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 보이 블랙홀 청소년 문고 12
리사 톰슨 지음, 김지선 옮김 / 블랙홀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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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기회로 읽었던 『골드피쉬 보이」의 작가 리사 톰슨은 자칫 어른들이 간과하기 쉬운 청소년들의 섬세한 마음 상태와 상처, 트라우마를 소재로 기발한 아이디어의 글로 따뜻한 위로와 응원을 전하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간 『라이트 보이』 역시 부모의 외도와 이혼, 가정폭력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판타지 요소를 포함한 뛰어난 스토리텔링으로 청소년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깊은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다. 판타지 요소와 의외성, 스릴 면에서 이전 작품인 『골드피쉬 보이」보다 더 흥미로웠던 것 같다.

휴가여행이라고 하지만 도망치듯 서두르는 엄마의 태도에 휴가여행이 아님을 깨닫는 11살 소년 네이트. 네이트는 교묘하게 네이트를 학대하고 엄마를 조종하는 엄마의 새 남편 게리로부터 도망하는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낀다.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외딴 숲 속의 쥐와 닭이 서식하는 더럽고 오래된 집으로 와서 청소를 시작하는 엄마. 할머니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할머니와 엄마는 서로를 향한 서운함으로 대판 싸운 상태여서 갈 수가 없다. 식료품을 사러 간다던 엄마는 돌아오지 않는다. 네이트를 버려두고 게리에게 돌아간 걸까? 네이트는 비상 식량을 조금씩 먹으며 불안하지만 그럴 리 없다며 애써 엄마를 믿으며 기다린다. 그런 네이트에게 6년이나 잊고 있었던 환상 속의 친구 샘이 나타난다. 그리고 숲 속에서 당돌한 여자아이 키티가 나타나 함께 보물찾기를 하자고 한다. 네이트는 몹시 내키지 않지만 여자아이가 찾아낸 암호들을 하나둘씩 척척 풀어낸다. 하루하루 지나가도 엄마는 오지 않는다. 네이트는 상상 속의 친구들과 대화를 하면서 이겨낸다. 그리고 키티를 구하기 위해 어둠을 두려워하는 트라우마도 부인한다. 자기 자신을 이겨내는 것이다. 그러다가 알게 된 캐티의 정체... 그리고 캐티가 이끌어 준 엄마의 소재. 그리고 엄마와 할머니의 화해와 관계의 회복과 재건. 살짝 눈물이 날 뻔했다.

네이트가 암호를 풀어가는 과정, 키티, 그리고 샘과의 대화. 그리고 마지막까지 엄마는 어디로 간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단숨에 책장을 넘기게 했다.

게리와 같이 정말 나쁜 사람들도 있긴 할 것이다. 그러나, 어른도 완벽하지 않은 이상, 네이트의 아빠, 엄마, 할머니처럼 원치 않은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아픔 없이 성장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아이들은 자신만의 치유방법을 찾아내는 용기와 힘이 있는 것 같다. 뉴베리상 수상작인 『안녕, 우주』에서도 깊고 깊은 우물에 빠진 주인공에게 환상의 친구가 나타나 용기를 북돋워주고 우물에서 빠져나온 주인공은 이전과는 다른 용기 있는 아이가 된다. 책 속에서 만난 친구가 상상 속의 친구가 되어줄 수도 있고 애착인형이 친구가 되어줄 수도 있을 수도 있다. 그렇게라도 아이들이 희망을 가지고 컸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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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애의 도시 이야기 - 12가지 '도시적' 콘셉트 김진애의 도시 3부작 1
김진애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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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보지 않기 때문에 김진애 건축가를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정말 감탄하며 읽었다. 놀랍도록 박식하고 글이 시원시원하고 글 자체를 너무나 잘 쓰는 저자이기 때문이었다.



이 책은 12가지 컨셉트로 도시를 바라볼 수 있는 틀을 제공해 준다. 그 열 두 가지는 익명성, 권력과 권위, 기억과 기록, 알므로 예찬, 대비로 통찰, 스토리텔링, 코딩과 디코딩, 욕망과 탐욕, 부패에의 유혹, 이상해하는 능력, 돈과 표, 진화와 돌연변이이다.



