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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광고인이다 - 희망도 절망도 아닌 현실의 광고 이야기
임태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8월
평점 :
광고인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그들은 크레이티브하고, 신나 보였다. 놀면서 일하는 느낌이랄까. 이제석 같은 기라성 같은 광고 천재들의 이야기는 뭔가 늘 멋져 보였고, 카피 하나, 15초 영상 하나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일은 정말이지 쿨해 보였다. 그 업을 지근거리에서 볼 때도 그랬다. 그들은 쉽게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 단어를 읊으며 일했으며, 그들끼리의 언어로 소통했다. 어떨 땐 의사들끼리 병원에서 쓰는 단어들 같기도 했다. 언젠가 하도 힙해 보여서 NBG가 뭐예요? 물었다가 네이버 블로그라는 대답을 듣고 '아 이 새끼들 진짜'라고 생각하기 전까진 말이다.
책은 이런 광고기획사의 원탑. 제일기획에서 지금도 현업을 이어가고 있는, 실제 광고대행사의 직원의 진짜 이야기다. 책의 전반부에서 저자는 실제 광고업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그들은 어떻게 일하는지 하나씩 알려준다. 문체가 딱딱하거나 경직되지 않고, 실제 그들의 언어처럼 이야기해서 리듬감 있고 내가 책을 읽는 건가, 유튜브를 보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한다. AP, AE, CW, PD, CD 등 들어본 듯 들어보지 못한 단어들이 무얼 뜻하는 건지, 실제 광고 현장에서는 어떤 식으로 R&R이 이루어지고 그들은 어떻게 일을 하는지 처음부터 하나씩 설명해 준다. 캠페인을 준비하며 가끔 프로덕션과 일을 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 (나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들이 했던 이야기가 떠오르면서 내가 실수했던 것, 그들이 내가 모른다고 뭉갰던 많은 이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이런 책. 진작에 좀 보고 일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후반부는 일반적인 우리의 일의 태도와 크게 다를 바 없다. 2009년 직업만족도조사에서 일을 할 때 '어떤 포인트에서 만족감을 느끼느냐'라는 질문의 1위가 무엇이었는지 아는가? 연봉도 아니고 복지나 사회적 지위도 아니었다. 바로 업무의 진도가 명확하고 빠르게 피드백 되는 것. 저자는 이게 광고업에서 얼마나 이루어지기 힘든 일인지 설명하지만 사실 이는 모든 업을 막론하고 동일하다.
업무의 진도가 명확하고 빠르게 피드백 되는 것.
바쁘다는 이유로, 내 우선순위에서 뒤 순위라는 이유로 내 피드백을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제안서들 앞에서 멍해졌다.(미안하다!!!!!!!!!!!!!!!!!!!) 저자는 우리가 일을 대하는 태도, 사람을 대하는 예의, 이제 업에 막 진출한 이의 절대 금기 사항인 함부로 깝죽거리지 말 것 등을 정말로 진지하게 우리에게 들려준다.
더닝 크루거 임팩트라 불리는 이 그림은 무릎을 쳤다. 나중에 강의 때 종종 써먹을 것 같다.
진짜로 내가 하기로 한 업에서의 30대가 평생을 좌우한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그는 진심으로 후배들에게 조언한다. 1. 집중해야 할 10년 페이스 조절을 잘할 것. 2. 우쭐하지 말 것. 3. 사람 때문에 포기하지 말 것.
책이 즐거웠던 지점 중 하나가 중간중간에 삽입된 웃픈 삽화였는데, 이것만 들여다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저작권에 위배되지 않는 선에서 이 또한 강의자료로 써먹어야지 생각 중이다.
광고일을 준비하거나, 프로덕션과 협업해야 하는 업무라면 필독을 권한다. 일을 처음 하는 직원들이 간혹 에이전시와의 관계에서 은연중에 갑의 위치에 가거나 선을 넘나드는 실수를 종종하곤 하는데 반대쪽의 일을 알면 이런 실수를 굉장히 많이 줄일 수 있다. 그저 멋져 보였던 광고업을 다시 볼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또 원래 일이란 건 이렇게 서글픈 일이구나라는 걸 다시 한번.... 그래 재밌는 일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