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파사주
강성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평점 :
책을 읽으면서 계속 여기가 어디인지 확인했다. 나는 지금 길 위에서 아이들과 함께 있는가, 벽돌집이라 불리는 곳에서 아이들을 보고 있는가. 아니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장면은 환상인가 현실인가. 책은 사이비 집단에서 탈출한 두 아이의 이야기다. 거리와 아이들의 옛 기억이 어지러이 얽혀서 처음엔 당혹스럽기도 했는데 이야기의 끝으로 치달을수록 이 감정은 분노로 치환된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뚫고 나가는 아이들의 마음에 괜히 한편이 아련해지기도 한다. 여러 가지로 좀 복잡하다.
책의 제목인 파사주는 두 가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길, 여정을 뜻하는 passage와 사주를 파한다는 뜻의 파사주. 아이들은 스스로에게 주어진 굴레를 파하고 길로 나서 또 다른 구원을 찾는다. 우리는 그저 그 길을 가만히 지켜봐야 한다.
해수는 밤마다 야구 놀이를 핑계로 공을 맞아야 했고, 유림은 그 옆에서 억지로 박수를 쳐야 했다. 그들을 둘러싼 이들은 아이들에게 늘 죄책감을 강요했다. 이미 무너져 버린 많은 아이들 가운데 해수는 소위 또라이였다. 죄를 고백하라는 어른들의 고함에 지독하게 맞섰다. 유림은 늘 그런 해수의 편이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벽이라고 여기는, 그들을 둘러싼 깜깜한 그곳을 두 아이는 문으로 보았다. 열고 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고 보면 갑갑한 우리 삶도 벽을 벽으로만 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야기해야 한다. 살아있어도 죽어있지도 않은 것만은 피하기 위해서"
살아있지도, 죽어있지도 않은 것.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 문장이다. 권력에 맞선 아이들의 선택은 바로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벽돌집 안에서 그들은 침묵을 강요당했지만 아이들은 그 죽음을 거부했다. 서로를 향해 목소리를 내고 함께 고통을 증언하는 순간 그들의 생은 되살아났다
그래서 <파사주>는 결국 성장소설이다. 단순히 억압에서 탈출하는 서사가 아니라 아이들이 자기 목소리를 되찾고, 자기 길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이야기다. 해수의 용기와 유림의 동조는 그 자체로 삶의 태도에 대한 선언이었다. 그들은 상황이 바뀌기를 기다리지 않았고 오히려 상황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며 막힌 벽에서 문을 발견하려 애썼다. 그 다정한 연대와 긍정적인 태도가 결국 탈출의 힘이 되었고 미로 같은 인생 속에서 스스로 통로를 만들어가는 길이 되었다.
아이들의 이야기는 끝나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한다. 나는 지금 내 앞의 벽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단단히 막힌 벽으로만 보는가, 아니면 문이 될 수도 있다고 믿는가. 때로는 벽 앞에서 주저앉아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묻는다. 그렇게 살아있지도 죽어있지도 않은 상태로 머무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답은 명확하다. 이야기해야 한다. 서로에게,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한없이 막막한 지금 이 순간에게.
인생은 누구에게나 미로처럼 주어진다. 하지만 그 미로를 통로로 만드는 건 우리 자신의 선택과 의지다. 해수와 유림의 탈출은 단순한 탈출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나침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