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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의에 대하여 - 무엇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가
문형배 지음 / 김영사 / 2025년 8월
평점 :
호의에 대하여 – 평균의 삶으로 향한 마음의 기록
문형배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건 대통령 탄핵 선고 때였다. 그때는 단지 헌법재판관 중 한 명으로만 기억했는데 나중에 김장하 선생의 이야기에서 그 이름을 다시 만났다. 그리고 그가 헌법재판관 임명될 때 이야기한 한 문장 "평균의 삶을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한다"에 무언가에 맞은 것처럼 휘청거렸다.
이 책은 그렇게 살아온 사람의 조용하지만 단단한 사람의 기록이다. 화려하지 않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를 묵묵히 지켜온 한 판사의 일기이자, 그가 남긴 1,500여 편의 블로그 중에서 120편을 고른 책이다.
처음에는 남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듯한 간지러움이 스민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그 간지러움은 존경으로 바뀐다. '공무원 생활을 시작할 때 유의점'이라며 그는 후배들을 향해 부탁한. "업무에 정통한 것이 최고의 친절이다. 첫인상은 매우 중요하고 일주일 이내에 형성된다. 꾸준한 독서가 필요하다. 건강에 유의해야 한다. 롤 모델을 찾는다. 시간관리를 철저히 한다." 단단하다. 이 말 말고는 그를 표현할 말이 잘 없다.
그가 말하는 평균은 무난함의 동의어가 아니다. 이것은 평범한 일상에 진심으로 충실한 삶을 뜻한다. 지리산 자락의 나무, 산책길의 바람, 등산 중 만난 주목나무 한 그루까지 소중히 하는 그의 글에는 생의 결이 스며 있다.
그가 말하는 성공보다 버티는 삶에도 눈길이 간다.
"무승부도 있으므로 버틸 필요가 있고, 그러면 훗날을 기약할 수도 있다."
이 문장이 필요한 이들에게 그의 위로를 건넨다.
존엄과 호의, 그리고 사람
문형배 재판관의 세계는 냉철한 법리 위에 서 있으면서도 인간의 존엄을 잃지 않는다. 그가 내린 판결은 단호하지만 따뜻하다.
"자살자살자살자살…. 이렇게 열 번 하면 듣는 사람에게는 ‘살자’로 들립니다."
법정에서 그는 피고인에게 직접 그렇게 말하게 했다. 스스로를 벌하던 이의 입에서 살자라는 단어가 되돌아오는 순간 그가 말한 ‘호의’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난다.
"당신이 떠나고 나면 당신을 붙잡지 못한 미안함에 며칠을 울어야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보고 싶어 또 울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자살은 당신이 떠난 후 남은 이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상처입니다."
화가 나면 화를 이기기 힘드니, 화가 나기 전에 화를 늦추라는 그의 조언은 재판정의 당사자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유효하다. 그렇다고 그가 화가 없는 사람도 아니다. 판결 중 자신이 화를 내면 법복의 소매를 당겨달라던 그의 부탁에는 타인을 위해 스스로를 관리하는 어른의 얼굴이 겹친다.
그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를 종합하면 존엄과 사랑, 존경이라는 세 단어로 수렴된다.
그가 김장하 선생이 보여준 선의를 받았고 그것을 사회로 돌려주려 평생을 노력했다. 누군가의 작은 호의가 한 사람의 인생, 나아가 어쩌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걸 그는 자신의 판결과 삶으로 증명해 보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삶을 향한 공부
그는 판사란 타인의 인생의 극적인 순간에 관여하는 사람고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는 그 결핍을 독서로 채웠다. 두 번째 챕터에서는 그가 읽은 책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가 문학들을 어떻게 읽었는지 넘겨보는 것도 책의 좋은 포인트다.
그의 독서는 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삶을 이해하기 위한 사유의 궤적이다.
문학은 보편적 진실을, 재판은 구체적 진실을 추구한다며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고 그는 말한다.
이런 그의 판결에는 그 독서가 남긴 흔적이 배어 있다. 주홍 글자, 레미제라블 등에서 보이는 사회적 약자에를 향한 시선을 그는 이 나라의 재판정에 가져온다. 엄격한 법의 잣대와 함께 그는 사회적 약자의 범죄에게는 상담과 치료의 기회를 주었다. 그들의 환경이 바뀌지 않으면 다시 범죄가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고백한다.
"주위에 불행한 사람이 있는 한, 우리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아마 블로그에 적힌 에세이들을 읽은 것 같은데 깊이 있는 책을 읽은 것 마냥 마음이 뭉클해졌다.
이건 이 땅의 어른을 향한 존경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