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어휘력 - 말에 품격을 더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힘
유선경 지음 / 앤의서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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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베스트 오브 베스트'라고 제목을 썼다가 명색이 어휘에 관한 책인데 영어 남발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최고의 책'이라고 썼다. (느낌이 확 안 오는 느낌...) 책 한 권을 통째로 외워버리고 싶은 책을 만났다. 2/3 지점까지 읽은 시점에서 이미 책 좋아하고 책을 쓰고 있는 지인에게 추천했다.

이 책은 어휘력, 특히 학창시절을 다 보내고 어휘 학습을 거의 하지 않는 성인들에게 왜 어휘력이 필요한지, 어떻게 하면 어휘력을 늘릴 수 있는지, 그리고 글쓰는 요령까지 자세히 안내해 준다. 게다가 저자의 놀라운 어휘들을 선보이고 있다. 본문에서 다양한 어휘를 사용하며 그 각주를 꼼꼼히 달아놔서 그 각주가 279개에 이른다. 그 어휘들만 공부해서 내것으로 익혀도 언어생활의 품격이 몇 단계는 뛸 것 같다.

단순히 기술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언어가 소통의 기본이 되며 언어의 한계만큼 세상이 넓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나 역시 국어 공부든 외국어 공부든 어휘를 매우 중요하게생각한다. 그리고 갈고 닦지 않으면 저자가 말한 대로 그거, 저거, 그런 거, 그렇잖아, 등등 지시대명사들로 불분명하게 말하면서 상대가 이해하지 못 하면 좌절감을 느낀다.

며칠 전에 작은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청개구리 이야기를 듣고 왔다며 다시 이야기를 들려달라는데 의외로 입에서 술술 나오지 않아 깜짝 놀랐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대략의 내용을 찾아 확실히 내용을 되새기고 나서야 명확한 언어로 이야기해줄 수 있었다. 그리고 TV를 거의 보지 않다가 며칠 예능프로그램 같은 것을 보고 나면 물꼬 트인 것처럼 한국말이 유창해져서 인풋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외국어를 배울 때도 책도 많이 보지만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 등 다양하게 접하려고 한다.

저자는 어떤 낱말을 정확히 체험하고 이해하고 나서야 자기것이 된다고 했는데 우리가 모든 것을 체험할 수 없으니 국어사전과 용례, 그리고 직접 문장을 만들고 써봄으로써 어휘가 내것이 되고 언어생활이 윤택해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저자는 말하기와 글쓰기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런 작업을 반복하면서 발견한 사실은 의외로 많은 사람이 말하기와 글쓰기를 분리한다는 점과 주어와 시점을 챙기는 데 서투르다는 것이다. 글을 가장 쉽게 쓰는 방법은 말을 받아쓰는 것이다. 여기에 주어와 시점만 잘 챙겨도 웬만한 문장은 완성할 수 있다. (186쪽)"

우리가 글쓰기 훈련을 많이 받지 않는 편인 것 같기도 하고 백지를 채우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지만 우리가 말로 설명할 때 쓰는 언어 그대로 옮기며 조금 다듬는 정도로 접근하면 그리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번역을 해놓고 원문 대조하며 교정 후, 한글 원고만을 가지고 입으로 중얼중얼 읽으며 마지막 교정을 한다. 그러면 어색한 문장이 많이 잡힌다. 보다 자연스럽고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완성하려고 한다.

『편집자처럼 책을 보고 책을 쓰다』라는 책에서 출판물의 대상을 중졸 이상의 대중으로 보며 쓰라고 했던 것을 봤던 것 같다. 그래서였는지 모르겠는데 첫 역서에서 최대한 독자 친화적으로 어휘를 나름 골랐다고 생각했는데 편집자님이 정말 쉬운 말들로 바꾸셨었다. 그게 내 나름대로의 딜레마이다. 이렇게 점점 출판물이 쉬워지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쉬운 표현이라고 해서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일반적이고 대중적이고 무난한 표현 몇 가지만을 쓰게 되는 것이다. 저자도 지적하는 바이다.

