아들을 둘이나 교도소에 넣었느냐는 어머니의 외침. 숨이 막히는 고통. 그는 이 상실을 극복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 슬픔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갔는지를 이야기한다.


유가족이라는 정체성은 그를 더 많은 죽음의 현장으로 이끌었다.

감옥에 있으면 면회라도 갈 수 있을 텐데라는 유가족들의 오열 앞에서 흘렸던 눈물.

그날 밤, 그는 그들 곁을 지키기로 결심했다고 말한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이 책이 말하는 연대는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함께 울어주기로 결심한 이들의 선택에 가깝다.



더 낮은 곳을 향한 시선


박래군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을 통해 사회의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다. 장애인 시설, 부랑인 수용시설, 양지마을과 에바다 학교

언젠가 기사로 읽은 사건들이지만, 그의 글을 통해 다시 읽으면 이 문제들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담은 허물어졌지만 운영 주체는 그대로 남아 있고, 법인은 이름만 바뀌어 운영을 계속한다.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한차례 이슈가 지나간 이후 누구도 여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 장에서 느껴지는 것은 분노보다 무력감이다. 폭로만으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너무도 잘 알려진 진실.

그럼에도 그는 현장을 떠나지 않는다. 문제는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이기 때문이다.



질 줄 알면서도 하는 싸움


대추리와 용산, 그리고 개발이라는 이름의 폭력 앞에서 박래군은 늘 진다.

그는 스스로를 지는 싸움만 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김훈 작가의 말처럼, 이런 싸움은 져도 지는 것이 아니다.

승패로 평가할 수 없는 싸움이 있기 때문이다.


이 장을 읽으며 나는 왜 나의 젊은 날과 멀어지려 했는지 깨달았다.

뜨거운 문장들 앞에서 그는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느냐고.



눈물의 온기로 이어진 연대


마지막 장에서 박래군은 세월호 이후 생명안전 운동가로 다시 서 있다.

다섯 번째 구속, 독방에서 삼킨 눈물, 그리고 지키지 못할지도 모를 약속에 대한 자책.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는다.


세상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세월호 유가족과 이태원 유가족은 2020년대에도 서로를 만났고 안아 주었다.

누가 그랬나. 운동 같은 건 애저녁에 끝난 일이라고.

아니다. 아직도 사람이 있다. 그리고 책은 그 연대에 조용히 희망을 건넨다.


모든 눈물에는 온기가 있다.

박래군은 지난 45년 동안 그 온기에 기대어 싸워왔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은 이 눈물 앞에서 고개를 돌릴 것인가, 아니면 잠시 멈춰 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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