정조가 꿈에도 나타난다고 하신 저자분이 정말 재미있었다. 아마 조선왕조의 왕 중에서 호감도가 가장 높은 왕이 세종대왕과 정조가 아닐까 싶다. 내가 거주하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수원 화성이 있고 자주 가는 돼지갈비집에 갈 때마다 지나다니며 예전에 통역할 때도 서울에서부터 대중교통으로 보러 왔는데 딱히 별 게 없었던 기억이 나는데 최근에 초등학생 큰 아이의 수행평가에서 유적지 조사를 해 오라기에 기왕이면 가까운 곳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수원성을 조사했는데 갑자기 자긍심이 높아졌다. 과학적이고 실용성 있는 구조와 적의 공격을 막기에 최적의 방어적 기능이 매우 뛰어나며 정약용의 혁신적인 과학적 기기들이 사용되었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도시와 건축물에는 스토리가 숨어 있고 과학이 숨어 있는 것 같다.



도시의 특징 중 익명성, 그리고 길과 광장에 관한 관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다. 어렸을 때 학교 다닐 때 익명성에 대해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배웠던 것 같은데 커서 점점 나 자신에 대해 알게 되며 나는 익명성을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엘리베이터에 같이 탄 초등학교 아이가 어른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당연한가? 나에게는 그렇지 않다. 난 아이가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버릇이 없다거나 어른을 공경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놀이터나 혹은 아파트에서 이미 아는 사이가 되었으면 모를까, 모르는 사람인데 엘리베이터에서 어른이라고 인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엘리베이터의 어른이 어떤 어른인지, 위험한 사람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즉, 익명성인 것이다. 물론 어른으로서 나는 같이 엘리베이터에 타게 되는 어른이나 아이들 모두에게 간단하게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한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그렇게 인사를 한다. 그러나 익명성으로 인해 그 누구의 정체도 위험성 여부도 알 수 없는 현대 도시에서 인사를 꼭 해야 한다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도시와 스토리... 통영을 한번도 가 보지 않았지만 왠지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곳의 예술인들, 그리고 미디어에 노출이 되면서 풍광이 익숙해서인 것 같다. 역사적으로 친근한 인물이 숨쉬고 살았던 공간, 즉, 그들의 스토리가 내게 호감을 주거나 혹은 내가 스토리의 일부가 되는 경우 그 도시를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살았던 시애틀과 도쿄를 사랑하는 이유도 내가 그 도시에서 20대의 스토리의 한 장을 채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것에 비하면 40년을 살았던 서울과 6년 반을 걸어다녔던 신촌 거리가 좋지 않은 것은 왜일까? 물론 종각에서 광화문, 정동길, 부암동 등 일부 나의 스토리, 나의 추억이 있는 곳에는 애착이 있다. 좋아하진 않지만 비하하지는 않는다. 예찬까지는 아니지만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 이후 폐허에서 이렇게까지 일으켜 세운 데 대한 경의가 있다. 일부 책들에서 일본의 도시들과 비교하며 서울을 비하하는 글을 보면 울화통이 터지기도 했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외세의 공격이라는 것을 모르고 켜켜이 전통에 전통을, 전통에 현대를 입힌 도시와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한국 사람들이 뭐든 빨리 허물고 새로운 것을 좋아한다는 비난도 가당치 않다. 늘 외세의 위험 속에 경계를 해야 하고 또 살아남기 위해 자기 부정이라는 면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렇게 일으켜 세운 건 대단한 것이다. 저자가 말한 "알므로 예찬"이다.



이제 우리나라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수준이 올라가며 공간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정말 좋은 것 같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가 아닐까? 다만 정치인들의 치적을 위해 이용되는 것이 문제인 것 같다. 새빛둥둥섬이 그 대표적 예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기왕지사 만들어놓은 건물 잘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닌게 아니라 잘 관리하면 멋지게 보이기도 했다.



