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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와 현대 미술 잇기 - 경성에서 서울까지, 시간을 건너는 미술 여행
우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1월
평점 :
책을 읽는 내내 미술에 관한 글을 읽고 있다는 느낌보다 삶의 어떤 결을 손끝으로 더듬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미술에 대해 잘 모르지만 가끔 내가 미술관에서 멍하니 그림들을 보는 이유도 그래서인지 모른다. 대단한 작품이라는 느낌보다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그림이 나를 바라보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뭐랄까 마음을 살짝 당겨주는 힘 같은 것. 위로가 꼭 사람에게서만 오는 건 아니라는 걸 이런 경험을 통해 몇 번씩 배웠다.
책은 바로 그 힘, 미술이 건네는 작고 은근한 목소리에 대해 말하는 책이다.
근현대 미술가들의 치열했던 삶과 현대 작가들의 고유한 감각이 시대의 벽을 넘어 서로의 어깨에 손을 얹는 순간들.
마치 백 년의 시간을 건너와 나는 이렇게 살아냈어라고 책은 속삭인다.
저자는 단순히 작품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 근대의 숨결과 현대의 몸짓을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그리고 이 그림들이 결국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음을 깨닫게 한다.
처음 이 책을 들었을 때 사실 미술 교양서 혹은 해설서로 생각했다. 그런데 읽을수록 아니었다. 이건 미술의 언어로 쓰인 삶의 기록이다.
나혜석의 그림은 식민지와 남성의 이중 굴레 속에 갇혀 자유를 갈망하는 이의 외침이다.
현덕식의 그림은 누군가를 미워하고 받음으로 생채기 난 정서적 폭력에 의한 상처들이 짓이겨져 있다.
백영수의 그림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 꺾이지 않는 의연함이,
백영수와 이내의 그림에서는 도시의 여름밤에 없는 신비로움이 보인다.
이것들은 사실 차마 드러내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할 뿐 우리 곁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책은 이러한 삶의 모양들을 도시, 경계선, 계절, 내면 그리고 삶이라는 다섯 가지의 테마로 풀어낸다.
읽다 보면 처음 들어보는 이의 그림도 있지만 그렇게 큰 문제는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의 소개로 새롭게 알게 되는 그림도, 몰랐는데 좋아하게 되어버린 그림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알게 된다.
그들이 남긴 흔적이 단지 작품이 아니라 그들이 감당했던 슬픔과 선택과 기쁨의 역사라는 것.
근대의 작가들이 온몸으로 버텨낸 시대와 현대의 작가들이 견뎌내고 있는 도시의 리듬이
2025년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게 말 걸어올 때 우리는 결국 내 삶의 결을 더듬어 보게 된다.
"너는 어떻게 살고 있니?"
"무엇이 너를 지탱하고 있니?"
책은 그 질문을 조용히 건네고 우리는 아주 천천히 그 물음 사이를 걸어가게 된다.
굉장히 오래간만에 큐레이션 잘 된 미술관을 산책하고 나오는 기분이다.
그리고 이 그림들이 말을 걸어오는 순간 왠지 조금 더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