그리고 책을 쓰든 번역을 하든 '비슷한 말'을 많이 아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인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것 같다. 가령, '혼내다'는 의미로 질타, 질책, 면박, 꾸지람, 야단치다, 꾸짖다, 타박, 면책 등등 국어사전에 나온 유의어를 포함하여 자신의 경험이 쌓여 가능한 한 많은 비슷한 말들을 엑셀에 정리해 두면 정말 유용하다. 바로바로 떠오르지 않을 때 이전에 작업하며 데이타베이스로 쌓아두었던 어휘들에서 하나씩 대입해보면 맞는 것이 있기도 하고 또 퍼뜩 잠재의식 속에 있던 어휘가 튀어나오기도 한다. 고유 창작물이라기보다 고유 저작물을 번역하여 2차 창작물이라고 할 수 있는 역서가 너무 특이한 어휘를 쓰는 것도 의아할 경우도 있다. 원 저자가 그만큼 같은 의미에서도 특이한 어휘를 구사했다면 최대한 그에 적합한 국어 어휘를 찾지만 그렇지 않다면 원어의 느낌을 살린 무난한 말이 좋을 때도 있다.

한 가지 좀 고개를 갸웃했던 것이 있었다. '인적 자원'은 사람을 자원과 동격 취급한 것이니 '인재'라고 써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물론 맞는 말씀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이렇게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굳이 쓰는 용어도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인적 자원'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을 볼 필요도 있다고 본다. 기계화를 통한 산업 혁명 속에서 자본가의 횡포 속에서 노동자는 나사 하나만큼의 가치로밖에 보지 않다가 인간, 노동력의 중요성이 대두하면서 생산에 있어 인간이 그만큼 중요한 자원이라는 인식이 새로 싹트면서 탄생한 말이고 그렇기에 인간은 나사 조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게 비슷한 인상을 주는 말이 함무라비 법전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무서운 복수의 말이었다. 그런데 당시 상황을 생각해 보면 손해를 입힌 특정 재산 뿐만 아니라 목숨을 빼앗아버리는 일들도 비일비재했기에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만 제한하여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규정한 것이라는 말을 듣고 내가 지금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지금의 기준으로 과거의 산물을 무조건 재고 자를 수는 없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정말 이 책을 가지고 한 달 넘게도 이런 저런 화두를 찾아내어 토론할 수 있을 것 같다. 두고 두고 읽고 싶고 같이 이 책으로 공부할 동무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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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공주 해적전 소설Q
곽재식 지음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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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기발하고 재미있는 서평 이벤트를 만났다. 작가 비공개 서평단은 처음이었다. 제목부터 호기심을 자극하고 생각과 달리 길지 않은 분량에 전체가 수록된 건가 했는데 전체가 수록되어 있었다. 신라 시대, 게다가 공주에 해적이라니, 이 조합으로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 지 정말 궁금했다. 찰지고 정곡을 찌르는 대사들로 읽는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장보고 선단을 따라 다니며 잔심부름을 하며 지내다가 장보고가 망한 이후 벌어놓은 재산을 탕진하고 물주를 하나 잡아볼까 하는 장희는 마을 사람들에게 쫓기는 한수생을 만나 생명을 구해준다. 그러다가 해적 무리와 만나 구사일생한 후 또 우연히 200년 전에 망한 백제 부흥을 꿈꾸는 후손들을 만난다. (실은 시정잡배들이다.) 그들은 백제 풍 태자가 숨겨놓은 보물을 찾아 서해의 섬 하나에 모여 산다. 장희가 기지를 발휘하여 가장 핵심적인 악당을 소탕하고 평안한 삶으로 돌아간다.

