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시대 - 독립을 넘어 쇄신을 꿈꾼 식민지 조선 사회주의 유토피아
박노자 지음, 원영수 옮김 / 한겨레출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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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치자마자 오래 묵혀둔 이름과 마주했다. 박노자. 아마 <당신들의 대한민국> 이후로 그의 이름이 쓰인 책을 손에 쥔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제목도 <붉은 시대>. 그 단어만으로도 이미 나를 낯설고도 익숙한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누가 그럤나.스무 살에 맑스에 미치지 않으면 바보고 마흔이 되어서도 맑스에 미쳐있다면 바보라고.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맑스라는 이름은 그렇게 내게도 추억 속의 편린이 되었다. 나는 더 이상 맑스나 좌파라는 단어에 끌리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멀리하는 중이다.(사실 이는 이데올로기뿐 아니라 모든 현실 정치에서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노자는 내 청춘의 열정이자, 지나간 시간의 상징처럼 남아 있었다. 그의 신간이 다시 그 이름을 불러냈다. 역시 사람은 뭘 단정 짓거나 자신해선 안된다.


논문이다. 따라서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오래 두고 천천히 볼 일이지맘 교양 삼아 읽기도 나쁘지 않다. 다만 인물들이 많고 번역서인지라 조금은 지루하다는 점을 미리 경고해두며.


그가 다루는 시기는 1919년부터 1930년대까지다. 러시아 10월 혁명이 던진 불씨가 전 세계로 번져나가던 시기. 그 불씨는 이탈리아의 ‘붉은 2년’을 낳았고, 중국의 5.4운동을 불러왔으며, 인도의 비협력 운동을 들불처럼 번지게 했다. 전 세계가 뜨거운 각성과 민주적 집단행동으로 요동치던 때였다. 그리고 바로 그 시기의 들불의 끝자락에는 우리 조선도 있었다. 3.1운동 또한 단지 ‘민족 독립의 외침’이 아니라 실은 전 지구적 혁명의 흐름 속에 놓여 있었던 사건이었다. 혁명이후 조선의 청년들은 그 거대한 물결 속에서 조선공산당을 조직했고, 강령을 다시 쓰며, 분파 간의 치열한 논쟁을 이어갔다. 무엇보다 그들은 식민지 조선 사회를 가장 체계적으로 분석하며 제국주의와 싸울 이론적 무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제 와 살펴보는 이런 이 흔적들을 단순히 ‘이념의 기록’이라 부르는 건 아무래도 부족하다. 일제에 항거했던 그들의 이념은 삶의 전부를 던진 실험이자, 불가능에 가까운 현실을 돌파하려는 몸부림이었다. 나도 새로웠던 건 항일운동이 단지 민족주의적 저항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국제 혁명이라는 시대정신과 맞닿아 있었다는 사실은 꽤 놀라운 발견이었다. 1920년대를 살아가던 조선의 청년들에게 공산주의는 단순한 수입품이 아니라 세계와 호흡하기 위한 언어이자 무기였던 셈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는 그 얼굴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의도적으로 잊게 강요당해온 것일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사회주의는 ‘금기’가 되었고, 공산주의는 ‘전체주의의 다른 이름’으로만 호출됐다. 항일운동의 역사에서도 민족주의적 투쟁은 남았지만, 사회주의적 흐름은 지워졌다. 그리하여 우리는 반쪽짜리 기억만을 가진 채 우리 역사를 설명해왔다. 돌이켜보면 좌파 독립운동가였던 여운형 같은 이름들을 부르기 시작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이런 우리게 박노자의 <붉은 시대>는 집단적 망각의 베일을 걷어내고 우리가 놓쳐온 다른 얼굴을 불러내자고 말한다.


한때 나의 청춘을 사로잡았던 사상이자 이제는 흔적조차 희미해진 시대의 열망이 겹쳐졌다. 추천인의 이야기처럼 망각을 거부하라고 그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요청한다. 그것은 단순히 과거를 곱씹으라는 말이 아니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념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시기를 살았던 이들의 고민과 열정 그리고 우리 스스로 지워버린 가능성이다. 역사의 또 다른 얼굴을 기억하는 일, 그것은 곧 우리 자신의 현재를 온전히 이해하는 길이기도 하다.


우리가 잃어버린 1919년부터 1930년대까지의 조선의 20년, 세계와 호흡하던 한반도의 가장 뜨거웠던 그 시간의 우리네 조선의 얼굴들. 그 얼굴들을 우리가 다시 기억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조금 더 풍부한 뿌리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역사는 단순히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기에.

어쨌거나 매력 있던 시대의 한 가운데를 마주 보게 해준 저자에게 다시 한번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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