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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러 나가다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숨 쉬러 나가다(국내 초역, 숨은 걸작)
조지오웰장편소설(이 한중 옮김)/한겨레 출판(초판1쇄 2011.4.11), 366쪽
내가 조지오웰의 작품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1984>,<동물농장>뿐이었다.
그러다 재작년에 오웰의 새 작품 르포<위건부두로 가는길>, 에세이집<나는 왜 쓰는가>가 번역되어 나온 것을 보고 호기심에 읽게 되었는데 그 에세이중 <스파이크>,<나는 왜 쓰는가>,<교수형> 등을 읽으면서 나의 관심은 급속도로 커질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오웰도 전작주의작가로 내 리스트에 올려놓았다.
한편 요즘처럼 출판계가 어렵다며 말들하는데 사실 정말로 읽을 만한 책들은 소수이고, 그것도 잠시 나왔다가는 사람들의 무관심에 묻혀버리고 마는데 비해 사람들의 값싼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들은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런데 조지오웰의 숨은 걸작들을 이렇게 찾아내어 번역한 '이한중'씨에게 나는 독자로서 감사를 표하고 싶다.
이 소설이 특별한 것 한가지는 오웰의 문학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1936년 이후에 쓴 첫 소설이자, <동물농장>을 내놓기 전에 쓴 마지막 소설이라는 것이다.
오웰은 1936년 이후로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작업에 힘써왔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 소설은 뚱보이며 보험회사 세일즈맨인 중년의 '패터'는 전형적인 가장으로 발랄하지만 쉽게 체념하는 성격이다. 중년의 나이가 되면 대부분 그렇듯이 앞만보고 달려온 자신에 대해 한번쯤 되돌아 보고 탈피하고자 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우연히 경마에서 돈을 딴 그는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서 그 돈을 쓰는 궁리를 하고 20년이 넘도록 못가본 고향으로 갈 계획을 세우면서 그의 오뒷세이아는 시작된다.
어린시절에 살았던 집과 젊은 시절의 연인 등을 만날 꿈을 꾸며 떠나게 되는 여정등을 그린 것이다.
이 책에도 오웰 특유의 심각한 얘기를 코믹하게 이끌어내는 유머와 독설가득한 통찰을 보면서 독백처럼 이어지는 이야기가 자칫 지루해지는 것을 되돌려 놓곤 한다.
그는 상실에 대한 아픔을 표현하면서도 감상적으로 빠지지 않도록 환기시키는 놀라운 재주를 부린다.
누구에게나 되돌아 가고픈 그런 오뒷세이아가 있다.
그것이 실제하든 존재하지 않든 마음 속에 간직한 자기만의 숨쉴 공간을 필요로 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자신만의 숨쉴 공간을 방해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밑줄>
개인으로서의 나라는 존재가 꽤 중요해 보이는 대부분의 순간, 나는 늙은 개에게도 아직 누릴 생이 있으며 좋은 때가 많이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는 느낌으로 산다. (18)
모든 뜽뚱한 남자들 속에 야윈 남자가 있다는 생각을 혹시나 해보신 적이 있는지? 모든 돌덩이 안에 조각상이 있다고 하듯 말이다.(35)
어떤 생각을 하든 , 이 세상엔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항상 100만명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 나는 나뿐이라고 느꼈다. 우리 모두 불타는 갑판에 서 있는데 나만 불이 난 줄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스쳐가는 인파를 보니 모두 넋나간 얼굴들이었다. 11월의 칠면조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일이 다가올지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 말이다 . 나 혼자만 눈에 엑스레이라도 달려 있어서 해골들이 걸어가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43)
과거는 참 묘한 것이다. 과거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과거는 실체를 띠지 않는다. 그러다 어떤 우연한 광경이나 소리나 냄새, 특히 냄새가 우리를 자극하게 되는데, 그럴때는 과거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과거 '속'에 들어가 있게 되는 것이다.(46)
우리네 인생에서 우리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지 못한다.
우리를 끊임없이 이런저런 백치같은 짓만 하도록 내모는 악마가 우리안에 있기 때문이다.
가치 있는 중요한 일 말고는 무엇이든 할 시간이 있는 것이다. 당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을 생각해보라. 그리고 당신이 살아오면서 그 일을 하기 위해 실제로 보낸 시간이 당신 인생에서 차지하는 몫을 계산해보라. 그러고 나서 면도하고, 버스로 여기저기 다니고, 기차 환승역에서 기다리고, 지저분한 이야기를 주고 받고, 신문 읽느라 보낸 시간을 계산해보라.(118~119)
아무튼 '좋은책'이란 아무도 읽을 생각이 없는 책이었다.
자신이 도달한 정신 수준에 딱 맞는 책을 발견하게 되고, 너무 잘 맞아서 마치 자신을 위해 쓴 책이 아닌가 싶기만 한 경우가 이따금 있다(173)
한여자와 15년을 살다보면, 그녀 없는 생활을 상상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녀는 주변 질서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불경스러운 소리지만 해나 달에 대해서도 못마땅한 점을 발견할수 있을텐데, 그렇다고 해나 달을 갈아치우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라는가? (198)
내가 뚱뚱해진건 너무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라, 대포알에 맞아 그 자리에 박혀버린 느낌이었다. 어떤 기분인지 아실것이다. 어느날 밤 아직 꽤 젊다고 느끼며 여자 생각같은걸 하다가 잠들었는데, 다음날 아침 깨어보니 자신이 죽는 날까지 아이들 부츠를 사주기 위해 죽어라 일만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나이먹은 뚱보일 뿐임을 철저히 자각하게 되는 기분 말이다.(202)
숨 쉬러 나간다는것! 커다란 바다거북이 열심히 사지를 저어 수면으로 올라가 코를 쑥 내밀고 숨을 한껏 들이마신 다음, 해초와 문어들이 있는 물밑으로 다시 내려 오듯 말이다.
우리는 모두 쓰레기통 밑바닥에서 질식할 듯 지내고 있는데, 나는 밖으로 나갈 길을 찾은 것이다.(241)
옛시절은 끝나 버렸고, 그걸 다시 찾으러 다닌다는건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오랫동안 내마음 한구석 어딘가에 감춰져 있다가 마침내 찾아보니 사라져 버린 존재였다.
나는 내 꿈에다 수류탄을 투척한 것이었고, 공군이 따라와 500파운드짜리 TNT를 떨어뜨린 것이었다.(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