이 '장희'라는 캐릭터 정말 사랑스럽다. 눈치코치 빠르고 박학다식하며 온갖 술수와 위협이 난무하는 가운데 핵심이 무엇인지 꿰뚫는다. 처세술도 뛰어나며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을 알고, 선한 자와 악한 자를 분별해내는 제갈공명 저리가라 할 만 한 지략가이다. 어쩌다 시절을 잘못 만나 반 사기꾼 같은 행동을 하려 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선량하고 의리도 있다. 이런 멋진 캐릭터가 다 있을까?

재미있게 읽고 넘길 책에는 나도 죽자고 달려들지 않는데 왜 자꾸 머릿속에 '프로파간다'라는 단어가 맴도는지 모르겠다. 한수생은 비록 시골의 가난한 선비이지만 분수를 알고 견실하게 땅을 일구며 글을 읽는 청년이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뜬구름 잡는 듯한 신문물에 현혹되어 모든 것을 탕진하며 한수생의 재물을 탐한다. 한수생의 자비로 재물을 나눠 주었는데 어처구니없는 논리로 한수생이 자신들을 위협할 것이므로 먼저 제압해야 한다며 한수생을 잡으려 한다. 사람들이 선동되어 그릇된 길로 빠지고 거기에서 돌이킬 수 없이 자기 자신을 속이며 또 선동을 하여 더 악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어서 혀를 끌끌 찼다. 허구 속의 진실의 한 방이 아니었나 하고 혼자 생각해봤다.

그리고, 한 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다. 선량하고 건전한 양심의 소유자이지만, 자신을 방어할 지혜와 강인함이 없는 한수생, 장보고를 따라 다니다가 해적으로 전락한 일단의 무리들,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고 200년 전에 망한 백제 재건을 빌미로 사람을 몰아 착취하는 무리, 주위에서 공주라고 추어올리니 정말 공주인 체하다가 그렇게 믿어버린 듯한 백제의 공주, 그리고 어떤 상황, 어떤 시대에도 살아남을 놀라운 생존력을 지닌 장희. 이 중 나는 누구인가? 바라기는 장희 같으면 좋겠는데 그처럼 총명하질 못 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읽었지만 그저 정말 재미있었다. 캐리비안의 해적의 키이라 나이틀리를 생각했지만 그 이상의 유희를 누릴 수 있었다. 192페이지 정도 되니 중편 소설 정도라고 해야 하나? 선명한 인물상, 군더더기 하나 없이 속도감 있는 진행 등 중편 소설의 미덕이 모두 발휘된 소설이어서 좋았지만, 이렇게 재미있는 책이 시작되려니 끝나버려서 너무 아쉬웠다. 잔망스러운 캐릭터들을 추가하여 양념도 치고, 묘사도 좀 더 넣고 에피소드도 좀 더 지금 분량만큼 추가하여 400페이지짜리 책으로 가필해 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을 품어보았다.

작기 비공개라고는 했지만 검색하면 바로 나온다. 일부러 이런 허술함을 꾀한 걸까? 보통 이력의 작가님은 아니었다. 역시 대단한 분들이 많다. 작가님 이름 확실히 각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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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나토미가의 참극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10
아오이 유 지음, 이현진 옮김 / 이상미디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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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표지 속의 폭주 기관차가 인상적인 책인데 극중에서 열차 시간표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인 것 같다. 추리소설도 좋아하고 특히 다양한 일본 추리소설을 좋아하는데 이렇게 오래된 작품을 본 것은 처음인 것 같다. 고전적이고 묵직해서 정말 좋았다. 요즘 작품들보다 어쩌면 더 나의 개인적인 취향에 맞았던 것 같다.

이상 출판사에서 일본 고전 추리소설 시리즈가 나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말 그대로 해독이 안 되어 이해를 못 할까 봐 두려웠다. 용기를 내어 읽어보았는데,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다. 일본추리소설 시리즈 10번째로 나온 책인데, 앞의 아홉 권도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

절경을 자랑하는 시라나미소라는 일본 전통여관에서 잔혹한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후나토미가의 안주인 유미코는 살해되었고 남편 류타로는 실종 상태이지만 아마도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전직 경찰인 난바가 파견되었다. 변호사인 사쿠라이와 함께 협업한다. 다키자와라는 청년이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되고 모든 정황 증거가 그가 범인임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난바와 사쿠라이는 그것을 뒤집을 만 한 추리를 한다. 난바의 조수로 온 스사라는 청년은 무척 산뜻한 호감형 청년이다. 다키자와의 친구이기도 하며 다키자와의 약혼자였던 유키코, 살해당한 부부의 딸이기도 한 여성과 결혼이 예정되어 있다.