예전에는 스위스의 풍경을 보며 난 자연을 사랑하고 시골을 사랑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살아보니 난 도시를 너무 좋아하고 거기에 바로 근접 거리에 자연이 있으면 더 좋은 것 같다. 딱 시애틀 같은 중형 도시가 좋은 것 같다. 지금 살고 있는 교외도 정말 좋다. 도시에 관한 12가지 컨셉트는 앞으로도 도시를 보는 나의 안경이 되어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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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클래식 오디세이 9
조지 오웰 지음, 뉴트랜스레이션 옮김 / 다상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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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풍자와 날카로운 현실 고발이 백미인 조지 오웰의 오랜 걸작을 이제야 읽어봤다. 학창시절에 읽었더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어쩌면 그때는 체제와 세계사를 더 몰랐기 때문에 지금 읽는 것도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악덕 농장주 존스 씨를 향한 동물들의 반란이 시작됐다. 메이저 영감의 짧지만 강력한 스피치에 의해 동물들은 자신들의 노동의 대가를 착취하는 인간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는 사상을 기초로 7가지 계명을 공포한다. 그러나 곧 혁명의 주축인 두 돼지 나폴레옹과 스노볼 중 나폴레옹이 스노볼을 축출하고 전제적인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하며 동물 농장은 왜곡되어 간다. 나폴레옹은 점점 자신의 배만 채워가고 공포정치를 시작하면서 동시에 처음 공포했던 계명들의 어구를 조금씩 바꿔가며 자신의 입맛에 맞게 고쳐간다. 이에 반응하는 각 동물들의 모습에서 각 사회계층 인간군상을 엿볼 수 있다.

알다시피 이 동물들은 러시아 혁명기의 러시아의 각계 각층의 사람들을 상징한다. 메이저 영감은 공산주의의 이론적 틀을 확립한 마르크스를, 나폴레옹은 스탈린을 상징한다. 프롤레타리아 계층을 상징하는 말 복서가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점점 타락하여 그들이 대항했던 대상인 사람들과 똑같은, 오히려 악독한 짓을 일삼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전체주의가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멋진 작품을 통해 실감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베이스가 된 것은 바로 언론 통제였다는 것에 우리가 살아가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횡행하고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그렇게 재벌들이 언론사 하나씩은 갖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참 묘하게 문구 하나둘씩 바꾸고 뉘앙스와 어조를 통해 사람들의 기억을 조작하고 말살하고 통제한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우리가 언제나 깨어있지 않으면 동물농장의 수많은 종의 동물들처럼 "그랬었나?"하면서 당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인터넷 시대가 도래하며 언론이 예전처럼 그렇게 좌지우지하지는 못할 것 같은데 여전히 해야 할 말을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는 언론의 모습은 건재한 것 같다. 무엇이 진실인지 100% 알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의심해보고 경계하는 자세는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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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 미트 - 인간과 동물 모두를 구할 대담한 식량 혁명
폴 샤피로 지음, 이진구 옮김 / 흐름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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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읽은 책들 중에서 가장 획기적이고 충격적이면서도 지성적인 책이었다. 고기와 가축을 얻기 위해 동물을 처음부터 키워 도축하는 것이 아니라 실험실에서 세포부터 배양하여 원하는 부위를 얻는다는 것이다. 본서 내에서는 Clean Meat, 청정고기라고 명명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배양육'이라고 소개된 것 같다.

식품업계의 혁신이 이렇게 대규모로 진행되고 있는지 몰랐다. 전기차, 자율주행차, 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 AI 등의 소위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불리는 것에는 전문적이지는 않더라도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먹거리, 그것도 고기를 실험실에서 만들어내는 발상은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빌게이츠, 구글 벤처스 등 저명인사들과 벤처 캐피탈들이 투자하는 것을 보면 정녕 도입되고야 말 것 같다. 시간 문제일 것 같다.

저자는 현재와 같은 공장식 사육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몸살을 앓은 적이 있었던 조류 인플루엔자, 구제역, 최근의 아프리카 돼지열병 등의 판데믹 창궐, 그리고 항생제 달걀 파동 등 무분별한 항생제 사용 등은 짐작할 수 있었던 바였는데 실은 동물의 사료가 되는 식물을 기르기 위한 경작지 확보를 위해 열대우림 등이 파괴되고 CO2 발생 등 온실가스의 주 원인이 되는 점이 축산업의 더 큰 해악이라고 나와 있었다. 그러므로 동물 복지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환경운동가들 역시 공장식 사육에 반기를 들고 있는 것이다.

