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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옷 추적기 - 당신이 버린 옷의 최후
박준용.손고운.조윤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1월
평점 :
아프리카에서 만난 뜻밖의 장면 중 저 옷이 왜 여기?? 했던 장면이 있다. 2002년 한국을 휩쓴 Be the Reds 티셔츠 그리고 이회창 대통령이라고 쓰인 옷(그는 대통령이 된 적이 없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사용되지 못하고 옷이 돌고 돌아 그곳에 도착한 것일게다. 그렇게라도 제 역할을 하고 있는 저 옷들을 바라보는 마음 한쪽이 묘하게 불편했다.
1. 의류 수거함 너머의 풍경
헌 옷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너ㅏ는 깨끗한 옷은 아름다운 가게에 버려야 할 옷들은 의류 수거함에 넣는다. 응당 그냥 그래왔다. 마치 공공의 의류 쓰레기통 같았던 그곳이 민간에서 운영한다는 걸 알게 된 건 불과 몇 해 전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류를 처리할 딴 방법을 모르는 나는 계속 그곳에서 헌 옷을 버렸다.
이 책의 이야기는 그렇게 버려진 헌 옷들이 진짜 어디로 향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재활용이라는 말에 어떤 안도감을 배워왔다. 입지 않는 옷을 넣으면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막연한 믿음. 하지만 버려진 옷에 달아둔 GPS 추적기는 그 믿음 뒤의 세계가 얼마나 어둡고 혼란스러운지를 말해준다.
한국에서 해마다 버려지는 헌 옷은 공식 집계만 10만 톤이 넘지만 수출되는 양은 30만 톤에 달한다고 한다.
집계되지 않은 20만 톤이 어디선가 들어와 편법과 불법으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얘기다. 이들 옷들은 대부분 말레이시아, 인도, 필리핀, 태국, 볼리비아 등 중고 의류 수입을 금지한 나라로 들러들어간다. 그리고 이 옷들은 그곳의 쓰레기 산을 더욱 높게 쌓아 올린다.
인도와 태국, 필리핀 등도 마찬가지다.
의류 수거함을 통해 우리가 재활용된다고 믿었던 옷들은 개발도상국으로 향했다. 의류가 아닌 쓰레기가 돼서 말이다.
2. 기업의 말과 구조의 공백
H&M, 자라 같은 패스트패션 기업들이 최근 몇 년간 급성장하면서 친환경, 지속가능성이라는 이름으로 의류 수거함을 매장 내 비치하기 시작했다.
H&M은 수거된 옷의 92%를 재활용한다고 말했고, 자라는 '새로운 주인을 찾아드립니다'라는 슬로건을 걸었다.
하지만 헌 옷 추적 결과 H&M 매장 수거함에 넣은 7벌 중 4벌은 아프리카, 동남아로 흘러갔고 자라의 헌 옷은 튀니지에서 발견되었다.
우리가 동네 의류 수거함에 넣는 옷과 이들은 별밥 다르지 않은 운명을 걸었다.
이를 책은 '그린워싱'이라고 부른다.
이은 소비자를 두 번 속이는 행위다. 더 많이 사게 만들고 버린 뒤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친환경이라는 말로 포장한다.
정부는 제도의 빈틈을 방치한다. 유럽은 이미 생산자 책임재활용제를 통해 의류의 생애 주기를 관리하려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검토 중이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수십조 원 규모의 의류산업이 내는 이익은 있지만 그로 인한 책임은 누구에게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3. 그 옷을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
추적기가 멈춘 인도 파니파트의 표백, 염색 공장에서는 아직도 폐수를 별도의 정화장치 없이 방류한다고 한다. 마을 사람 4,000명 중 400명이 중증 질환을 앓고 있고 노동자들은 맨손으로 화학 용수를 다룬다. 그리고 그곳의 아이들은 독성 물질이 묻은 옷더미 속을 놀이터처럼 뛰어다닌다.
남의 일 같지만 이 일들은 어쩌면 우리가 짧게는 수십 년 전에 이미 겪었던 일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공장폐수를 강에다 버렸고, 그 물질들은 각종 질병을 일으키며 마을 사람들을 병들게 했다. 아직도 이 일들이 법정에서 다뤄지고 있으며 이제 선진국이 되어버린 우리나라에 더 이상 이런 일을 벌이는 이는 없다.
그런데 그게 우리나라가 아니라면 괜찮다는 말인가?
내가 버린 옷이, 내가 신던 운동화가, 누군가의 몸을 병들게 하고 있음에도 개도국의 이들이 선택한 일이니 그것이 괜찮은 일이 되는가?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누군가의 선택이 아닌 구조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생산자는 대량 생산을 멈추지 않고 정부는 관리하지 않으며, 소비자인 우리는 재활용한다는 이야기에 거리낌 없이 소비한다.
티셔츠 한 장이 종이컵 수백 개의 탄소를 내뿜고, 폐의류의 20%가 불법 폐기될 때 매년 소나무 수천만 그루가 필요하다.
다른 선택은 가능하다
프랑스는 2028년까지 중고 섬유 재활용률을 90%까지 높이겠다고 선언했고, 네덜란드는 2050년 완전한 지속 가능 직물을 목표로 삼았다.
기술도 조금씩 진보하고 의류업계 종사자들 또한 변화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이런 변화의 출발은 정부나 기업을 움직일 수 있게 우리의 눈이 문제를 직시하기 시작할 때다. 의류 수거함이라는 블랙박스 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아는 것. 편리함 뒤에 누군가의 고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
*개인적으로 행사를 위한 일회용 티셔츠는 이제 모든 기관에서 지양해 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