난바의 추리가 거의 맞아들어가 다키자와의 무죄가 입증되고 사건이 종결되려는 순간, 또 다른 살해사건들이 발생하며 사건은 점점 복잡하게 꼬여간다. 그때 등장한 전설의 명탐정, 아카가키가 현장에 있지도 않으면서 모든 사건을 척척 해결한다.

*

고도의 과학 수사기술이 발전한 현대에는 가능할 것 같지 않지만, 꽤나 치밀하고 촘촘한 구성이 돋보이는 추리소설이었다. 특히, 일본 사람들의 각별한 애정의 대상인 전차를 소재로 사용하고, 변장과 1인 다역 등 흥미로운 점들이 많다. 고전적이고 묵직하고 쉽게 쓰지 않은 듯한 정중한 느낌의 추리소설이었다.

이 작품 자체에서는 동기(와이더닛)와 트릭(하우더닛)은 매우 흥미로운 데 비해 범인 자체, 즉 '후더닛'은 금세 짐작할 수 있다. 절대 흠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어떤 흠도 없이 그려지는 인물, 모든 피해자들의 근접거리에 있는데 사건을 좇는 난바와 사쿠라이의 레이저망에 한 번도 오르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극중에서는 '바이어스' 때문에 난바가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것으로 풀고 있지만 독자에게는 바로 범인을 지목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건 그렇다치고 범인도 머리가 비상하고 편집증적으로 꼼꼼히 사건을 준비했고, 범인의 각본대로 꼭두각시 놀음을 하는 난바가 애처로웠으며, 셜롬 홈즈처럼 나타나 사건을 해결하고 범인 검거까지 단번에 이뤄내는 아카가키의 모습이 통쾌했다. 그야말로 추리소설이 주는 쾌감 그 자체였다. 어떨 때는 사회적 메시지를 전하려는 추리소설보다 이렇게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본격 미스터리가 산뜻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물론 사회파 추리소설도 무척 좋아하지만 말이다.

이 작품은 1936년 춘추사의 신작 장편 탐정소설 현상 모집에 1등에 입선했다. 이 소설의 입지는 무척 대단하다. 에도가와 란포, 아유카와 데쓰야, 마쓰모토 세이초 등 우리가 이름만 들으면 알 만 한 걸출한 일본 추리소설의 대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 이후 일본 추리소설이 엄청나게 융성하여 지금까지 탄탄한 추리 작가들이 배출되고 있는 것 같다.

엄청난 일본 지명, 인명과 익숙하지 않은 철도망과 시스템 때문에 어쩌면 그리 읽기 쉽지 않을 수는 있지만, 주요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크게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도쿄 쪽이었으면 그나마 조금은 감이 왔을 텐데 전혀 모르는 곳들이라 만만치는 않았다.

그러나, 일본 고전 추리소설을 맛보고 싶은 분들에게는 강력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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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레터
이와이 슌지 지음, 문승준 옮김 / 하빌리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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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이와이 슌지 감독이었다. <러브 레터>가 23년 전 영화였다는 것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카야마 미호의 흰 피부와 오타루의 거리 풍경, 향수를 자아내는 회상 장면들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겨울연가> 등의 한국드라마에서 시작된 일본 내 한류 등으로 양국 관계가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우호적이었던 시절이었다. 이 영화를 통해 동경하던 오타루를 2003년 가을에 찾았다. 신치토세 공항에서 바로 오타루로 향했다. 오타루 근처로 갔을 때 바다 쪽에 바로 붙어 달리던 전차는 마치 바다에 떠서 달리는 느낌이었다. 오타루는 그때 이미 조금 관광지의 면모를 띠고 있어 생각만큼 감성 충만한 곳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소도시의 낭만이 없지 않았다. 당일여행으로 신청했던 홋카이도 내륙의 후라노와 비에이가 더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

