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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애의 도시 이야기 - 12가지 '도시적' 콘셉트 ㅣ 김진애의 도시 3부작 1
김진애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11월
평점 :
TV를 보지 않기 때문에 김진애 건축가를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정말 감탄하며 읽었다. 놀랍도록 박식하고 글이 시원시원하고 글 자체를 너무나 잘 쓰는 저자이기 때문이었다.
이 책은 12가지 컨셉트로 도시를 바라볼 수 있는 틀을 제공해 준다. 그 열 두 가지는 익명성, 권력과 권위, 기억과 기록, 알므로 예찬, 대비로 통찰, 스토리텔링, 코딩과 디코딩, 욕망과 탐욕, 부패에의 유혹, 이상해하는 능력, 돈과 표, 진화와 돌연변이이다.
정조가 꿈에도 나타난다고 하신 저자분이 정말 재미있었다. 아마 조선왕조의 왕 중에서 호감도가 가장 높은 왕이 세종대왕과 정조가 아닐까 싶다. 내가 거주하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수원 화성이 있고 자주 가는 돼지갈비집에 갈 때마다 지나다니며 예전에 통역할 때도 서울에서부터 대중교통으로 보러 왔는데 딱히 별 게 없었던 기억이 나는데 최근에 초등학생 큰 아이의 수행평가에서 유적지 조사를 해 오라기에 기왕이면 가까운 곳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수원성을 조사했는데 갑자기 자긍심이 높아졌다. 과학적이고 실용성 있는 구조와 적의 공격을 막기에 최적의 방어적 기능이 매우 뛰어나며 정약용의 혁신적인 과학적 기기들이 사용되었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도시와 건축물에는 스토리가 숨어 있고 과학이 숨어 있는 것 같다.
도시의 특징 중 익명성, 그리고 길과 광장에 관한 관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다. 어렸을 때 학교 다닐 때 익명성에 대해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배웠던 것 같은데 커서 점점 나 자신에 대해 알게 되며 나는 익명성을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엘리베이터에 같이 탄 초등학교 아이가 어른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당연한가? 나에게는 그렇지 않다. 난 아이가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버릇이 없다거나 어른을 공경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놀이터나 혹은 아파트에서 이미 아는 사이가 되었으면 모를까, 모르는 사람인데 엘리베이터에서 어른이라고 인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엘리베이터의 어른이 어떤 어른인지, 위험한 사람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즉, 익명성인 것이다. 물론 어른으로서 나는 같이 엘리베이터에 타게 되는 어른이나 아이들 모두에게 간단하게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한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그렇게 인사를 한다. 그러나 익명성으로 인해 그 누구의 정체도 위험성 여부도 알 수 없는 현대 도시에서 인사를 꼭 해야 한다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도시와 스토리... 통영을 한번도 가 보지 않았지만 왠지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곳의 예술인들, 그리고 미디어에 노출이 되면서 풍광이 익숙해서인 것 같다. 역사적으로 친근한 인물이 숨쉬고 살았던 공간, 즉, 그들의 스토리가 내게 호감을 주거나 혹은 내가 스토리의 일부가 되는 경우 그 도시를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살았던 시애틀과 도쿄를 사랑하는 이유도 내가 그 도시에서 20대의 스토리의 한 장을 채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것에 비하면 40년을 살았던 서울과 6년 반을 걸어다녔던 신촌 거리가 좋지 않은 것은 왜일까? 물론 종각에서 광화문, 정동길, 부암동 등 일부 나의 스토리, 나의 추억이 있는 곳에는 애착이 있다. 좋아하진 않지만 비하하지는 않는다. 예찬까지는 아니지만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 이후 폐허에서 이렇게까지 일으켜 세운 데 대한 경의가 있다. 일부 책들에서 일본의 도시들과 비교하며 서울을 비하하는 글을 보면 울화통이 터지기도 했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외세의 공격이라는 것을 모르고 켜켜이 전통에 전통을, 전통에 현대를 입힌 도시와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한국 사람들이 뭐든 빨리 허물고 새로운 것을 좋아한다는 비난도 가당치 않다. 늘 외세의 위험 속에 경계를 해야 하고 또 살아남기 위해 자기 부정이라는 면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렇게 일으켜 세운 건 대단한 것이다. 저자가 말한 "알므로 예찬"이다.
이제 우리나라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수준이 올라가며 공간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정말 좋은 것 같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가 아닐까? 다만 정치인들의 치적을 위해 이용되는 것이 문제인 것 같다. 새빛둥둥섬이 그 대표적 예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기왕지사 만들어놓은 건물 잘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닌게 아니라 잘 관리하면 멋지게 보이기도 했다.
예전에는 스위스의 풍경을 보며 난 자연을 사랑하고 시골을 사랑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살아보니 난 도시를 너무 좋아하고 거기에 바로 근접 거리에 자연이 있으면 더 좋은 것 같다. 딱 시애틀 같은 중형 도시가 좋은 것 같다. 지금 살고 있는 교외도 정말 좋다. 도시에 관한 12가지 컨셉트는 앞으로도 도시를 보는 나의 안경이 되어 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