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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위에서 울고 웃기 - 한 번은 꺼내고 싶은 내 안의 이야기
송예원 지음 / 북스톤 / 2025년 6월
평점 :
물끄러미 책장을 넘기는데, 종이 냄새가 코끝을 파고든다. 어릴 적 언젠가 학교 도서관 도서대 사이에서 머리가 어질해질 정도로 책에 빠져들던 기억이 난다. 해리포터였나 류시화의 시집이었나 모르겠다. 이 책은 그런 향수를 불러오는 책이다.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책에 종이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작정하고 인쇄했나 싶을 정도로 고서점 같은 아주 오래된 도서관 속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그리고 나는 짙은 책 내음을 참 좋아한다. 읽기 전부터 마음이 좀 편안해진다.
책은 을지로 어딘가에 위치한 <라이팅룸>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출발한다. 글을 쓰는 사람들을 위한 이방의 이름은 참 직관적이다. 말 그대로 '쓰기 위한 방'. 그곳을 찾아온 이들이 손으로 써 내려간 사연을 이 책은 조용히 묶어내고 있다. 뭔가를 쓰기 위해, 아니면 써야만 해서 이곳을 찾은 사람들. 저마다의 마음을 꾸깃꾸깃 접은 편지처럼 한 장 한 장 꺼내놓는다. 그런데 단순히 여러 사람의 글을 편집해둔 책이라기엔 이상하리만치 감정의 결이 하나로 모인다. 책장을 넘길수록 이 이야기가 서로 다른 목소리의 합창이 아니라, 어느 조용한 겨울날 라디오에서 들리는 연작 에세이처럼 느껴졌다.
나는 마음이 복잡할 때면 늘 뭔가를 쓰곤 했다. 지금처럼 키보드가 많기 전에는 주로 다이어리였는데 그렇게 한참을 써 내려가면 조금은 마음이 나아지곤 했다. 이 책의 어떤 메모들은 꼭 그때의 나 같았다. 어떤 사람은 이별의 장면을, 어떤 사람은 일상을 잃어버린 하루를, 또 어떤 사람은 누군가에게 건네지 못한 말을 종이 위에 적는다. 지금도 누군가는 노트 한 켠 혹은 포스트잇에 괜찮다고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책장을 넘기며 그런 마음에 자꾸 내 마음이 얹어졌다.
각 챕터의 끝에는 <라이트룸>의 운영자이자 저자의 짧은 메모가 있다. 하지만 그 설명은 덧붙임보다 안내에 가깝다. 설명하지 않아서 더 좋았다. 글들이 알아서 말을 걸어왔다. 어떤 글은 친구의 편지를 엿보는 것 같고 어떤 글은 누군가의 오래된 일기를 빌려 읽는 것 같았다. 그렇게 쓰는 사람들의 마음은 책 위에서 고요하게 펼쳐졌다.
<쓰는 사람>이라는 프로젝트가 참 마음에 들었다. 아직도 종이 위에 마음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그 마음들이 누구의 편집도 없이 그냥 손글씨로 책에 담길 수 있다는 게 어쩐지 다행스럽다.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며, 우리는 쓰기보다 입력을 더 자주 한다. 손끝으로 쓰는 문장 대신 자판을 두드리며 보내기를 누른다. 그런 시대에 이 책은 말한다. 손으로 쓴 문장은 마음에 더 오래 남는다고.
책을 덮고 나니 꽤 멍했다. 위로라는 단어는 뭘 하겠다고 다가가는 감정인데 이 책은 그저 곁에 조용히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다시 서울에 가게 된다면 한 번쯤은 <라이트룸>에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