편지를 매개로 하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새 책을 마주하니 참 감회가 새롭다. 20년 전, 중학교 동창생이자 첫사랑인 미사키에 관한 사소설로 작은 신인상을 타며 소설가로 데뷔했으나 이후 변변한 작품 하나 내지 못하는 40대 중반 남성 오토사카 교시로는 중학교 동창회에서 혹시나 미사키를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하며 고향으로 내려온다. 그런데 동창회 자리에는 미사키의 동생 유리가 참석하여 미사키인 척을 하고 있다. 좀 일찍 자리를 뜬 교시로와 유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얘기를 나누지만 유리는 여전히 미사키인 척을 하며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 실은 미사키는 한 달 전쯤 스스로 목숨을 끊어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연치 않게 유리로부터 편지가 오기 시작한다. 미사키인 척하고. 아직도 널 사랑한다는 교시로의 핸드폰 메시지를 불 같은 성질의 남편이 발견하여 휴대폰을 박살내버린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유리의 편지.

한편 유리의 딸 소요카는 사촌언니 즉 미사키의 딸 아유미를 지켜주고 싶어 장례식 이후 외할머니 댁에서 아유미와 함께 머문다. 한편 아유미의 남동생 에이토는 이모인 유리의 집에 와서 지낸다. 혹시나 해서 예전 미사키의 부모님 집으로 편지를 보낸 교시로에게 미사키에게서 답장이 온다. 유리의 필체와 조금 다른 그 편지는 또 무엇인지 어리둥절한다.

*

이와이 슌지 감독의 책과 영화는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지 머리로 판단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 남편이 스마트폰을 부쉈다고 스마트폰 없이 살며 편지를 쓴다는 설정 자체에는 무리가 있을 수도 있지만 마음으로 느껴지는 것이 많은 감성적인 소설이었다.

인간관계도 세상 풍조를 따라 변하는데 한 여자를 이렇게 지고지순하게 사랑하고 그리워할 수 있을까? 아마 제대로 종결을 하지 못해서 그랬던 것 같다. 자신을 두고 다른 남자와 사랑의 도피를 한 여인이었기에 그랬을까?

유리 부부의 살벌한 부부싸움을 구경하는 잔재미가 있었다. 참 그 남편에 그 부인이다 싶었으나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했나, 결국 훈훈하고 따숩게 화해가 일어난다.

무엇보다 아유미와 에이토의 마음의 고통이 내 마음을 저몄다. 내가 엄마라는 입장이어서일까? 세상 그 무엇보다 비빌 언덕이 되어 주는 엄마. 그 엄마가 모든 것, 자기들까지 버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세상을 등졌다는 것이 얼마나 큰 상처가 될까? 이모에게도 말은 하지 않지만 초등학교 5학년 에이토의 몸부림이 너무 안쓰러워서 꼭 안아주고 싶었다. 이들에게도 엄마를 그렇게 사랑했던 교시로의 존재는 한 줄기 위안이 되었던 것 같다. 언젠가는 이해할 수는 없어도 수용할 수 있기를... 그래서 건강하고 다부진 어른이 되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읽었다.

그리고 고향을 방문하고 일련의 편지 소동을 통해 덜 자란 듯한 어른인 교시로 역시 맘추었던 시계바늘이 이제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아서 흐뭇했다.

