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의 타자기 미스티 아일랜드 Misty Island
황희 지음 / 들녘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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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읽으면서 울컥하고 잔상이 오래 남는 소설은 드물 것이다. 시작부터 무척 음울하고 피 냄새 진동한다. 거기에 타임워프라니, 내가 두려워하는 SF물이라서 정신 바짝 차리고 읽었다. 하지만 술술 읽혔고 빨리 결말을 보고 싶었다. 다 읽고 나서 이틀 정도는 그 잔상을 곱씹으며 묵혀두는 편인데 역시 더 잔잔히 마음 속에 스며들었다. SF의 옷을 입은 철학소설이자 성장소설이라고 하고 싶다.

당신의 아이에게 백일몽을 꾸는 방법을 가르치세요.

 

"백일몽은 겉으로 보기엔 시간을 죽이는 게으른 행동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창조성과 학습의 숨겨진 원천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두 개의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는데 일하는 뇌와 백일몽을 꾸는 뇌다. 두 가지는 동시에 작동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일하는 네트워크를 작동시킬 땐 상상에 잠긴 네트워크를 차단한다."(302쪽)

이런 철학이 이 소설의 기본이 되었다고나 할까? 백일몽이 주인공 지하에게는 구원이 되었다. 발을 땅에 붙이지 않고 붕 떠서 백일몽에 빠져 있는 현실을 도피하는 듯하지만 가장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에 변화를 일으킨 것은 지하였다. 그리고 백일몽의 힘이었다.

백일몽... 언젠가부터 나와는 상관없는 단어가 되었다.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고, 자투리 없이 seamlessly 잇고 채우고 그것이 가장 보람된 것처럼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살아왔다. 인일기백... 말은 좋지만 남들보다 모자라고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에 남들 1의 노력을 할 때 100의 노력을 해야 한다며 나 자신을 들볶고 채근해왔다. 이 영향은 육아에까지 미쳐서 아이들이 심심하다고 하거나 마루바닥에서 뒹굴거리면 정말 환장하겠다. 아이들을 탓하지는 않는다. 나를 탓한다. 엄마로서 뭔가를 제대로 안 해 주고 있는 것 같다는 자책이다.

하지만, 어떤 글에서 봤다. 아이들이 책만 읽으면 바보가 된다고, 멍하니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멍하니 있으며 '엄마, 아빠가 죽으면 어떻게 돼?' 이런 사유에도 빠지고 철학을 할 여백이 생긴다는 의미의 글이었다. 그후로는 마음이 좀 가볍다. 멍하니 있는 시간을 아이들에게 허락하고 있고 정말 아이들이 기상천외한 발상을 할 때가 있다.

청각장애인이자 가정폭력의 희생자인 지하가 쉴 수 있는 것은 백일몽에 빠질 때였다. 지하를 단단하게 하고 땅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게 했던 것도 백일몽이었다.

 

모성이란? 산후우울증이란?

 

지하에게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산후우울증이 뭐길래 자기가 낳은 자녀를 죽일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일까? 지하만큼 안쓰러운 건 냉소로 가슴 속에 고통을 묻어버린, 지하의 동생 지민이다.

아이를 10개월 몸속에 품으면 모성이 절로 생기나? 아이 둘을 낳았지만 그건 잘 모르겠다. 모성에 관한 신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은 익숙한 '엄마'라는 호칭도 어찌나 어색하고, 뭐든지 서투르고 어설픈 나 때문에 아이가 행여 죽기라도 할까 봐 툭하면 가슴에 귀를 대 보고 코 앞에 손가락을 대보곤 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들 다 건강하게 아이를 잘도 낳는데 난 26주가 지나자마자 큰아이를 조산했다. 1kg로 태어난 아이는 점점 체중이 빠져서 860g까지 간 지경까지 경험했다. 83일간의 인큐베이터 생활을 거쳐 집에 온 아이를 어떻게 해 줘야 할지 몰라서 망연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몰두했기에 산후우울증 걸릴 새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83일간도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전철을 갈아타고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아이를 면회 다니며 가슴을 졸였던 것 같다.

벌써 13년 전, 산후우울증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동아리 언니가 생각난다. 결혼을 며칠 앞으로 앞둔 나에겐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결혼 앞두고 있다고 장례식장 같은 데 가는 거 아니라고 다들 말렸지만 미신 따위 믿지 않고 마땅히 가서 조의를 표해야 했기에 꽤 먼 거리였지만 장례식장에 갔었다. 그때 태어난 언니의 딸아이가 이젠 14살이 되었겠다. 나보다 나이도 훨씬 많으셨는데 너무나 따뜻하고 궂은 일은 도맡아 하시던 분이었다. 기독교 동아리였기에 대부분 좋은 분들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언제나 말 없이 챙기시던 분이었다. 늦게 배우자를 만나셔서 늦게 낳은 귀한 아이였는데 많이 힘드셨나 보다. 언니의 결혼식 때 뵙고 그 다음이 장례식이었다.

지하의 엄마는 누가 보더라도 우울증에 걸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너무나 안쓰럽고 가장 속이 상했던 캐릭터였다. 그녀를 어찌 비난하랴. 그녀의 착한 심성을 이용한 친정 식구들과 인간의 탈을 쓴 악마들인 시집 식구들 탓이지. 어린 코끼리를 묶어놓고 길들이면 어른이 되어서도 아무 결박도 하지 않더라도 도망하지 않는다고 한다. 바로 그런 엄마에게 물꼬를 터주고 제2의 인생을 선물해 준 것이 바로 지하였다.

언제든 성장의 기회는 있다

 

지하는 자신이 선택하여 자립했고 자신의 길을 개척했으며 꿈이었던 소설을 쓰고 또 쓰며 성장했다. 어른이 되었다. 모든 괴롭힘과 무시를 이겨내고 승자가 되었다. 그리고 <조용한 세상>이라는 소설을 써서 엄마에게 보냈다. 엄마는 소설을 읽으며 여태까지 자기 눈을 가리웠던 깍지를 떼어내고 자신의 손과 발을 결박했던 것들을 스스로 깨뜨리고 세상으로 나온다. 같이 살고 싶지만, 여태까지 나누지 못했던 마음을 나누고 싶지만, 지하는 미국으로 떠나겠다고 한다. 엄마에게 혼자 다시 일어설 기회를 준 것이다. 젊음이 지나버렸지만, 엄마에겐 성장의 기회가 눈앞에 펼쳐져있다. 늦은 때는 없는 것 같다.

매력적인 소설적 장치

 

인물 하나하나가 얼마나 매력적이고 개성적으로 설계되었는지 모른다. 주인공과 주변인물, 특히 악역들까지도 손에 잡히고 눈앞에 펼쳐지듯 선명하다. 시나리오 작가들이 쓴 책들은 믿고 보는데 저자의 시나리오 작가 경력이 빛을 발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타임워프도 무척 매력적인 장치로 사용되었다. 복잡해 보였지만 독자가 따라 가기 어렵지 않도록 친절하게 구성한 것 같다.

뒷표지에 실린 추리소설가님들의 극찬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이 작품은 2019년 제7회 교보문고 스토리공모전 중장편 부문에서 심사위원들의 극찬을 받으며 우수상을 수상했다. 장치들만 훌륭하다고 되는 것이 아닐 텐데, 매끄러운 글 솜씨와 표현력 역시 마구 수집하며 읽었다. 아름다운 우리말로 쓰인 우리 소설은 나에게 좋은 참고서이다. 어휘를 다룸에 있어서 가장 살아있고 풍성한 밭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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