사실 주부가 되기 전에는 먹거리에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어렸을 때는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하기 위해 음식을 고루 먹으라고 했었다. 그러나 현재 내가 가족의 식탁을 책임지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최대한 각 음식의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골고루 식자재를 사는 편이다. 어느 먹거리도 믿을 수가 없기에 특정한 어떤 음식을 편식하다가 병을 얻을 것 같아서이다. 최대한 위험을 분산시킨다고나 할까?

항생제 범벅일 계란이나 닭고기, 돼지고기, 소고기는 돌아가며 사용하고 잘은 모르지만 청정하다고 하는 호주 소고기를 주로 산다. 난류성 어종으로 후쿠시마 근처 바다를 헤엄치고 왔을지 모를 국산 고등어는 식탁에 안 올린 지 10년이고 방사능을 흡수한다고 하는 표고버섯은 육수 낼 때도 쓰지 않는다. 해류가 고여있어 우리 생각만큼 청정 바다가 아니라고 하지만 노르웨이 고등어를 아주 가끔 요리한다. 시댁에서 보내 주시는 영광 굴비도 고급 어류로 알려져 있지만 꺼림칙하다. 어디에서 잡히는지 잘 모르겠고 폐수를 쏟아낼 중국 쪽 바다에서 잡아서 영광에서 말린 거라면 그것도 불안하다. 유럽에서는 철저히 규제하는 농약을 치는 것으로 알려진 연어도 부페 가면 한두 점 먹는 것으로 만족한다. 연어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고행에 가깝다. 지금 나열한 것만으로도 우리 식탁의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가? 그러니 나쁜 것을 다 피하다 보면 먹을 게 없으니 골고루 먹음으로 위험을 분산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씁쓸한 현실인가?

이처럼 참담한 식탁의 현실에 '클린 미트'가 대안이 될 것인가? 아직은 조금 이르지만, 그리고 현재와 같은 축산업을 완전 대체하지는 않겠지만 조만간 식품 산업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물론 난관이 없지는 않다. 비용 절감의 문제, 산업용으로의 대량생산의 과제, 정부 규제 및 기타 행정적 이유, 그리고 무엇보다 소비자의 선택 혹은 저항이다. 자율주행차에 열광하듯 클린 미트를 환영할 것인가?

저자는 고기보다 '가죽'으로 심리적 허들을 낮추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나로서도 섭취하는 것보다 착용하는 가죽, 즉, 지갑, 가방이나 허리띠라면 저항감이 덜할 것 같기는 하다. 가죽제품을 위해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희생되고 있는가? 가죽 생산을 위해서도 동물의 희생 뿐만 아니라 무두질 과정에서 폐수가 발생하는 등 환경오혐 문제가 심각하다.

중국, 인도 등 무시할 수 없는 인구를 보유한 개발도상국들의 발전으로 인해 고기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데 이 수요를 공급이 감당할 수 있을까? 식물성 고기는 진짜 고기가 아니다. 저자는 동물복지와 환경 문제 등의 해답으로 클린 미트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포드 사의 대량생산 자동차의 등장으로 기존의 마차, 말 사육 등의 산업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처럼 현재와 같은 공장식 사육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우리가 노예제도를 보며 경악하듯 후대 사람들을 경악하게 할 과거의 유물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충격적인 책을 읽은 나의 감상은 '글쎄'라는 것이다. 빌 게이츠, 구글의 세르게이 브린이 나보다 지혜와 통찰력이 없어 이 새로운 식품 혁신에 투자하고 있는 것은 아닐 테니 분명 미래의 추세가 될 것 같기는 하다. 일단 저자가 제시하고 있듯이, 한 명의 소비자로서 나는 심리적 거부감이 꽤 크다. 얼리 어답터가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유기농이나 목초지에서 사육한 동물의 고기를 더 원할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문제는 또 하나의 제국주의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엄청난 자본력과 기술력이 필요한 산업이고 그것을 보유하고 있는 선진국이 이 시장을 장악하고 판을 짜버리고 이권을 차지한 후 규제에 들어가버리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축산업은 소규모로 하자면 닭 한 마리, 돼지 한 마리만 있어도 시작할 수 있는 진입장벽이 낮기 때문에 제3세계의 가난한 가정에서도 시작할 수 있지만 클린 미트가 시장을 주도해 버리면 양극화가 더 심해져버릴 것 같다.