이 작품 역시 영화로 제작되었다. 일본의 정우성이라고 불리는 후쿠야마 마사하루가 주인공 교시로 역을 맡고, <4월 이야기>의 여주인공 마츠 다카코가 유리 역을 맡는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핫한 신인 히로세 스즈가 미사키를 맡는다. 상당히 어울리는 캐스팅 같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고향인 미야기 현에서 촬영이 되었다고 한다. 자연이 무척 아름다워서 치유가 있는 이야기와 어울리는 배경이 될 것 같다. 왠지 40대가 된 미사키 역에는 이시다 유리코가 자꾸 오버랩되었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아름다운 배우라서 그런 것 같다.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라도 몇 자 쓰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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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타자기 미스티 아일랜드 Misty Island
황희 지음 / 들녘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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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읽으면서 울컥하고 잔상이 오래 남는 소설은 드물 것이다. 시작부터 무척 음울하고 피 냄새 진동한다. 거기에 타임워프라니, 내가 두려워하는 SF물이라서 정신 바짝 차리고 읽었다. 하지만 술술 읽혔고 빨리 결말을 보고 싶었다. 다 읽고 나서 이틀 정도는 그 잔상을 곱씹으며 묵혀두는 편인데 역시 더 잔잔히 마음 속에 스며들었다. SF의 옷을 입은 철학소설이자 성장소설이라고 하고 싶다.

당신의 아이에게 백일몽을 꾸는 방법을 가르치세요.

 

"백일몽은 겉으로 보기엔 시간을 죽이는 게으른 행동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창조성과 학습의 숨겨진 원천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두 개의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는데 일하는 뇌와 백일몽을 꾸는 뇌다. 두 가지는 동시에 작동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일하는 네트워크를 작동시킬 땐 상상에 잠긴 네트워크를 차단한다."(302쪽)

이런 철학이 이 소설의 기본이 되었다고나 할까? 백일몽이 주인공 지하에게는 구원이 되었다. 발을 땅에 붙이지 않고 붕 떠서 백일몽에 빠져 있는 현실을 도피하는 듯하지만 가장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에 변화를 일으킨 것은 지하였다. 그리고 백일몽의 힘이었다.

백일몽... 언젠가부터 나와는 상관없는 단어가 되었다.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고, 자투리 없이 seamlessly 잇고 채우고 그것이 가장 보람된 것처럼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살아왔다. 인일기백... 말은 좋지만 남들보다 모자라고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에 남들 1의 노력을 할 때 100의 노력을 해야 한다며 나 자신을 들볶고 채근해왔다. 이 영향은 육아에까지 미쳐서 아이들이 심심하다고 하거나 마루바닥에서 뒹굴거리면 정말 환장하겠다. 아이들을 탓하지는 않는다. 나를 탓한다. 엄마로서 뭔가를 제대로 안 해 주고 있는 것 같다는 자책이다.

하지만, 어떤 글에서 봤다. 아이들이 책만 읽으면 바보가 된다고, 멍하니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멍하니 있으며 '엄마, 아빠가 죽으면 어떻게 돼?' 이런 사유에도 빠지고 철학을 할 여백이 생긴다는 의미의 글이었다. 그후로는 마음이 좀 가볍다. 멍하니 있는 시간을 아이들에게 허락하고 있고 정말 아이들이 기상천외한 발상을 할 때가 있다.

청각장애인이자 가정폭력의 희생자인 지하가 쉴 수 있는 것은 백일몽에 빠질 때였다. 지하를 단단하게 하고 땅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게 했던 것도 백일몽이었다.

 

모성이란? 산후우울증이란?

 

지하에게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산후우울증이 뭐길래 자기가 낳은 자녀를 죽일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일까? 지하만큼 안쓰러운 건 냉소로 가슴 속에 고통을 묻어버린, 지하의 동생 지민이다.

아이를 10개월 몸속에 품으면 모성이 절로 생기나? 아이 둘을 낳았지만 그건 잘 모르겠다. 모성에 관한 신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은 익숙한 '엄마'라는 호칭도 어찌나 어색하고, 뭐든지 서투르고 어설픈 나 때문에 아이가 행여 죽기라도 할까 봐 툭하면 가슴에 귀를 대 보고 코 앞에 손가락을 대보곤 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들 다 건강하게 아이를 잘도 낳는데 난 26주가 지나자마자 큰아이를 조산했다. 1kg로 태어난 아이는 점점 체중이 빠져서 860g까지 간 지경까지 경험했다. 83일간의 인큐베이터 생활을 거쳐 집에 온 아이를 어떻게 해 줘야 할지 몰라서 망연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몰두했기에 산후우울증 걸릴 새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83일간도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전철을 갈아타고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아이를 면회 다니며 가슴을 졸였던 것 같다.

