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의 기분 - 한문학자가 빚어낸 한 글자 마음사전
최다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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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같은 시대에 한자라니.

요즘 아이들도 한자를 공부할까 문득 궁금해졌다.

지금은 믿기지 않을 이야기지만 어렸을 적만 해도 신문의 반은 한자였다. 신문을 읽기 위해서라도 한자가 필요했는데 지금은 한자는커녕 신문도 사라져 버렸다. '우리 신문은 모든 기사를 한글로 쓰겠습니다'라는 광고가 신문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적도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한자는 우리 곁에서 서서히 사라져 갔다. 한자를 아닌 이들이 이 땅에서 사라질 즈음 한자는 그저 외국어의 하나로 남을 것만 같다는 생각을, 이 책을 펼치기 전까지는 별다른 감정 없이 하고 있었다.



사라진 문자가 아니라, 멀어졌던 감정


<한자의 기분>은 한자를 가르치려는 책이 아니다.

책은 제목처럼 한자를 통해 우리 일상의 '기분'을 다시 일깨워 주는 책이다.

저자 최다정은 열두 개의 기분을 중심으로, 챕터마다 열 글자씩 총 120개의 한자를 꺼내 놓는다.

그리고 말한다. 기분을 말해줄 정확한 언어를 찾는 것만으로 덜 외로울 수 있다고.


우리가 한자를 멀리한 건, 사실 그 문자가 낯설어서라기보다 굳이 더 들여다보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빠르게 요약되는 감정, 이모지 하나로 대신되는 기분, 굳이 이름 붙이지 않아도 넘어갈 수 있는 하루들.

그런 시대에 이 책은 아주 느린 질문을 던진다.

과연 그것으로 충분한가? 그것들이 당신을 표현하고 있는가?



한 글자에 접힌 시간의 깊이


우리가 무심코 손에 쥐고 읽는 책이 원래 冊에서 비롯했음을 자각하면, 아주 기나긴 인류 보편의 마음을 헤아려보게 된다.


冊(책책) 자는 3,000년 전 사람들이 대나무를 꺾어 비슷한 높이로 다듬어 가죽끈으로 엮은 세상에서 하나뿐인 冊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한 글자를 한자로 옮겨놓는 순간, 우리는 수천 년 전의 누군가와 같은 마음을 건너 만난다.

지금 너무나 당연하게 쓰는 단어 하나가 사실은 오래전 누군가가 울고 웃으며 남긴 흔적이라는 사실.

그래서 이 책은 지식을 설명하는 대신, 시간을 불러온다.



기분이라는 이름의 작은 사전


이 책을 한 글자 마음 사전이라고 표현했는데 정확한 것 같다.

嵌이라는 글자를 통해 산골짜기에 빠진 듯한 살아 있음의 기분을 말하고, 灰를 통해 다 타고난 뒤에야 만져볼 수 있는 안도와 공허를 이야기한다.

봄날의 靄는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는 계절의 마음을 닮았고, 餘는 겨울밤과 장마철에 숨어 읽는 독서의 기분을 불러낸다.


물론 이 글자들이 어떠한 정답을 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머물 수 있는 자리를 내어준다.

기분이 엉망인 순간에 숨어 들어가 웅크리고 울 수 있는 곳이, 하나의 한자 안이었으면 좋겠다는 저자의 바람처럼,

이 책의 한자들은 갈 곳 없는 이들에게 피난처에 가깝다.



한자를 읽는다는 것, 나를 읽는 일


<한자의 기분>은 한자의 미래를 걱정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책의 역사, 읽는 손의 감각, 다음 세대에도 이어질 언어의 온기를 믿는 쪽에 가깝다.

언어가 사고를 만들고, 사고가 세계를 만든다는 오래된 언어학의 통찰처럼, 이 책은 말한다.

우리가 어떤 언어로 기분을 부르는가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결정한다고.



사실 읽으면서 나도 한자를 많이 잊어버렸다는 걸 알았다. 뭐 그렇지만 책을 읽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덮고선 내가 쓰는 말들에 대해 조금 더 오래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 내 기분을 설명하는 단어 하나쯤은 조금 천천히 골라보고 싶어지는 그런 책.


한자를 좋아하거나 배워보고 싶은 사람.

나의 마음을 한 글자로 나타내고 싶은데 그게 도저히 뭔지 모르겠는 사람.

말보다 이모지가 먼저 떠오르는 사람,


이 책은 다른 표현의 선택지가 되어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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