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메아리처럼
앤절라 미영 허 지음, 임슬애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인류 사회의 오랜 정서적 뿌리는 가모장제다. 특히 한국의 신화와 전설, 설화를 보면 이 사실이 더욱 명확해진다. 이런저런 옛날이야기 속 어머니와 딸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보다 더 중하고 더 진하고 복잡미묘하다. 한국계 이민작가들의 작품 가운데 전통 신화나 민간설화에서 한두 가지 소재를 차용한 예는 적지 않다. 그런데 에밀레종, 선녀와 나무꾼, 견우와 직녀, 심청전, 바리공주 등 무척 다양한 설화와 전설이 총출동한 소설은 처음 접해본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 앤젤라 미영 허의 소설 《우리, 메아리처럼》(열린책들, 2026)은 마치 외국 독자들에게 한국 고유의 전설과 동화를 들려주는 공상과학 버전의 기묘한 고사집처럼 다가온다. 소설이 차용한 한국의 다양한 신화와 전설은 환상적이며 괴기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엘사 박은 스톡홀름에서 박사 후 과정 중인 물리학자다. 아문센 스콧 남극 기지에서 '유령 입자'라 불리는 중성미자를 연구하고 있다. 기지 가까이에 세계 최대의 중성미자 관측소인 '아이스 큐브'가 있기 때문이다. 중성미자는 "초신성 폭발이라든가 감마선 폭발, 초대질량 블랙홀의 탄생, 빅뱅 같은 대변동으로 탄생한 기본입자"인데, 전기적 중성이고 사실상 질량이 없으므로 다른 물질과 반응하지 않아 관측이 매우 어렵다. 물리학 이론상 존재하지만 실제로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그런 소립자, 즉 '유령 입자'인 셈이다.

그런데 극히 드문 일이지만 중성미자가 다른 입자와 상호작용이 일어날 경우 '체렌코프 방사선'이라는 파랗고 기다란 빛을 방출하는데, 이걸 감지하는 가장 이상적인 매개물이 바로 물이고, "남극의 얼음은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H₂O"다. 엘사가 보기에, 중성미자 연구는 "우리 존재를 이해하려는 행위에" 가까운, "과거에 관해, 어쩌면 미래에 관해 알아내려는" 일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어머니가 들려준 옛날이야기도 유령 입자 연구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엘사의 어머니는 한국전쟁 통에 어머니와 언니를 모두 잃고서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왔다. 아버지와 오빠는 미국에서 정비소를 운영하고 있다. 어머니는 신병을 앓았는데, 결국 16년간 병원 신세를 지는 '납굴증' 환자가 된다. 목욕탕 사건 이후로 긴장증에 언어 장애까지 생겼는데, 한국전쟁의 트라우마와 가문의 저주로 인해 신병이 크게 도진 것이다. 당시 엘사는 열네 살이었다. 말을 잃어버리기 전, 어머니가 어린 엘사에게 한국어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그때 목소리는 엄마의 목소리가 아니라 한풀이를 하는 무당의 목소리였다. 옛날이야기 속 여인들의 운명은 하나같이 비극적이었다. 그리고 여인들의 낮고 서글픈 목소리에는 에밀레종의 '에밀레, 에밀레' 소리처럼, 슬픔과 "끔찍하고 무서운 분노"의 정한이 담겨 있었다.

옛날이야기는 이민자의 문화적 정체성과 혈연적 뿌리에 해당하는 것들을 환기시키는 매개체다. 동시에 무속신앙과 결부된 집안 저주와 연관된 끈을 재현하는 운명의 그물망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머니는 이런 저주의 연을 끊어내고자 딸에게 본능을 거부하라고, 상상을 지워 버리고, 옛날이야기는 잊어버리라고 한다. 엘사가 물리학 박사가 된 것도 전통문화와 무속신앙의 세계를 대변하고 있는 어머니의 품으로부터 도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신병은 피를 통해 이어지기 마련. 엘사 역시 그 저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엘사는 아홉 살 때부터 귀신을 보곤 했다. 소복 차림에 빨간 댕기를 단 여자아이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