벌써 13년 전, 산후우울증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동아리 언니가 생각난다. 결혼을 며칠 앞으로 앞둔 나에겐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결혼 앞두고 있다고 장례식장 같은 데 가는 거 아니라고 다들 말렸지만 미신 따위 믿지 않고 마땅히 가서 조의를 표해야 했기에 꽤 먼 거리였지만 장례식장에 갔었다. 그때 태어난 언니의 딸아이가 이젠 14살이 되었겠다. 나보다 나이도 훨씬 많으셨는데 너무나 따뜻하고 궂은 일은 도맡아 하시던 분이었다. 기독교 동아리였기에 대부분 좋은 분들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언제나 말 없이 챙기시던 분이었다. 늦게 배우자를 만나셔서 늦게 낳은 귀한 아이였는데 많이 힘드셨나 보다. 언니의 결혼식 때 뵙고 그 다음이 장례식이었다.

지하의 엄마는 누가 보더라도 우울증에 걸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너무나 안쓰럽고 가장 속이 상했던 캐릭터였다. 그녀를 어찌 비난하랴. 그녀의 착한 심성을 이용한 친정 식구들과 인간의 탈을 쓴 악마들인 시집 식구들 탓이지. 어린 코끼리를 묶어놓고 길들이면 어른이 되어서도 아무 결박도 하지 않더라도 도망하지 않는다고 한다. 바로 그런 엄마에게 물꼬를 터주고 제2의 인생을 선물해 준 것이 바로 지하였다.

언제든 성장의 기회는 있다

 

지하는 자신이 선택하여 자립했고 자신의 길을 개척했으며 꿈이었던 소설을 쓰고 또 쓰며 성장했다. 어른이 되었다. 모든 괴롭힘과 무시를 이겨내고 승자가 되었다. 그리고 <조용한 세상>이라는 소설을 써서 엄마에게 보냈다. 엄마는 소설을 읽으며 여태까지 자기 눈을 가리웠던 깍지를 떼어내고 자신의 손과 발을 결박했던 것들을 스스로 깨뜨리고 세상으로 나온다. 같이 살고 싶지만, 여태까지 나누지 못했던 마음을 나누고 싶지만, 지하는 미국으로 떠나겠다고 한다. 엄마에게 혼자 다시 일어설 기회를 준 것이다. 젊음이 지나버렸지만, 엄마에겐 성장의 기회가 눈앞에 펼쳐져있다. 늦은 때는 없는 것 같다.

매력적인 소설적 장치

 

인물 하나하나가 얼마나 매력적이고 개성적으로 설계되었는지 모른다. 주인공과 주변인물, 특히 악역들까지도 손에 잡히고 눈앞에 펼쳐지듯 선명하다. 시나리오 작가들이 쓴 책들은 믿고 보는데 저자의 시나리오 작가 경력이 빛을 발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타임워프도 무척 매력적인 장치로 사용되었다. 복잡해 보였지만 독자가 따라 가기 어렵지 않도록 친절하게 구성한 것 같다.

뒷표지에 실린 추리소설가님들의 극찬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이 작품은 2019년 제7회 교보문고 스토리공모전 중장편 부문에서 심사위원들의 극찬을 받으며 우수상을 수상했다. 장치들만 훌륭하다고 되는 것이 아닐 텐데, 매끄러운 글 솜씨와 표현력 역시 마구 수집하며 읽었다. 아름다운 우리말로 쓰인 우리 소설은 나에게 좋은 참고서이다. 어휘를 다룸에 있어서 가장 살아있고 풍성한 밭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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