마치 전 세계적인 환경 규제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선진국들은 산업화 과정에서 이미 환경을 희생하여 발전을 이루었다. 그리고 후발주자들인 개발도상국들이 이제 발전하려고 하니 환경이라는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명제를 들이대며 규제하려 한다. 환경과 경제 발전은 트레이드오프 관계이다.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하고 개발도상국들을 미개한 것처럼 몰아간다. 똑같은 일이 배양육 시장에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현재야 개발 단계라고 하지만 대량 생산으로 공급과 공급 가격이 상용화할 정도가 되면 분명 동물복지와 환경 문제를 이유로 규제에 들어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후발 주자들은 빌 디딜 곳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게 약육강식의 세계라고 하면 할 말은 없다.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책이었다. 우리 아이들이 조금만 더 크면 이 주제로 책을 읽고 함께 자료를 조사해 보고 토론해 보고 싶은 책이었다. 지금의 고기 및 가죽 소비 행태가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클린 미트의 시대가 더디게 왔으면 하는 바람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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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락 댄스
앤 타일러 지음, 장선하 옮김 / 미래지향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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퓰리처상 수상 작가 앤 타일러 작가의 신간이다. 앤 타일러 작가의 책으로 처음 접한 책은 『종이시계』였다. 아마 15년 전이었던 것 같다. 사실 그 작품에 관심이 있어서였다기보다 그 작품의 역자가 故 장영희 교수님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장영희 교수님의 에세이를 읽으며 알게 되어 호기심에 읽어보게 되었던 것 같다. 메이브 빈치 작가처럼 앤 타일러 작가도 대단한 사건을 다루기보다는 우리 주위의 어느 곳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사람들, 그리고 일상의 소소한 사건들을 통해 삶에서 중요한 것을 살짝 보여주는 분인 것 같다. 두 권밖에 안 읽어보고 할 말은 아니지만 『종이시계』와 『클락댄스』에서 느껴지는 소감은 그렇다.



과거로 대변되는 1967, 1977, 1997의 일들과 현재로 대변되는 2017의 이야기가 굵은 줄기로 진행된다. 1967년에 11살이었으니 주인공 윌라는 1956년생쯤 될 것이다. 어떤 세대일까 생각하며 읽으려 하니 우리 엄마보다 세 살 정도 많은, 거의 같은 세대로 봐도 무방하겠다 싶어서 엄마 세대를 머리 속에 그리며 읽었다.



윌라는 좋게 말하면 다정하고 조심스러우며 배려 있는 여성이고 나쁘게 말하면 주위 사람들의 강한 의견에 따르고 자기 인생에 주도적이지 못한 수동적인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우리나라보다는 여성 인권 및 교육이 앞선 미국 상황이긴 했지만 1900년대 중반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보아 우리 엄마 세대라고 생각을 하니 납득이 가는 부분도 있었다.



1967: 아름답지만 정서가 불안정하여 가정을 순간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엄마, 우직하고 일관적인 아빠, 여동생 일레인 이렇게 4인 가족의 장녀인 윌라. 부부싸움 끝에 엄마가 집을 나가버리고 불안과 초조함이 마음 속에 각인된다. 엄마가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늘 이런 식으로 엄마는 가족의 삶을 뒤흔들어 놓는다.



1977: 윌라보다 나이가 많아 먼저 졸업하는 남자친구 데릭. 윌라는 언어학자를 꿈꾸는 영특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여대생이다. 데릭은 직장과 함께 캘리포니아로 떠나야 하는데 윌라가 공부를 그만두고 자기와 결혼하여 함께 떠나기를 바란다. 공부에 한참 재미도 붙였고 교수님과의 프로젝트에 적극 참여하려던 윌라는 망설이지만 결국 데릭을 따른다.



