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 - 줍고 고치고 사고팔며 가끔 나누는 SF 작가의 신기한 중고생활
이건해 지음 / 에이치비프레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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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이 여기저기 유행처럼 쓰이는 건 알고 있었지만,(나도 가끔 써먹기는 하지만) 아끼는 날들이라니.. ‘줍고 고치고 사고팔며 가끔 나누는 SF 작가의 신기한 중고 생활’이라는 제목에 이건 소설인가, 에세이인가 싶었는데 책은 줍고 고치고 사고팔며 가끔 나누는 작가의 소소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읽으면서도 들었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단언컨대 이 작가 ‘당근 마켓’을 수시로 열어보는 (그래서 주변에서 어플 좀 제발 지우라고 타박 받는) 나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아 이 묘한 동질감이라니.


​1. 스티브 잡스가 오픈한 사과농장을 운영한지도 나도 어연 15년차다. 나도 아이폰 4부터 시작해(3GS는 당시 별난 앱등이들이 보기 싫어 안산..) 맥북, 아이패드, 애플워치까지 처음 나온 시리즈부터 지금까지 쭉 사과 제품만 사용 중인 유저다.(물론 중간에 삼성페이가 궁금해 한번 다녀오긴 했지만) 그러던 내가 얼마 전부터 10년 전에 산 아날로그 시계를 차고 다닌다. 이유는 단순했다. 손목에 자꾸 울리는 알림이 어느 날 갑자기 짜증스러워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에 와 서랍장을 열어보았는데 의외로 해결은 쉬웠다. 돌이켜보면 세 번째 애플워치를 갈아치우며 '더 이상 일반 시계를 찰 일은 없겠구나'라고 생각한 내가 ‘언젠가는 쓰겠지’라는 나조차 믿지 않을 소리를 해대며 저걸 버리지도 팔지도 않고 그냥 둔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날 줄이야. 인터넷으로 시계줄을 사서 셀프로 갈며 나름 이런 기술이 내게 있음이 뿌듯했는데, 시계 약을 직접 가신다고.. 아 작가님 뭔지 정말 나랑 비슷하다.


2. 사과농장주로 살아가며 가장 마음이 지랄맞을 때가 ‘미친 건가’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AS 비용 청구서를 받아들 때다. 휴대폰 액정을 깨먹을 때도 있고, 패드는 배터리가 켠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닳아 없어질 때도 있다. 구입한지 2년 이내의 기기는 웬만하면 수리를 맡기는 편이지만(높은 확률로 나와 같은 앱등이들은 무조건 정품을 선호한다), 2년을 기점으로는 나도 셀프 수리를 시도하곤 한다. '알리'에서 부품을 구입한 뒤 유튜브나 블로그의 성공기를 연습해 보며 몇 개의 휴대폰 액정 및 배터리 자가수리 해봤는데 왠열 성공! 신이 나버린 나는 함부로 배터리 교체를 위해 패드를 열었다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사과별로 보내기도 했다.. (하…) 그 다음부터는 함부로 기계를 열지 않는다.


3. 당근을 통해 만나게 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그랬다. 내 중고거래에 대한 썰도 풀자면 끝도 없는데, 전자레인지 하나 팔고 봉투에 곱게 넣어 받은 만 원짜리 사연을 브런치에 올렸다 브런치 스타가 된 썰, 언젠가 전자피아노 나눔을 받으러 갔다가 네 명의 아이들이 멀뚱하게 에어컨도 없는 집에 앉아있는 걸 보곤, 아이스크림 한 봉다리를 가득 사서 피아노 값이라며 도로 넣어주고 온 썰. 지난주는 이미 거래 한지 한참 지난 분이 연락이 오셔서 당시 빠뜨렸던 물건과 함께 츄르 두 개를 넣어주셨는데 하필이면 그 때가 고양이가 아파 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던 때라 그렇게 한참을 위로 받던 썰. 아끼고 나누다 보면 만나는 좋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이 세상 아직 살만하다.


4. 아! 이 작가님도 도대체 작가님을 좋아하는 것 같다.


5. 선물에 대한 로망도 비슷했다. 선물에 대한 지론이 있는데 어차피 필요한 건 제 돈 주고 살 테니 ‘갖고는 싶은데 내 돈 주고 사기는 좀 애매한 물건을 주는 이가 기가 막히게 찾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런 나조차 생일선물은 주로 ‘카톡 선물하기’에 올라온 리스트에서 골라주고 마는 편이 되어버렸다. 생일을 당한 이가 위시리스트에 넣어놓은 목록 중 가격이 맞으면 사기도 하고, 이도 저도 아니면 만만한 브랜드의 커피 2-3잔 선물하곤 한다.(큰 금액의 상품보다 이렇게 쪼개주는 게 사용하기 쉽다.) 뭐 이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왠지 언젠가 생일을 당한 이를 떠올리며 선물을 고르고, 사고, 포장하고 가끔은 작은 메모도 남기고 그걸 생일을 맞은 이가 눈앞에서 풀어보는 걸 뿌듯해하던 낭만이 이제는 없다는 게 제법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세상이 변한걸.


여기까지 쓰고 나니 이 책, 리뷰가 아니라 내가 새로 쓰는 것처럼 애정이 가는 글이 되어버렸다. 딱히 지구를 위한 삶이라는 거대한 이유는 아니지만 ‘웬만하면 이제 새 옷은 사지 말자’라는 다짐을 중고거래를 하다 문득 해버린 적이 있다. 내 옷장에도 옷이 쌓여있고, 중고 장터에도 입을만한 옷이 널려있다. 내가 무슨 대단한 패셔니스타라고 나를 위한 새 옷은 이제 지구가 만들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사실 옷 뿐 아니라 모든 것이 과하다 못해 넘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리고 잘 들여다보면 누군가의 손때 묻은 모든 것에는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를 들어보는 건 꽤 즐겁고 신나는 일이다. 사람 냄새랄까. 가끔 잊어버리고 사는 그 냄새를 중고 물건에서 발견하기도 한다. ‘새삥’을 노래하며 사는 삶도 좋은 삶이지만, 누군가의 손때를 어루만지며 사는 삶도 나쁘진 않다. 아니 나는 사실 이 삶이 더 정겹고 내 삶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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