1997: 둘째 아들 이안이 고등학교 재학 중에 휴학을 하겠다고 하여 윌라의 심기가 불편하다. 그 와중에 믿음직하지만 성마른 성격의 데릭이 고속도록에서 옆 차선의 운전자에게 보복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윌라의 삶이 또 한번 전복되는 사건이다.



2017: 그리고 현재. 2017년. 윌라의 두 아들, 션과 이안은 각자 자신의 삶에 열중해 있고 윌라는 재혼한 남편 피터와 함께 애리조나에 살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걸려온 전화. 맏아들 션이 한때 동거했던 드니즈라는 여성이 다리에 총을 맞아 입원했다며 그 딸을 돌봐야 하는데 와 줄 수 있겠냐는 드니즈의 이웃 여자의 전화였다. 어딘가에 윌라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어서 보고 전화했다고 말이다. 사실 윌라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션과 드니즈는 이미 헤어졌고 드니즈의 딸은 션과는 상관이 없다. 한마디로 생판 남이다. 그러나 윌라는 왠지 자기가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넌무 무료해서 뭔가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윌라보다 열 살 많은 재혼남 피터는 은퇴한 변호사였는데 늘 윌라를 아기 취급하며 보호하려고 한다. 이번에도 왜 그곳에 가는지 모르겠다면서도 윌라와 동행하여 드니즈의 집까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온다.



이렇게 독특하면서도 서로를 돌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마을 사람들과의 삶이 시작되었다. 피터는 못마땅한 자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지만 윌라는 드니즈와 드니즈의 딸 셰릴을 돌보고 마을 사람들의 속사정와 이면의 모습도 알아가게 된다. 피터는 윌라를 못마땅해 하며 윌라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드디어 최후의 순간에 61년만의 주체적인 결정을 내리는데...



솔직히 윌라의 모습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리 엄마 세대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 바도 아니긴 하다. 지성적으로는 성숙한 반면, 마인드가 자기 뜻을 굽히고 시대와 가족의 기대에 순응하여 인생의 항로를 바꾸는 수동적인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싫은 이유는 그녀보다 적어도 다음 세대라고 할 수 있는 내 모습에도 그녀와 같은 모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릴 적과 달리 냉담하고 독립적으로 변한 동생 일레인에 대한 바람, 성인이 되어 무심한 두 아들들에 대한 바람, 그리고 까다롭고 불만이 많아 다른 사람과 잘 못 어울리는 재혼 남편 피터에 대한 바람 등 모든 것을 마음 속으로만 바라기만 하고 주체적으로 상황을 바꾸거나 자기가 리드하지 않는다.



나 역시 상처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 결여로 늘 바라고 원하고 품지만 주체적이지 못한 것은 아닐까? 사람이란 모순적인 존재여서 나는 누가 날 좌지우지하고 조종 및 통제하는 것을 무척 싫어하고 민감하게 캐치한다.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는 이유로 내게 포기의 면죄부를 주기도 한다.



참 우연한 계기로 드니즈의 동네에 갔고 참 특이한 인물들이 모여있는 곳이지만 그곳에서 윌라는 자기의 존재가치를 느끼고 편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자기가 있을 곳을 난생처음 스스로 정하게 된다. 언제라도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한다. 윌라의 나이 61세. 어찌 보면 자신의 거취를 정하기엔 늦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발달과업이라는 것은 남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움직일 때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마른 하늘에 날벼락 맞은 윌라의 새 남편 피터의 입장에서 보면 기가 막힐 노릇이긴 하지만 둘이 어차피 여생을 같이 하기엔 맞지 않았다는 증거인지도 모르겠다.



《종이시계》도 무척 일상적인 이야기 속에서 잔잔하게 삶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던 것 같았는데 이 책에서도 미국인들의 매일의 생활이 낱낱이 그려지는 가운데 각자의 인생의 주인공인 각 캐릭터가 서로 사랑하고 다투고 또 용서하고 자기 인생을 찾는 다이내믹이 참 백미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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